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연회는 재미있는지, 어디서 뭐 하다 이제야 연회장에 얼굴을 비쳤는지, 누구랑 놀았는지, 다른 남자와 춤을 추지 않은 건 왜인지, 그리고 춤을 추지 않아서 잘했다 등등. 제 팔뚝을 유능한 길잡이처럼 써먹는 린느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그는 신중하게 수많은 질문 중에서 고르고 또 골랐다. 둘 사이에 정적이 돌자, 밀러가 먼저 입을 뗐다.
“바람이 차다.”
제국을 가득 채울 만큼 쌓여 있던 질문들을 차치하고, 그녀의 어깨에 코트를 둘러 줬다. 린느는 드레스 색과 맞지 않다며 귀여운 투정을 했으나, 그에게 코트를 다시 돌려주진 않았다.
“저어, 말썽을 조금 피운 거 같은데요. 미리 용서를 빌면 정상 참작을 해 줄 의향은 있으신가요?”
“일단 들어 보고.”
린느는 밀러의 눈치를 살피며, 주변의 눈도 살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눈치를 보는 건지, 밀러는 그런 그녀를 차분히도 기다려 줬다. 문제는, 그의 차분한 표정에 린느는 지레 겁을 먹었다는 점이고. 더불어 그의 옷깃을 서둘러 당겼다는 점이다. 그는 팔과 다리가 그녀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처럼 잘도 움직여줬다.
“라밀라 님을 백작저로 초대한다고 큰소리를 쳐 놨어요. 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다구요.”
어딜 쏘다녔나 했더니, 라밀라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군. 밀러는 머리칼을 무심하게 넘기며 말했다.
“그대의 저택으로 손님을 초대하는 게 뭐가 어떻다고 정상 참작까지 거론했는진 모르겠으나.”
밀러는 텅 비어 있는 테라스 문을 열어젖히며, 린느에게 들어가라며 손바닥을 보였다.
“그대가 백작저에서 지내는 시간보단, 대공저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거로 아는데.”
굳이, 백작저로 초대하지 않고 대공저로 초대하면 될 일이건만. 밀러는 린느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보였다. 달빛과 무척이나 어울리는 미소이긴 하나, 린느는 그의 차가운 미소에 양손을 가슴께에 얹었다.
‘화났나? 미치겠네. 불안 증세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고 말해야 하나? 그럼 더 오해하려나?’
애초에 선대 대공비와 연관이 있는 라밀라와 친하게 지내는 거 자체가 밀러는 꺼려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상 참작까지 운운한 거였는데……! 린느는 그의 손바닥이 가리키는 테라스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러자, 밀러 역시 비좁은 테라스로 들어섰다. 두 사람을 향하는 시선도 테라스에 내리꽂혔으나, 밀러는 테라스 문을 걸어 잠그며 그들의 시선을 잘라냈다.
달칵.
“무, 문을 왜 잠가요…?”
“지난번 그대처럼, 테라스에 들어와 엿듣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지.”
“네? 아니죠. 그때는 제가 이용 중인 테라스로 각하께서 오신 거죠.”
밀러는 그녀의 똑 부러진 대답에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야, 린느 뷔 세르트지. 밀러는 곁에 있던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추우면 말해. 연회고 뭐고 대공저로 돌아갈 테니까.”
그녀의 반응에 밀러의 미소가 굳었다. 연회가 한창인 이 분위기에 대공저로 돌아간다는 말에도 린느가 별 반응이 없는 탓이다.
“재미가 없나?”
“제가 생각한 연회랑은 많이 달라서요.”
“연회 주최자의 성향에 따라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끼리끼리에 유유상종. 락센이 가진 권력이 무서워 참석한 하급 귀족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서로 면을 세워 주기 위해 참석한 귀족들이다.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가십과 명예욕에 치우쳐 사는 귀족이 대부분이니, 대공의 참석에 당황할 수밖에.
밀러는 검지로 귀를 가리켜 유려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대가 칭찬했던 악단의 노래가 훨씬 나아.”
“아, 그 공작님네 악단이요?”
“공작가의 악단은 아니었어.”
“정말요? 그렇게 실력이 있는데, 전속 악단이 아니라고요?”
“어.”
밀러는 널찍하게 남은 소파를 향해 손짓해,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실력이 그렇게 출중한데 전속 악단이 아니라니 아쉽네요.”
그 실력이면 황궁 연회도 근사하게 장식할 수 있을 텐데. 린느는 아쉽다며 쩝, 혀를 다셨다.
“더 좋은 조건으로 더 좋은 가문과 전속을 맺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공작가보다 더 나은 가문이 어디 있어요. 대공가 뿐인데, 대공가에선…….”
연회가 열릴 리가 없잖아? 아무리 밀러의 병세가 나아졌다 해도 대공가에서 연회가 열릴 리는 만무했다. 린느가 눈치껏 말을 아끼자, 밀러는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왜 말을 하다가 마냐며 물어보려던 찰나에, 린느가 먼저 입을 뗐다.
“아무튼요. 허락도 없이 라밀라 님을 초대해서 죄송해요.”
솔직히 의외이긴 했다. 린느가 워낙 붙임성 좋은 성격이니, 라밀라와 친해질 거라 밀러 역시 예상은 했지만. 다른 부인들도 아니고 딱, 라밀라와 단시간에 친해진 게 의외긴 했다. 그렇다면 세 가지의 이유가 있을 테지.
‘라밀라가 린느를 이용해 락센에게서 도망치려는 걸까.’
라밀라가 그런 계획을 세우기엔 변수가 너무 많아 위험하다. 오히려 락센의 심기를 거슬러, 더 이용당할지도 모르니까. 라밀라에겐 막냇동생이 하나 있는데, 락센이 그 동생을 두고 협박용으로 써먹는단 정보가 있었다. 밀러는 그런 얄팍한 수에 이용당하는 라밀라가 안쓰럽기도 했으나, 선대 대공비가 흘린 눈물에 라밀라 역시 가담했으니 그 정도 아픔은 짊어지고 가야 한다 여겼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이라도 라밀라 역시 평생 속죄해야 한단 생각 말이다.
밀러 그가 가진 명예와 돈을 이용해도 고칠 수 없는, 이 천벌과 같은 불안 증세를 평생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말이다.
밀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다음 전제인 락센으로 넘어가는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별 같잖은 조무래기가 다 들러붙는군.’
되지도 않는 조무래기 따위가 제 곁에 뜯어 먹을 게 있는지 윙윙대는 꼴이 우습다. 하지만 마냥 우스울 일도 아닌 게, 만약 대공저의 사용인들을 미리 단속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미리 손써 둔 게 없었더라면 대공가의 비밀이 신문사 헤드라인을 장식했을지도 모른다. 갈증 난 여행객처럼 사막을 파헤쳐도, 락센은 저가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평생 파 봐. 나오나.’
라밀라가 제 입으로 선대 대공비의 죽음에 대해 말을 꺼낸다면, 밀러가 준비해 둔 칼은 가차 없이 두 사람을 향할 테니. 그러니, 락센 경의 같잖은 짓거리가 우스울밖에.
밀러의 시선은 자연스레 린느를 향했다. 어깨에 잘 둘린 코트를 포근하다며 꼭 껴안는 모습이 다람쥐 같기도 하고……. 하는 행동은 마냥 발랄하지만, 또 속은 깊은 편이고. 가끔은 그녀가 뱉은 말이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 밀러마저 흠칫 놀랄 때도 있으니, 마냥 천진한 사람이라 치부할 수도 없다.
‘남은 건 린느.’
그녀가 대공가의 비밀을 모조리 알고서, 라밀라에게 접근했다는 추측. 만약 그 추측이 맞다 해도, 린느의 의도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만약 그녀의 기억상실이 모조리 거짓이고 대공가의 비밀마저 이용하려 한다면 많이 아플 것이다. 재기하지 못할 만큼.
밀러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앓는 소리가 나올 만큼 아팠으나, 겉보기에 멀쩡하게도 린느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정정하는 게 어때, 린느.”
“무얼요?”
“라밀라를 대공저로 초대하는 걸로.”
린느는 손장난 치던 손을 뚝 멈췄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정말 기억을 모조리 잃었더라면, 라밀라를 굳이 백작저로 초대할 리가 없다. 왜냐면, 라밀라는 그저 락센의 부인일 뿐이지 선대 대공의 정부가 아니니까. 그러므로 라밀라를 대공저로 초대하는 데에 꺼릴 게 없어야 만이 정상이다.
밀러는 그 짧은 시간이 길게만 느껴져, 린느에게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냥, 알겠다고 해. 대공저로 초대해도 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평소처럼 천진하게 대답해.
“대공저는 제 집이 아닌데, 어떻게 손님을 막 초대해요.”
“집처럼 지내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저는 대공님의 가신이지, 대공가의 식구가 아니잖아요? 누가 직장으로 손님을 불러요?”
대공저를 직장 취급하는 게 못내 아쉬웠지만, 그녀의 대답에 밀러는 환하게 입매를 올려 웃었다. 그 넓은 대공저 반쪽 떼어다 써도 아쉬울 게 없건만. 밀러는 린느에게 쓸데없이 공과 사가 꽤 선명한 편이라며 웃으며 타박했다.
“물론, 허락해 주신다면 당장 라밀라 님께 알려 드리고 올게요.”
“그래 주면 고맙고.”
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가 고맙단 건지 모르겠다며 헤헤 웃었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죄책감 어린 눈으로 입꼬리만을 올려 웃으며 안심시켰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의심이란 해충이 저를 갉아먹는 기분에 밀러는 미간을 잘게 좁혔다.
“락센 경의 멍청한 표정도 봤고, 그대와 춤도 췄으니 됐어. 그대는?”
린느는 밀러의 말에 묘하게 심장이 콩닥거렸다. 눈치 빠른 대공이 저를 의심해서 심장이 콩닥거린 것도 있으나, 그대와 춤을 췄단 대목에서 눈치 없이 심장이 쿵 하고 울린 탓이다.
오만하고 성격 더러운 남자가 제게만 웃고, 춤을 신청하고, 연회장 파트너로 함께해 달란 말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저렇게 잘생긴 얼굴과 잘난 피지컬로!
‘반칙 아니야? 차라리 예전처럼 틱틱대고 잔소리하는 게 나은데.’
이러다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스며들까 짜증이 올랐다. 스며들 거면, 그쪽이 스며들어야지, 왜 내가? 내가 왜? 린느는 괜스레 자존심이 상해 흥,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다른 귀족들이랑 춤출래요. 이 연회에 와서 춤이라곤 각하랑만 췄잖아요?”
린느는 꼭 잠긴 테라스 문을 열어젖히며, 벙찐 밀러를 보며 조소를 뱉었다.
“그럼 전 이만.”
린느는 바보처럼 굳은 밀러 코앞에서 묵례하고, 바람처럼 연회장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