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55화 (54/122)
  • @55화

    공작저에서 열린 연회에서 한 번 겪어 봤기에 린느는 머리를 굴렸다. 공작인 섀르넌과 댄스 한 번에 수많은 영식이 그녀에게 손을 건네지 않았던가? 적어도 그 하루는 말이다.

    ‘그러니, 밀러만 내 곁에 없으면 알아서들 오지 않겠어?’

    린느는 자연스럽게 또, 아주 유연하게 연회장을 크게 돌았다.

    “소백작님!”

    “여기 이리 앉으세요!”

    아까보다도 더 상냥한 얼굴로 부인들이 린느에게 손짓하며 가운데 자리를 금세 비웠다. 그녀들의 배려를 못 본 척하기엔 린느는 너무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린느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게 아닌데…!

    린느가 자신들에게 다가와 만들어 둔 자리에 앉자, 기다렸단 듯이 체리 바구니를 들고 린느를 바라봤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부인은 청포도 그릇을 들고 와 린느 곁에 섰다.

    “체리를 좋아하신다 하셨죠?”

    “좋아하긴 하는데 이렇게까지 들고 서 있으실 건 없어요. 불편하시잖아요.”

    “아뇨? 전혀요!”

    부인들은 호호 웃으며 린느를 위한 불편도 기꺼운 듯 감내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서 린느는 밀러의 위치를 새삼 통감해 감탄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다. 어쩌면 그가 이런 꼴에 염증이 돋아, 연회라면 학을 떼며 피하는 게 아닐까? 물론, 선대 대공 탓이 가장 크겠지만 말이다.

    “저어, 이렇게 반겨 주셔서 너무 감사한데요. 춤 한 번만 추고 와도 될까요?”

    “예에? 대공님과요!? 당연하죠! 왜 안 되겠어요!”

    “아, 아니요. 각하와는 아까 췄으니 다른 분들과도 춰 봐야죠.”

    “…….”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었다. 대공의 여인이 다른 남자와 춤을 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무슨 말씀인진 잘 알겠습니다만, 아마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맞아요….”

    “전쟁의 신 칼네시무트께서 돌아오셔도, 소백작님께 춤을 권하진 않으실 거 같네요.”

    그건 또 무슨 말이래? 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한 부인이 조심스레 연회장 한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세요, 소백작님.”

    린느가 부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끝엔, 밀러가 와인잔을 비우고 있었다.

    “하긴, 각하께서 자리를 비우셔도 아마 소백작님께 춤을 권할 남자는 없을 거예요.”

    린느는 그 상황이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었다. 뭐 둘 사이에 혼담이 오간 것도 아니고, 사귀자는 둥 좋아한다는 둥. 그런 말은 절대 없는데 왜?

    ‘세상에. 저 뻔뻔한 얼굴 좀 봐.’

    린느는 자신을 향해 픽, 웃는 밀러를 째려봤다. 그래서 테라스에서 저를 붙잡지 않은 게 분명하다. 얄밉긴! 당장이라도 그의 말간 얼굴에 혀를 내밀며 놀려 주고 싶었지만, 목숨이 여러 개는 아니기에 참았다.

    “소백작님, 우리끼리 수다 떨어요. 아, 와인 한잔하실래요?”

    “락센 경이 느끼하긴 해도 와인에는 일가견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끼리 하는 말이 있잖아요. 와인 설명하면서 라밀라 님의 마음을 잡으셨단 말이요.”

    “맞아, 맞아. 그랬었죠! 와인 이야기만 나오면 어찌나 말이 많아지시는지.”

    “저번에는 세상에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와인 창고 이야기만 했다며요?”

    “대대로 내려오는 창고라면서 어찌나 자랑해 대던지. 숨은 쉬면서 자랑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부인들은 수다를 떨면서도 말끔한 잔에 능숙하게 와인을 따랐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부인은 도도도 뛰어가, 린느에게 가져다 바칠 안주를 쇼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작 와인 한 잔에 부산스레 움직이는 부인들을 보며, 린느는 괜찮다며 거절을 반복했으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그냥 적당히만 따라 주면 원샷도 가능한걸. 이는 대공저에서도 종종 밀러와 식전주를 마시며 온갖 종류의 술을 다 마셔 본 덕분이다. 그때마다, 모든 술을 목까지 뒤로 꺾어 원샷하냐며 밀러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듣기도 하니, 이깟 와인은 문제도 아니었다. 이건 린느 그녀가 애초에 술을 풍미보다는 씁쓸한 알코올 향으로 마시는 탓이다.

    “우리만 믿고 한 모금만 마셔 봐요. 약간 쓰긴 하지만, 뒤에서 풍기는 그 풍미가 중독성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 이래도 돼요? 괜히 소백작님께 무례를 저지르는 게 아닐지…….”

    그때, 린느가 와인잔을 넙죽 받았다. 그리고는 멀찍이서 자신을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에 짧게 건배했다.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치얼스’를 외치자, 밀러는 어이가 없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코웃음을 쳤다.

    “크흐.”

    오늘도 역시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보란 듯이 밀러에게 보이자, 밀러는 이마를 짚고 도리질했다. 저 술버릇을 어떻게 고칠까! 도리질하는 밀러의 입매는 선명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린느는 그런 밀러를 보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때, 밀러가 사용인을 불러 세웠다.

    “와인.”

    그 짧은 명령에 사용인은 한 방울마저 성의껏 잔을 채웠다. 빈 잔에 와인이 채워지는 틈에도 밀러는 린느를 빤히 응시했다. 금빛 눈동자가 밝은 빛에 번뜩였다. 그는 느긋한 얼굴로 붉은 입술과 어울리는 레드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흰 피부와 대조되어 어딘가 색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겼으니.

    린느는 그런 밀러에게 홀린 것처럼 그를 응시했다.

    ‘올, 지금 해 보자는 거지?’

    린느는 호호 떠드는 부인들에게 말했다.

    “와인 맛이 너무 좋네요.”

    “정말요?! 하, 다행이에요! 한 잔 더 따라드릴까요?”

    “아니에요! 제가 따를게요.”

    “아뇨! 이번엔 제가 따라 드릴게요!”

    와인병을 들고 있던 여인에게서 다른 부인이 와인병을 뺏어 들었다. 린느에게 와인을 따르는 걸 두고 부인들은 서로 소리 없이 으르렁댔다. 그 탓에 한참이 지나서야, 빈 잔에 와인이 따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밀러는 나직이 읊조렸다.

    ‘오해를 한 거 같군.’

    그것도 제대로 오해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와인을 원샷하지 말고 음미하며 천천히 마시라는 뜻이었건만. 저 패기만만한 여인은 제게 술로 싸움을 걸어온다. 그 모습이 귀엽고도 걱정스러워, 밀러는 린느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가 천진한 구석이 있긴 해도, 연회장에서 과음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회란 사람을 무르게 만들고, 흐트러지게 만들지 않는가.

    분위기 좋은 음악과 웅성거리는 인파. 남녀 사이에 오가는 와인과 샴페인에 적당히 오른 취기가 잘 만진 반죽처럼 닫혀 있던 마음도 부드럽게 만든다. 거기에 서로 추파를 던지며 테라스로 사라지는 남녀들까지. 테라스면 그나마 다행이지, 아주 연회장 밖으로 나가서 몇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젊은 귀족들도 허다했다. 그만큼이나 연회장 분위기는 인간의 쾌락점을 자극하여, 평소와 달리 충동적인 행동을 하도록 종용한다.

    어린 밀러는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싫었다. 선대 대공이 어머니의 눈물로 연회를 베풀고, 그 사이에서 좋다고 떠드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혐오스러울 만큼 싫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밀러는 연회를 싫어할 몫마저 뺏겼다. 싫은 마음을 뺏기는 대신에, 두려움을 얻게 된 탓이다. 그게 다 불안증 때문이었다. 밀러는 제 손에 차분하게 들린 술잔을 바라봤다.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고, 숨 쉬는 것도 불편하지 않았다. 린느가 제게 팔짱을 낄 땐 조금 심장이 쿵쾅거리긴 했으나, 딱 그것뿐이었다.

    ‘이상할 만큼 멀쩡하군.’

    그간 그가 앓아 왔던 불안증이 없던 일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많은 귀족이 그에게 다가오고 말을 붙여도 멀쩡하다. 밀러는 호기심을 안고서 린느를 바라봤다. 정말, 그의 본능이 알려 주는 대로 린느 덕분일까? 린느가 대공저에서 지낸 이후로 증상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턴 밀러가 답할 때였다. 밀러는 몸을 기울여, 컴컴하게 물든 밖을 바라봤다.

    ‘하룻밤 묵고 가야겠어.’

    무리해서 지금 출발해 봐야 좋을 게 한 가지도 없다. 그렇다고 락센 가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무엇보다도 연회장에 홀로 참석한 게 아니니, 더욱 신중해야 한다. 밀러는 멀찍이서 바쁘게 움직이는 알렉스에게 턱짓했다. 그걸 또 어떻게 알아보고, 알렉스가 쏜살같이 뛰어와 밀러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댔다.

    “호텔 예약해 두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몇 군데 알아놨습니다. 방은 두 개로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물어볼 것도 없이 당연히 방 두 개가 맞지만, 린느가 홀로 방에서 밤을 지낼 수 있을까? 뇌우에도 그렇게 두려워하는데, 타지에서 홀로 호텔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게 퍽 마음에 걸려, 밀러는 잠시 와인잔을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알렉스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터무니없는 질문이라는 핀잔을 들을 각오도 했건만. 밀러는 미간을 좁혀 가며 고민에 빠졌다. 밀러는 와인잔을 흔들던 손을 뚝 멈췄다.

    “그대가 직접 물어봐.”

    “예? 아, 알겠습니다. 제가 아가씨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각하.”

    “잠깐.”

    린느에게로 걸음을 옮기려던 알렉스가 다시 밀러에게 바짝 붙어 명령만 기다렸다. 방금까지도 다소 온화하게 말하던 그가, 호전적인 눈빛으로 딱 잘라 명령했다.

    “루텡라스도 불러와.”

    “이리로 부르면 되겠습니까?”

    밀러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하나 배울 점 하나 없던 무뢰한 선대 대공에게도 딱 한 가지 제대로 배워 둘 게 있었다. 대공이란 잃을 게 많은 자리다. 살쾡이들이 이를 악용해 발톱을 세운다면, 가차 없이 그들의 발톱을 미리 뽑아 두라는 조언이었다. 그것도 안 된다면 물어뜯을 이도 뽑으라는 조언도 함께였다. 열등감에 찌든 선대 대공다운 조언이었으나, 밀러는 그 조언만큼은 쓸 만하다 생각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