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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57화 (56/122)

@57화

“네? 아니, 아직 연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요? 아직 한창이잖아요.”

“끝났어.”

그의 말대로 그가 자리에서 떠나는 순간, 오늘 연회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더불어 연회 시즌에 열린 연회 첫날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면, 연회 시즌 내내 손해가 막심하니 사실상 밀러의 말대로 락센 경의 연회는 올해로 끝난 셈이다.

‘처음부터 연회에 참석한 이유가 이거였나 보네. 하여튼.’

린느는 밀러의 계획을 읽고서 도리질을 했다. 별다른 수고 없이 상대가 일궈 온 걸 망가트리는 방법. 이는 밀러가 왜 얼음송곳이라 불리는지 와닿을 만큼 완벽한 방법이었다. 얼음송곳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동시에, 햇빛에 녹아 사라지면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무기가 아닌가. 밀러가 처리한 일들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상대가 일궈 온 꽃밭에 불을 지르기보단, 꽃밭 주인을 홀려다가 직접 꽃을 짓밟게 만드는 방식 말이다.

그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연회장 밖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을 따라나선 귀족들도 상당했다.

“각하, 우리 정말 이대로 가요?”

“연회가 끝났는데 남을 이유가 없지.”

“끝난 게 아니라 각하께서 끝낸 거 아니에요? 그리고 주최자한테 인사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간다구요?”

밀러는 그녀의 순진한 질문에 다정하게도 웃었다.

“우리가 참석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깟 인사보다 그대의 건강이 더 중요해.”

무심한 표정에 그렇지 못한 말투였다. 린느는 갑작스레 훅 들이닥친 밀러의 고백에 잠시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집무실을 함께 쓴 이후로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상하리만큼 그가 다정해졌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표현하는 다정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진 몰라도, 적어도 린느가 알고 있던 밀러의 모습과는 달랐다. 린느는 얼음송곳보다 아찔한 남자의 금안을 바라봤다. 이렇게 바라만 봐도 설레기에 충분한 외모다. 하지만 그에게 설레면 안 되지 않나? 그런데도 설렌다. 동시에 그 감정을 느끼는 제게 짜증이 나지만, 그 감정마저 불쑥 잊힐 만큼 그의 다정은 퍽 위험하다. 그가 이렇게 다정을 떨 때면, 그에게 의지하고 싶단 충동이 일어 짜증이 차오른다. 린느는 짜증스럽단 듯 툭 물었다.

“저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난데없는 질문에 밀러는 린느를 바라보며 미간을 움찔했다. 그럼, 누가 걱정하지? 밀러는 그녀의 물음이 너무 터무니없어 당혹스러웠다. 동시에, 쏘아보며 묻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걸렸다. 조금이라도 무성의한 대답을 했다가는 괜한 오해를 할 것처럼 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젖어 보였다. 수많은 선택지에서 밀러는 그답지 않게 허둥댔다.

밀러는 잠시 고민하더니, 정성껏 추린 대답을 조심스레 말했다.

“…대공저로 돌아가면 무리할 게 더 많아지니 여기서 무리할 거 없어.”

손바닥 하나면 가려질 몸으로 쓸데없는 연회장에서 기운 뺄 이유도 없고, 이 이상 연회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그녀에게도 하등 좋을 게 없었다. 차라리 남는 체력으로 다른 걸 하는 게 낫겠지. 밀러는 정직한 대답을 내놓은 걸 만족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 넵.”

그러니까, 미리안 감시하고 귀족법 공부도 해야 하니 무리하지 말란 거지? 린느는 막 불붙은 불씨에 차가운 물을 끼얹었다. 그럼 그렇지. 저 남자가 누굴 걱정하는 날이 온다면, 그건 무언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거지.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잖아? 린느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 * *

대공이 연회장을 나서자마자,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이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성거리던 대화 소리도 잦아들었으며, 귀족들은 서로 시선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눈치 빠른 귀족들은 이미 핸드백까지 챙겨 들고 취한 척 연기를 해댔다.

“어으, 제가 이럽니다. 요즘엔 와인 한 잔도 즐기지를 못해요. 어우, 속 안 좋아.”

어떤 부인은 이마를 감싸고 부채질을 해 댔으며, 어떤 귀족은 헛구역질해 대며 과음했다 주장했다. 나이 든 귀족들은 아주 마차에 올라타 잠든 척 연기하며 금방이라도 연회장을 떠날 기세였으니, 연회장 분위기는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고작, 대공이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 하나였다.

“속이 안 좋으시다니요?”

속이 안 좋기로서니 나보다 안 좋을까! 락센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화를 꾹 누르고 웃으며 물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하니, 뺨을 이루는 근육들이 파르르 떨렸다. 그 꼴을 보고도 속이 안 좋다던 귀족은 끝내 제 할 말을 이었다.

“아유, 걱정은 마세요. 의원이 그러는데, 제가 위와 간이 안 좋답니다. 그래서 그런 거지, 저어얼대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내빼는 데에는 황제도 한 수 접고 갈 만큼 노련한 이들이었다. 귀족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와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급급했다. 그중에서 누가 가장 먼저 빠져나갔느냐, 누가 가장 먼저 대공의 뒤를 이어 연회장을 나섰는지가 중요했다.

‘망할 놈들. 쥐새끼들처럼 도망가는 꼴이라니……!’

눈 깜빡할 사이에 연회장을 가득 채우던 인파가 손에 꼽을 만큼만 남고 싹 빠져나갔다. 그 꼴을 보며 락센은 어금니를 아득바득 물면서 억지로 웃었다. 그야말로 뺨에 경련이 일만큼 억지로 웃어야만 했다.

“락센 경, 이를 어쩌지요?”

“그쪽도 과음을 하셨습니까?”

쨍하니 째려보며 되물었다. 이놈도 저놈도 모조리 다 망할 위장 탓을 해 대니 화가 넘쳤다. 평소에는 일주일 내내 연회장에서 술을 퍼다 마셔도 멀쩡하던 것들이, 성의도 없는 핑계를 대며 도망을 가니, 저도 모르게 화가 솟았다. 하나, 그 화가 향한 곳은 엉뚱한 곳이었다.

“네? 아니……. 내일은 딸 아이의 데뷔탕트라 오지 못할 거란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저번 주부터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귀족의 표정엔 불쾌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락센 경은 뒤늦게 아차 하며 어색하게 웃었으나, 귀족은 이미 기분이 상한 얼굴로 묵례만 마치고 자리를 비켰다. 락센은 자조하며 화를 짓눌렀다.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떠나는 귀족들을 다정하게 배웅해 주는 라밀라가 보였다.

‘저 망할 게 다 망쳤어. 분명히, 저게 소백작한테 말을 전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라밀라의 얼굴이 저렇게 만개한 꽃처럼 필 리가 없지 않은가.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시들시들하던 라밀라가 마음 놓고 미소 짓는 모습에 락센은 확신했다. 라밀라가 소백작에게 제 어린 동생을 남편에게서 구해 달라 빌었을 거라고.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지지만, 마냥 나쁠 것도 없다.

눈치 없는 소백작이 알량한 동정심으로 라밀라의 여동생을 구해 달라며 대공에게 빌어 봐야, 대공은 티끌만큼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지, 오히려 그딴 말을 꺼냈다며 그 싹수없는 소백작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르지.’

대공과 라밀라가 엮여 봐야, 라밀라는 잃을 게 없을 테니 더 난감한 쪽은 대공일 것이다. 그런데 소백작이 눈치 없이 라밀라를 도와주라 부탁한다면, 대공은 소백작에게 화를 품을 것이다. 락센은 잔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못된 소백작이 대공에게 소박맞는 꼴이 상상되어 고소한 것도 있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라밀라를 보고 있자니, 웃겨 죽을 것만 같았다.

‘열심히 발로 뛰어 봐. 네년이 그토록 찾는 동생은 이미 뒈졌거나 사라졌을 테니까.’

라밀라의 어린 여동생은 그저 협박용이다. 저 영악한 여자를 얌전하게 만들려면, 적어도 협박할 거리라도 있어야 했으니까. 사실, 이런 허술한 협박에 라밀라가 냉큼 속아 준 것도 락센에겐 큰 수확이었다.

‘어디부터 뒤져 봐야 하려나. 시장이나 빈민굴부터 뒤져야 하나?’

라밀라의 여동생 시체든 무덤이든 찾아야 한다. 그걸 라밀라의 눈앞에 보여 주면 그녀는 실성할 테지. 그럼, 그때 라밀라에게 이혼을 청구할 것이다. 지금에야 이혼하지 않겠다며 저렇게 버티고 있지만, 그땐 이혼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내가 빵 한 조각이라도 주나 봐. 저 잘난 입에서 뭐라도 나올 때까지 가만 안 둘 테니까.’

락센은 대공가의 비밀을 뜯어 내고자 무리해서 라밀라와 혼인을 발표했다. 그 당시 밀러가 텅 비운 금고를 다시 채우느라 족히 4년은 걸렸으며, 그렇게 어렵사리 채운 금고는 라밀라와의 혼인으로 다시 텅 비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던 라밀라의 굳은 의지 탓이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는가! 라밀라의 입에는 장인이 만든 자물쇠가 달렸는지, 티끌만큼의 정보도 얻지 못했다. 그러니, 그녀가 금고를 털어먹은 값은 부려야만 했다.

‘젠장맞을 대공가 것들은 내 금고를 털어먹는 데에 이골이 났어.’

대공가의 악연은 끈질겼다. 밀러의 말 한마디로 그가 매입한 알짜 땅값이 낙화처럼 우수수 떨어졌고. 몇 년 전에는 그가 주최한 연회에 대공이 참석한다기에, 온갖 귀족들에게 허풍을 떨어놨는데 대공은 연회에 불참했다. 그 탓에 한동안 제국의 허풍쟁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했으니, 당시의 창피함은 아직도 남아 있다.

게다가, 마주칠 때마다 그 서늘한 금안으로 사람을 어찌나 겁을 주는지! 락센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화난 짐승처럼 숨을 뱉었다.

‘어디 맨몸으로 쫓겨나도 그 고고한 주둥이가 여전히 다물려 있을지 궁금하군.’

1년 동안 공들여 준비한 연회장에 남은 귀족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락센은 와인잔을 테이블에 턱 내려놓더니, 곁에 있던 사용인에게 무어라 일렀다. 그러자, 사용인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라밀라에게 달려가 속삭였다. 그러자, 라밀라의 얼굴이 대번에 차게 식었다.

라밀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두려운 얼굴로 락센을 돌아봤다. 그러자, 그는 뱀처럼 웃으며,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의 추악한 입에서 무슨 말들이 쏟아질지 걱정이 앞섰다.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지자, 락센은 라밀라의 얇은 손목을 단번에 채갔다.

“놓고 말해요.”

라밀라는 나직이 으르렁대며 말했지만, 락센의 눈동자는 단정치 못했다. 오히려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소백작까지 대공 눈 밖에 나게 하려고 작정을 했나 보군. 왜, 소백작이 미쳤다고 네 말만 듣고 대공에게 부탁이라도 할까 봐? 못된 남편에게서 여동생 좀 구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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