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60화 (59/122)

@60화

그는 기분이 이상해 잔을 빤히 바라봤다. 대공저를 벗어나는 게 곧, 지옥이라 여겼건만. 내일이면 다시 대공저로 돌아가는 게 아쉬울 만큼,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행복…….’

이게 행복인가? 이 따듯함이 낯설면서도 기꺼워, 그는 마음껏 웃었다. 대공은 웃음도 무거워야 하며, 잘 때조차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조부님의 조언이 환청처럼 들려왔으나 그는 귀를 닫고 린느만 바라봤다.

그녀가 저를 보며 실없이 웃는 정신 나간 대공이라 비난해도 상관없다. 이곳에서만이라도 마음 놓고 그녀에게 웃어 주고 싶단 생각에, 밀러는 그 유려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때마다 린느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거나, 딴청을 피웠다.

“취하신 건 아니죠? 아니면 속으로 제 욕 하시는 거예요?”

“하, 그건 그대가 자주 하는 짓일 텐데. 속으로 욕하는 거.”

린느는 눈치도 빠르다며 나직이 웅얼거렸다. 그는 다행히 듣지 못했는지 린느의 빈 잔을 채워줬다.

“한 번에 털어 넣는 술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어. 속이 상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마시나?”

“하지만 이렇게 단번에 마셔야 술 마시는 기분이 나는걸요?”

그대의 고집을 어떻게 막겠나. 밀러는 타박하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린느는 접시를 치우고 테이블 위에서 잠들었다. 이렇다 할 낌새도 없이 순식간에 잠든 그녀를 보며, 밀러는 헛웃음을 지었다.

린느와 단둘이 술잔도 나눌 만큼 가까워진 건 좋지만, 또 그녀가 저를 두고 잠들 만큼 편안해하는 것도 좋지만. 어쩜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잠드는 걸까? 밀러는 잠든 린느를 침대에 고이 눕혀 주며, 온갖 상념에 시달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얼굴 마주하는 것조차 껄끄러운 사이였는데, 이젠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불안 증세가 나아지고 있다. 매일이 오늘처럼 멀쩡하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오늘처럼 그녀와 함께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린느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곤히 잠든 린느를 바라보며 밀러는 픽, 웃음을 짓다가도 표정을 굳혔다. 그녀가 선사한 이 행복이 금세 가실까 두려움이 차오른 탓이다. 그는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본 후에야,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자다 일어난 린느가 저를 보고 기겁할까 걱정한 탓이다. 밀러는 소파에 기대어, 눈을 꼭 감았다. 그녀의 말대로 소파는 그에 비해 너무나 작았다. 덕분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으나, 그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이 안 오길 바랐으며, 린느가 늦잠을 자 저녁에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쉽게도 린느가 눈을 떴을 땐,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세상에!”

린느는 일어나자마자 버릇처럼 시계를 바라보며 기겁했다. 그리고는 밀러를 방에서 내쫓고 30분도 안 되어 외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신고 있던 실내용 슬리퍼를 벗고, 구두를 꺼내 발을 넣었다.

“깨우지 그러셨어요!”

“그러기엔 너무 곤히 잠들어서. 깨우면 죄를 짓는 기분일 거 같았거든.”

다급히 구두를 신던 린느가 밀러를 돌아보며 눈썹을 굽이쳤다. 놀리는 건지, 진심인 건지. 둘 중 어디라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다. 린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밀러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각하께선 소파에서 주무신 거예요?”

밀러는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넓은 침대 두고 소파에서 왜 자겠냐는 표정이었다. 한편으론, 그럼 내가 그대와 한 침대를 썼을까? 라며 놀리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체크아웃이나 하러 가요.”

그에게 대답 듣길 포기하고서 린느는 방문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밀러는 칭얼대는 아이처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따라 나왔다. 돌아가기 싫다는 기색도 역력했다.

“하루 더 있으면 좋을 텐데, 그대는 쓸데없는 곳에선 아주 부지런해.”

“쓸데없다뇨?”

대공저에서 지내라 할 땐 곧 죽을 사람처럼 굴더니, 그녀가 제게 떠드는 말들은 퍽 이질적이었다. 동시에, 어제 연회장에서 당한 수모 때문에 그녀가 쫓기듯이 저택으로 돌아가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차마 물어볼 순 없으니, 밀러는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락센에게 선사할 벌을 고르고 골랐다.

“돌아가서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자꾸 늦장이세요?”

“그대가? 아니면, 내가?”

“둘 다요. 미리안 님 걱정도 안 돼요?”

밀러는 코트 깃을 툭툭 잡아당기며 말했다.

“미리안 걱정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그럼 누가 해요?”

“난 할 만큼 해 주고 있어. 더는 할 수도 없고, 할 이유도 없지.”

린느는 그의 무심한 대답에 그를 빤히 응시했다. 만약, 자신이 미리안이었다면 그의 무심한 말투에 상처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밀러는 제 잘못이 뭔지도 모르고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린느는 잘게 도리질을 하며, 야무지게 문을 잠그고 열쇠를 검지에 끼워 휘휘 돌렸다. 그런 그녀의 뒤로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알겠어. 섀르넌이 왜 여행에 목숨을 거는지. 문 하나 잠갔다고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세상에. 각하, 진심이세요?”

“응.”

밀러는 진심으로 서운한 얼굴로 잠긴 문을 뒤돌아봤다. 그 모습이 장난감 코너를 지나치는 아이처럼 처연해, 린느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만 마치고, 여행 다녀오시면 되잖아요? 그동안 제가 열심히 저택을 지킬게요.”

린느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이었지만, 밀러는 고개를 저었다.

“섀르넌이 그랬다. 여행은 어딜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음, 그럼 알렉스 님과 다녀오세요! 친하시잖아요?”

누굴 놀리나. 밀러는 말을 말자며 린느를 마차에 태웠다. 밀러도 마차에 유연히 올라탔고, 마부는 숙련된 솜씨로 천천히 출발했다. 마차가 영지 밖을 향해 내달리자, 린느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아, 맞다. 알렉스 님한테 할 말 있었는데.”

“무슨 말.”

“라밀라 님께 초대장 전해 달란 말이요. 늦잠 자서 다 망쳤어요….”

밀러는 낙담하는 린느를 눈에 모두 담은 후에야 답했다.

“이미 보냈어.”

* * *

락센은 아침 댓바람부터 도착한 편지에 기겁했다. 소백작의 이름으로 도착한 서신이긴 했으나, 필체로 보나 말투로 보나 누가 봐도 밀러의 작품이었다. 그 초대장에 적혀 있는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어차피 올해 시즌에 연회 열 일도 없을 테니, 지체 없이 라밀라를 대공저로 재깍 보내라는 협박에 가까운 내용에, 락센은 혀를 깨물었다. 화가 치밀어 초대장을 짝짝 찢어 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용기도 없었다.

락센은 라밀라를 가둔 지하실 문을 보며 손톱을 씹었다.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기엔, 어제 라밀라가 너무 멀쩡했으며 그런 시답잖은 변명을 댔다가는, 대공가의 사람이 직접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다 밀러에게 거짓말을 들키는 날에는 온갖 꼬투리를 잡혀 또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락센은 거친 숨을 내쉬며, 지하실 문을 또다시 노려봤다. 그러자, 곁에 있던 집사장이 말했다.

“풀어 드리는 게 어떠실지요.”

“고작 8시간 갇혀 있었다고 안 죽어!”

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대공이 직접 대공저로 불러들인 까닭이 무엇인지, 제 속을 들킨 게 아닌지. 라밀라가 대공에게 무슨 말을 전할지가 두려워 발끝도 움직이기가 버거웠다.

“여, 열어!”

락센의 말에 주변에 있던 하녀들이 잽싸게 지하실 문을 열어, 라밀라를 부축했다. 환한 빛이 라밀라의 눈을 마구 찔러 대는 통에 라밀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한참이 지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곤욕스러웠다.

고작 반나절 갇혀 있었는데도 이렇게 눈이 시었으니, 거의 평생을 갇혀 지냈던 선대 대공비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라밀라는 또다시 속이 답답했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앞이 보였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다 죽어 가는 락센이었다.

반나절 동안 지하실에 갇혀 지낸 건, 라밀라 그녀였건만. 반나절 만에 마주한 남편이야말로 곧 죽을 것처럼 안색이 파리했다. 그때, 락센이 그녀에게 초대장을 건네주며 턱을 떨었다. 소백작에게서 도착한 초대장이었다.

* * *

연회장까지 출발하는 길은 그토록 길었는데, 대공저까지 향하는 길은 금방도 끝났다. 마치 어제가 꿈에서 본 신기루처럼, 돌아가는 길이 퍽 아쉬웠다.

어느새 두 사람이 탄 마차가 영지로 들어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대공저 꼭대기가 보였다.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나, 대공저 본관 입구가 보이자 사용인들이 그곳까지 나와 두 사람을 반겼다.

그들은 늘어서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메리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루비는 주근깨가 어린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는 것도 모자라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기까지 했다. 그리고 끄트머리에 보일 듯 말 듯, 넬 부인도 보였다.

‘넬 부인? 허, 편지가 마음에 들었나?’

린느는 싱긋 웃었다. 어차피 대공가의 가신이 된 이상, 이들과의 인연은 꽤 길어질 테니 척을 둬서 좋을 게 없다. 게다가, 넬 부인은 표현에 서툴러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 하루라도 빨리 친해지는 게 좋을 것이다. 그때,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잃고 입구에 딱 멈췄다.

달칵.

집사장이 마차 문을 열어 주며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각을 잰 듯이 군더더기 없는 모양새였다. 밀러는 마차에서 유연하게 내려와, 언제나 그래왔듯이 린느의 손을 잡아 직접 내려줬다. 그때마다, 사용인들의 눈이 바삐 움직였다.

“각하를 뵙습니다.”

밀러는 그들을 천천히 살피며, 낯선 광경을 음미했다. 다른 영지의 연회에 참석한 적이 없어, 그들의 이러한 인사는 처음 받은 셈이었다. 남들 눈에는 지극히 평범한 모양새일지 몰라도, 속을 아는 대공저 사용인들은 밀러의 상태가 호전되었음을 직감하여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고작 하루, 연회를 다녀온 것뿐인데도 많은 게 달라졌다. 그는 하루 사이에 행복을 알게 됐으며, 여행을 떠나고 싶단 욕구마저 느끼고 있다. 그는 제 옆에 나란히 선 린느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것조차 모르고 살던 제게, 이 모든 걸 깨닫게 해 준 린느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동시에, 두려움이 생겼다. 행복이 얼마나 달달한지 알게 되었으니, 다시 행복을 잃었을 땐,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는 절대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왜 저렇게 째려본담.’

린느는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밀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으로 욕을 하나? 왜 저렇게 쳐다보는지 모르겠단 듯이, 도리질하며 미리안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미리안은 보이지 않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