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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56화 (55/122)
  • @56화

    밀러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조금 남은 와인잔을 들자, 멀찍이서 락센이 목줄 채워진 짐승처럼 헐레벌떡 뛰어왔다. 손재주 좋은 사용인을 데려다 정성껏 매만진 머리칼이 식은땀에 망가졌으나, 락센 경은 개의치 않았다. 머리카락이 달린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깟 머리칼이 문제일까.

    “부르셨습니까, 각하!”

    뒤에서 열심히 나불대던 입이 이제는 다시 각하라 존칭을 해댄다. 잘난 주둥이의 이면에 밀러는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 뒤에서 험담만 했을까?

    대공저의 뒤를 캐려고 라밀라와 혼인한 살쾡이 주제에 각하는 무슨 얼어 죽을 각하. 밀러는 그의 대답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서늘하게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에 간담이 서늘하여 배가 아플 지경이었으나, 락센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 망할. 제기랄. 염병 맞을 것!’

    락센은 속으로 라밀라를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약삭빠른 라밀라가 소백작에게 무어라 일러다 바쳤는지 두려움이 더욱더 커진 탓이다. 그리고 밀러는 그의 두려움을 먹는 악마처럼 그의 두려움을 방치했다. 그가 락센에게 하사한 벌이었다.

    밀러는 말없이 와인을 까딱거렸다. 빈 잔이나 채우라는 뜻이었다. 락센 경은 그간 두 발로 뛰며 익힌 눈치로 그의 빈 잔을 손수 채웠다. 그것만으로도 퍽 수치스러웠으나, 락센은 수치보단 안도를 택하여 음미했다. 붉은 와인이 잔을 천천히 채우자, 밀러가 말했다.

    “손은 쓸 만한데.”

    “……예?”

    “그 주둥이가 문제인가? 아니면 머리가 문제인지.”

    밀러의 시선이 바늘처럼 날카롭게 락센의 얼굴에 꽂혔다. 마치,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입을 꿰맨 것처럼 락센은 밀러의 말에 더는 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찔리는 게 어디 한둘인가? 락센은 입을 떼길 포기하고 발발 떨리는 손으로 와인병을 꽉 잡았다.

    이런 괴물을 직접 연회장에 초대한 과거의 자신이 야속할 뿐이었다. 라밀라에게 협박할 겸, 이 괴물의 심기를 박박 긁기 위해 초대했건만. 정말 그가 연회에 응할 줄이야. 이미 거기서부터 일은 틀어졌던 거였다. 아니, 애초에 그를 초대한 시점부터 잘못된 것이다.

    ‘하이레니아 후의 말대로 할 것을 내가 너무 쉽게 봤어.’

    그래. 애초에 거기서부터 일이 꼬인 거다. 대공저에서 쥐죽은 듯이 지내길래 정말 반폐인처럼 지내나 했더니, 폐인은 무슨! 오만하던 예전 모습과 별반 다를 거 없이 완벽하지 않은가. 락센은 아랫입술을 쥐어뜯듯 잘근잘근 씹었다.

    “다음 연회에도 초대해 줘. 내 친히 들를 테니.”

    “가, 감사합니다. 각하.”

    “하지만 저것들은 그대 손으로 직접 치워야 할 거야. 아니면 친히 그대까지 내가 치울까?”

    밀러가 턱짓한 방향에는 락센과 함께 린느를 두고 험담을 한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연회를 즐기기는커녕 텅 빈 눈으로 멍청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들의 몰골은 도망칠 구멍을 찾는 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음, 확실히 와인에는 일가견이 있어. 눈치가 없을 거면, 그 주둥이도 와인 설명할 때나 나불거리면 좋을 텐데.”

    밀러는 와인 한 모금을 머금으며,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악마가 웃으면 저런 표정일까? 락센은 멍한 얼굴로 고장 난 기계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해도 고개만 끄덕이는 꼴이 퍽 우스웠다. 락센이 밀러의 기에 눌려 뒷걸음을 쳤다. 그가 도망가는 패잔병처럼 다급히 묵례하려던 찰나였다.

    “3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멍청한 대답에 이골이 난 듯 진득하게 한숨을 뱉었다. 밀러는 사납게 락센에게 예리한 칼을 깊게 찔러넣듯 바라봤다.

    “저것들 치우는 거.”

    밀러는 와인잔을 쥔 손에서 검지만 펼쳐, 린느를 두고 헛소리를 한 귀족들을 가리켰다.

    “연회 주최자인 그대가 책임져야지 않겠나? 주최자란 작자가 그 망언을 듣고만 있었으니, 내가 그대의 귀를 뽑아도 할 말이 없을 테지.”

    “…….”

    “3일.”

    밀러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와인잔을 기울며 락센 경을 응시했다. 악마가 자신의 영혼을 와인잔에 담아 마시는 모습에 락센 경은 공포에 절여져 몸서리를 쳤다. 밀러는 그런 그를 안주 삼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와인 맛은 좋아. 그러니 이제 와인 창고는 그만 닦고 눈치나 키워.”

    이 악마 같은 대공이 저들과 자신까지 싹 묶어다 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락센은 또다시 멍청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눈으로도 사람을 녹일 수 있구나. 린느는 밀러와 락센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새삼스레 그가 자신의 편이라 다행이란 안도감마저 들었다.

    ‘아니지, 내 편이 맞나…? 정말?’

    당장, 대공가의 가신으로 임명됐으니 박탈당하지 않는 한, 밀러와 한 배를 탄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자신의 편인지는 확언할 수가 없었다. 얌전히 청포도를 먹으며, 린느는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기억상실이 아니라는 걸 들키면, 어떻게 될까?

    ‘죽이려나. 아니면, 원작 미리안처럼 말려 죽이려나.’

    무엇이든 간에 소름 끼치는 결말은 분명했다. 린느는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그때, 알렉스가 인파를 뚫고 린느에게 다가왔다.

    “알렉스 님?”

    린느는 알렉스를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어딜 가시냐는 질문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린느는 태연하게 부인들의 질문들을 처리하고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 고마워요, 알렉스 님.”

    “……예?”

    “도와준 김에 아주 알렉스 님이 저기 사이에 앉아 계실래요?”

    알렉스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린느의 제안을 거절했다. 차라리 다른 일을 하고 말지.

    “각하께서 아가씨의 의사를 물어보고 오시라 하셔서요.”

    “무슨 의사요? 설마 지금 대공저로 돌아간다는 건 아니죠?”

    “시간이 늦어서 근처 호텔에서 묵으셔야 합니다. 하여, 미리 제가 예약을 하고 와야 해서요.”

    “그런데요?”

    “방 두 개를 잡을지, 하나를 잡을지 아가씨께서 정하라십니다.”

    세상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린느는 놀란 얼굴로 당연히 두 개로 잡아야죠! 라고 답하려다 멈칫했다. 그가 왜 린느에게 직접 정하라 했는지는 뻔했다. 그녀의 불안 증세 때문이겠지.

    ‘…불 켜 놓고 자면 되지 않을까?’

    타지에다가 메리도 루비도 없다. 게다가, 그 커다란 호텔방에 홀로 있을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차게 식었다. 린느는 장갑에 가려진 손을 빤히 내려다보며 한숨을 뱉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증상이 나빠진 건 처음이다. 빙의되기 전, 클럽 도장 깨러 다닐 때만 해도 어둠에 대한 공포심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때문에, 어렸을 적 트라우마 정도로 여기며 일상생활에 불편함은 티끌도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다행히, 타파할 방법은 있어서 걱정할 건 없지만……. 하필 그게 밀러냐고. 린느는 밀러를 바라보며 알렉스에게 답했다.

    “하나로 예약해 주세요.”

    “네, 알겠……. 네?”

    알렉스는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린느를 바라봤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린느가 밀러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단 걸 알고서, 알렉스는 느릿하게 뒷걸음치며 자리를 비켜 줬다.

    ‘더럽게 잘났네. 누구네 집 아들인지.’

    밀러는 린느가 알고 있는 원작 소설까지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귀족들의 질문 세례에도 그는 턱짓 하나로 처리하고 있었으며, 그 거만한 얼굴로 간간이 와인잔을 기울며 거만한 눈으로 귀족들을 바라봤다. 욕심 많은 인간이 신전에 찾아가, 신의 모양을 뜬 석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듯이 귀족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밀러만을 향했으며, 밀러는 그들의 기도에 응하는 신처럼 퍽 오만하기 그지없어 완벽했다. 린느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멀쩡하네. 나만 빼고.’

    미리안도 곧 있으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대공저에서 탈출할 수 있을 테고, 밀러는 불안 증세를 잊은 것처럼 멀쩡해졌다. 다들 자리를 찾아가는데 자신은 언제 자리를 찾을지, 망할 불안 증세는 어떻게 이겨낼지 퍽 암담했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린느.”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금빛 눈동자가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건방지게 깔아본다거나 오만하게 내리깐 눈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자리에 앉아 시선을 맞춰 줄 것처럼 퍽 다정한 눈매였다.

    “불편한가?”

    “아뇨. 각하께서 빌려주신 코트가 무거워서 그래요.”

    시답잖은 변명에 밀러는 잘만 웃었다. 그 모습에 귀족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공의 입꼬리는 황제만큼이나 무겁다. 워낙 필요할 때만 말하는 사람이라 입이 무거울뿐더러, 웃음도 가볍지 않았다. 그런 그를 미소 짓게 하려고 온갖 지식과 지혜와 영지에서 먹힌다는 유머집까지 총동원했으나, 그 누구도 그를 웃게 만들진 못했다. 연회 주최자인 락센 때문에 대공의 표정이 싸늘해지기만 하고, 미소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단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걸 저 작은 여인이 단번에 이뤘다. 귀족들은 한숨을 삼키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때, 린느가 밀러의 셔츠 소맷귀를 잡았고, 밀러는 눈꺼풀을 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저 이제 피곤해서요. 그…….”

    “그럼 들어가서 쉬어야지.”

    귀족들은 도대체 어디로 들어간다는 뜻인지 서로 눈치를 살피며 호들갑을 떨었다. 부인들은 부채 너머로 한창 좋을 때란 말로 서로의 팔뚝을 장난스레 톡톡 쳤다.

    밀러는 그녀의 손을 제 팔뚝에 손수 감아 줬다. 도대체 왜 이렇게 다정한 건지. 린느는 짓궂은 얼굴로 밀러를 올려다봤다.

    “아니, 알렉스 님께 부탁해도 돼요. 어차피 마차까지만 가면 되니까요.”

    “마차 말고 호텔로.”

    모여든 귀족들의 턱이 호텔이란 단어에 놀라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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