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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53화 (52/122)
  • @53화

    선대 대공비의 불안 증세를 너무나도 잘 아는 라밀라가 아닌가. 더 나아가, 그녀는 선대 대공비의 불안 증세의 원인이 제게도 있다며 죄책감을 알아서 안고 사는 사람인데……. 그녀가 정말 그저 밀러의 안위가 궁금해서 한 질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밀러의 불안증을 알고 물어보는 걸까? 어렵네.’

    라밀라 그녀도 대공저에 팔려 오다시피 했으면서, 그녀는 선대 대공비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 스스로 시들어 갔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선대 대공비와의 관계를 말하지도 않았으며. 철저히 이기적이고 명예와 돈만 생각하는 정부를 연기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밀러의 안부를 묻는다는 뜻은 정말 ‘잘’ 지내는지에 대해 묻는 게 아닐 터. 린느는 자세를 고쳐 앉아 말했다.

    “아주 잘 지내셔요. 가끔 안색이 좋지 않으시기도 하지만요.”

    “…안색이 어떻게요?”

    “가끔 희게 질린달까요? 원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서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린느는 살짝 장난기를 얹어 가볍게 답했다. 잘못했다간, 괜히 밀러의 불안 증세를 알아서 까발리는 꼴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라밀라는 낙담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지독한 죄책감이 만연한 표정에 린느는 말을 붙이지 않고 기다렸다.

    “뒷마당 울타리 근처에 푸른색 잎이 나는 이상한 꽃이 있을 거예요. 아낙시스라는 꽃인데 차로 우려먹으면 맛이 좋아요. 선대 대공비께서도 즐기시던 꽃차이니, 안나가 알 거예요.”

    그녀가 굳이 안나를 언급한 이유는 뻔했다. 아낙시스라는 꽃이 독초라는 식의 일차원적 오해는 하지 말란 뜻이었다.

    ‘긴장 완화에 좋은 꽃인가 보네. 안나한테 물어봐야겠어.’

    린느는 이래서 계략 여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한숨을 삼켰다. 망할, 연회를 즐기기는 무슨. 왠지 사건에 말려드는 거 같아 린느는 불편했다.

    “소백작님, 감사해요. 덕분에 편히 쉬었어요. 이제 나가 볼까요?”

    라밀라는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사람답게 웃음을 지었다. 아까만 해도 희게 질린 몰골이 혼이 나간 사람으로 인형을 만든 것처럼 창백했는데. 웃음이 예쁜 사람이었다.

    덜컥.

    문을 열고 커다란 복도로 나서자마자, 눈동자에 화를 담은 락센과 딱 부딪혔다. 그가 무섭게 다가와 라밀라에게 손을 뻗었고, 린느가 나서기도 전에 라밀라는 얌전히 그에게 팔짱을 꼈다.

    마치, 제 몸을 매에게 미끼로 내어 주는 어미 새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처량했다.

    “라밀라, 어딨는지 한참을 찾았소! 소백작님과 함께 있을 줄이야. 소백작님, 연회는 재미있게 즐기고 계십니까?”

    여차하면 세르트 가문의 수치인 장녀를 언급하며 소백작의 속을 뒤엎으면 된다. 웃으면서 먹이는 거야 늘 하던 일이니, 어려울 것도 없지. 게다가 이렇게 순해 빠진 여인이라면 더더욱 해 볼 것도 없…….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는데 락센 경이 다 망쳤네요. 라밀라 님하고 2층도 돌아다니려 했는데, 눈치가 저렇게 없으셔서 어쩐담.”

    원작 린느 뺨치도록 싹수가 노랬다. 두어 번 또각또각 소리가 날 만큼 발을 굴러 주고, 미간을 팍 찌푸리며 락센을 째려봤다.

    그러자 락센이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당황한 얼굴로 린느를 내려다봤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올라왔지만, 대놓고 린느에게 실소를 뱉었다간 뒷감당도 하지 못할 게 뻔했다. 저 싹수 노란 세르트 소백작보다 더 싹수가 노란 페리하츠 대공이 있지 않은가. 락센 경은 약 5년 치 스트레스를 단번에 받은 사람처럼 입매를 부들부들 떨었다. 쪼끄만 게 입만 뚫려서는!

    “아, 아하하……. 그러셨군요.”

    “좀 친해지려면 뺏어 가고. 친해지려 하면 와서 방해하고. 하!”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락센 경을 향해 대놓고 무안을 줬다. 그러자, 지나가던 귀족들이 힐끔대며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드레스도 어디서 맞췄는지 물어보고 싶고, 액세서리는 어디서 구매했는지 좀 물어보려 했더니. 됐어요. 대공님에게나 가야지, 원.”

    린느는 몸을 휙 돌려 밀러가 어디 있는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락센이 질겁하며 그녀를 불렀다.

    “서, 성격도 급하셔라! 그, 일단은 제가 좋은 시간을 방해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사과를 받아 주십시오.”

    린느는 팔짱을 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자, 부채로 입을 가린 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러게 락센 부인 좀 놔주세요. 우리도 락센 부인과 이야기도 좀 하고 싶은데, 락센 경께서 어찌나 부인만 찾는지!”

    “젖병 찾는 아이보다도 더하십니다.”

    “아이는 귀엽고 예쁘기라도 하지요.”

    귀족가의 부인들을 상대로 버럭 화를 냈다간 좀팽이 소리를 들을 테고, 웃어넘기기엔 화가 치미는 부인 표 농담들이 락센에게 마구 꽂혔다. 부인들은 한소리 하면서도 린느의 표정을 살피며, 적당히 린느를 거들었으니. 린느는 밀러의 말을 따른 것뿐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락센은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총공격에 라밀라의 손을 천천히 놔줬다.

    “손님의 심기를 건들다니, 이게 다 제가 눈치 없이 끼어든 탓입니다. 그러니 그만 노여움 푸시고…….”

    “알겠어요. 저도 이만 대공님께 가 봐야겠네요.”

    대공이란 말에 마법이라도 걸렸는지 락센의 아래턱이 딱딱 소리를 내며 파르르 떨렸다.

    ‘미쳐 돌아 버리겠군.’

    사교계에서 샴페인 좀 마셔 본 락센이 린느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당했다. 그 사실이 창피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말 대공이라도 데려왔다가는 연회 시즌에서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할 게 훤하지 않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린느가 대공을 불러오는 건 막아야만 한다.

    그때, 린느가 락센의 꼴을 보며 조소를 뱉었다. 세르트 경과 똑 닮은 청록색 눈동자에 비열하기 그지없는 저 입꼬리까지. 그때야 락센의 눈꺼풀이 크게 뜨였다.

    ‘마, 망할. 당연히 세르트 경의 차녀인 줄 알았더니, 장녀였어? 그 미친 스토커?’

    세르트 가문에는 영애 두 명에 영식 한 명. 세르트 경이 가장 편애하고 예뻐하는 영애는 첫째 영애이며, 이유는 어릴 적 크게 앓은 탓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그 영애는 고작 자작가의 영애임에도 백작가의 영애처럼 호사를 누리며 자랐고. 그 탓에, 안하무인에 망나니라고 하던데…….

    ‘미쳐 버렸군. 미쳤어.’

    그런 그녀를 가신으로 들인 대공도 미쳤고, 제 앞에 놓인 정말 ‘미친’ 레이디도 미쳤고! 무엇보다도 가장 미친 건 락센 자신임에 학을 뗐다. 어쩌자고 건드렸을까! 후회가 찐득한 액체처럼 바뀌어 락센 경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린느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라밀라의 손을 잡았다.

    “라밀라 님, 눈치 없는 락센 경 때문에 힘드시겠어요. 이러지 말고 다음에 제 백작저에서 커피나 한잔해요. 초대장 보낼 테니, 꼭 오셔야 해요. 아셨죠?”

    린느는 일부러 대공저가 아닌 백작저를 언급했다. 라밀라가 선대 대공의 정부였단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 테니, 그대들도 언급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네? 네?”

    “영광입니다. 꼭, 꼭 찾아뵐게요.”

    린느는 라밀라의 대답에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리고 다음은.

    “락센 경, 조만간 부인 앞으로 초대장을 보낼 테니, 미리 알아 두세요. 이번에도 또 방해하시면.”

    린느는 멀찍이서 다가오는 밀러를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락센 경을 째려봤다.

    “대공님께, 모든 걸 말씀드릴게요.”

    이른다고 말하려다가, 적당히 격을 차려 말씀드린다고 바꿔 말했다. 락센은 린느의 말에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그럼요. 제, 제가 방해할 이유가 없죠. 그럼요!”

    “무슨 방해.”

    동굴 끝자락에서부터 울린 맹수의 포효처럼, 밀러의 나직한 목소리가 락센의 전신을 훑었다. 잘 구운 생선 뼈를 바르듯이, 밀러의 시선이 락센을 다시 한번 훑었다. 락센은 고장 난 기계처럼 말을 더듬을 뿐,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밀러의 시선이 라밀라에게 향했다. 멍청한 놈 대신에 말을 해 보란 듯 건방진 표정으로 짧게 턱짓했다. 그때, 린느가 밀러의 팔뚝을 살짝 잡아당기며 유연하게 그의 시선을 가져왔다.

    “추, 춤이요. 춤이나 춰요, 우리.”

    이 상황에서 정말 밀러가 끼어들 줄은 린느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밀러 성격에 굳이 이 복잡한 상황에 끼지 않고 방관할 거라 여긴 탓이다. 괜히 더러운 성격에 라밀라까지 휩쓸릴까 싶어, 린느는 빠르게 밀러 손을 끌어 연회장 입구로 향했고. 밀러는 그녀의 손에 기꺼이 끌려 나갔다.

    “……봤어요?”

    “네, 봤어요.”

    황실의 또 다른 기둥이라 불리는 남자가, 맥없이 여인의 손에 끌려 나가다니. 말도 안 되는 풍경에 부인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으며 드디어 우리 대공님께서 혼인을 하려나 보다며 설레발을 쳤다. 그들 사이로 라밀라는 흐뭇하게 입매를 올렸고, 락센은 그런 라밀라를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망할 것이 살랑살랑 꼬리나 흔들라 했더니…!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는.’

    대공저의 비밀을 캐려고 라밀라와 혼인했더니, 비밀은 고사하고 몇 년간 알아낸 게 하나도 없다. 대공저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라밀라는 입이 사라진 사람처럼 무엇 하나 흘리는 법 없이 비밀을 유지하니, 캐려고 해도 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건 다름 아닌, 폭력이었다. 선대 대공비가 결국 말라 죽은 것처럼, 라밀라를 더 잔혹하게 말려 죽이려 했지만. 이 잡초 같은 라밀라는 짓밟을수록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무얼 숨기길래!

    “라밀라.”

    그의 음성에 라밀라가 미소를 지우고 락센을 바라봤다. 인형처럼 텅 빈 눈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락센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따라와.”

    또 시작이다. 다 잡은 연어로 장난치려는 곰처럼, 락센의 눈동자는 선뜩했다. 라밀라는 반항도 없이 락센 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어깨가 스칠 만큼 가까워지자, 라밀라는 요염하게 웃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분간이라도 고정하세요. 소백작님께서 제게 든 멍이라도 보신다면 얼마나 놀라시겠어요?”

    라밀라는 린느가 열어 준 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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