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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52화 (51/122)

@52화

‘헐? 잠깐….’

린느는 잠시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더니, 흠칫 놀랐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은 선대 대공의 정부밖에 없었으니 놀랄 수밖에.

“연회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밀라 락센입니다.”

“라밀라…….”

그녀가 라밀라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리자, 부인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에 낄 틈도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영광입니다, 세르트 소백작님.”

라밀라의 입꼬리에 맺힌 건, 연회장과 무척이나 어울리는 화려한 미소였지만 씁쓸한 기운은 지우지 못했다.

‘선대 대공이 죽은 이후로 라밀라도 소설에 언급조차 안 돼서 몰랐는데, 결혼했구나.’

그것도 정식 부인으로 결혼을 했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면 저런 표정은 짓진 않겠지. 린느는 이 넓은 연회장을 쭉 둘러보며, 한숨을 삼켰다. 왠지, 라밀라에게서 원작 소설의 미리안과 비슷한 안색이 보여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나저나 밀러는 다 알면서 이 연회에 왜 참석했을까?’

연회를 좋아해서 무턱대고 참석할 남자도 아니고, 라밀라와는 불편한 사이일 텐데 굳이 왜? 린느는 그 작은 머리를 이리저리 갸우뚱댔다. 그때마다 라밀라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린느의 표정을 살폈다.

“소백작님, 어디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혹, 자리가 불편하시다면 방을 안내해 드릴 수도 있으니 편히 말씀해 주세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배려란 말에 라밀라의 눈꺼풀이 크게 뜨이더니, 다시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때, 멀찍이서 하녀 한 명이 총총 뛰어와 라밀라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하녀가 전한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좋은 소식은 아닌 듯 라밀라의 표정이 달게 굳었다. 린느는 재빨리 몸을 기울여, 하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락센 경?’

라밀라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하는 락센 경의 눈빛은 아까 린느가 마주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만큼 사나웠다. 애써 미소로 자신의 폭력성을 감추려 들었지만, 눈칫밥에 이골이 난 린느는 락센 경의 눈빛에서 많은 걸 읽어 냈다. 평소 눈치가 없는 편이긴 해도, 어릴 적부터 이집 저집 온갖 친척집을 전전긍긍하며 지냈기에, 혐오감 어린 눈빛은 읽기 싫어도 자연히 읽힌 탓이다.

‘눈을 참 안 예쁘게 뜨네.’

저렇게 뜨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어. 린느는 그가 자신을 노려본 것도 아닌데도 퍽 기분이 상했다. 트라우마로 남아 있던 그 아픔이 다시 제게 덤비는 기분 탓이리라.

그사이, 라밀라는 숙인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때마다, 그녀의 몸 곳곳을 꽉 동여맨 드레스가 그녀의 숨통을 끊을 듯이 꽉 조였다. 몸살 난 사람처럼 라밀라의 몸체가 잘게 떨리고 휘청였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눈이었다.

탁.

손등에 뼈가 도드라진 라밀라의 손을 잡은 건, 린느였다.

“제가 연회를 즐기고 싶어도 지독한 길치라서 부인의 안내가 필요해서요.”

그때, 부인들의 시선이 린느에게 머물렀고. 그 누구도 나서서 라밀라를 잡은 린느의 손을 뜯지 못했다.

“어려울까요?”

“아, 아니요. 어려울 거 없습니다.”

린느는 방긋 웃으며, 자신을 빙 둘러 있던 부인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린느의 당당한 걸음이 향한 곳은, 락센 경이었다.

‘망할.’

제게 다가오는 린느와 라밀라를 보며, 락센은 입을 꾹 다물고 어색하게 웃음만 지었다. 설마, 저 여우 같은 게 그새 대공비가 될 여인에게 자신이 한 짓을 일러다 바친 건 아닐까 등골이 서늘했다. 도둑이 제 발을 저리듯이 그는 자리에서 굳었다. 입을 벌려 웃었다가는 쿵쾅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두려워, 그는 병적으로 입을 꾹 다물고 버텼다.

“어머, 락센 경이라 하셨죠?”

“예, 소백작님!”

“제가 지독한 길치라 라밀라 님의 손이 아니면 길을 잃을 것만 같아서요. 그렇다고 바쁘신 대공님을 잡아 두기도 뭐하구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려나요?”

락센은 같잖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려던 찰나에 린느가 다시 말허리를 잘랐다.

“그럼 이만.”

린느는 라밀라의 팔짱을 끌어 잡아, 그를 스쳐 지나쳤다. 어쩌면 대공가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람 말 자르는 데에 도가 텄을까! 락센은 희게 질린 주먹을 뒤로해 뒷짐을 졌다. 그때, 그 모습을 등대처럼 바라보던 밀러가 픽, 웃었다.

‘그럼 그렇지.’

그 꼿꼿한 기개가 어디로 갈까. 버릇없이 굴라는 말에 린느는 선택적으로 적당히 버릇없이 굴기 시작했다.

‘똑똑해.’

기특한 마음에 밀러는 입꼬리를 움찔했다. 그와 대화를 한창 나누던 귀족들은 말없이 그의 시선을 따라갔고, 그 시선 끝에 린느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 * *

또각.

두 여인의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락센을 지나친 이후로 린느와 라밀라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말을 아꼈다. 그렇다고 어색한 분위기도 아니었으며, 그저 서로 조심스러운 것뿐이었다.

‘락센인지 락스인지 저 남자가 라밀라를 괴롭히는 게 틀림없어.’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라밀라가 안쓰럽단 생각으로 같잖게 그녀를 동정할 생각은 없다.

‘라밀라가 아니었으면 선대 대공비는 정말 지옥이었을 텐데……. 선대 대공비도 라밀라를 미워하지 않길 바라겠지.’

지하 단칸방 혹은 다락방에서 지내던 선대 대공비를 찾아간 건 밀러뿐만이 아니었다. 라밀라는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하녀 복장을 비밀 장소에 숨겨 놓고, 선대 대공이 먼저 잠드는 날에는 하녀 복장으로 선대 대공비를 찾아갔다.

라밀라에게 선대 대공비를 구출할 재간은 없었으나, 라밀라는 진심으로 대공비와 대화 상대가 되어 줬다. 오지랖 넓고 밥 먹듯이 실수하는 어수룩한 하녀로 변장해, 선대 대공비의 말벗을 자처했다. 어쩌면, 그게 라밀라의 속죄 방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라밀라는 선대 대공비가 죽은 날, 진심으로 짐승처럼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밀러의 것이라며 많은 독자는 그리 추측했으나, 작가의 말에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라밀라의 울음이었다고.

비록 고구마 전개에 19금 피폐물에 새드 엔딩까지 찍은 원작이긴 해도, 작가의 말이 전해 준 라밀라의 울음이란 말이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정부라는 이유로 무조건 못되지만은 않으며, 그렇다 해서 마냥 착하지도 않은 인물이란 평이 대개였다. 린느는 라밀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게 이럴 권리가 있을까 싶지만. 락센이 꼴 보기 싫어서라도 도와주고 싶네.’

린느는 그녀의 팔뚝을 다정하게 끌었다.

“저어, 라밀라 님.”

라밀라는 놀란 눈으로 린느를 바라봤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여유 없는 시선에 식은땀까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말씀하세요, 소백작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혹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라밀라 님 지금 식은땀 나요.”

라밀라는 저를 지지하는 마지막 두 개 남은 기둥 중에 하나가 잘려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짓씹으며 잘게 흐느꼈다. 온몸이 부서진다 해도 이보단 덜 고통스러울 테지. 드레스에 가려진 상처들이 욱신욱신 열이 올라, 가느다란 다리가 휘청였다.

“저기 저 방은 빈방인가요?”

“네.”

린느는 주변에 사람이 없단 걸 자각하고, 그녀를 끌고 방으로 들어섰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라밀라가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린느는 빠르게 그녀의 숨통을 조르던 드레스를 풀어, 숨쉬기 편하도록 도와줬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며, 린느의 손길을 거부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심지어, 린느의 손길이 달가울 만큼 숨이 쉬어지고, 온몸이 편해졌다. 라밀라는 그제야 울컥 치솟는 눈물을 꾹 참으며, 숨을 내쉬었다.

“제 걱정은 마세요.”

“……감사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라밀라는 린느에게 고맙단 말을 반복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뿐인 양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린느는 문을 잠그고, 침대에 걸터앉아 라밀라가 먼저 입을 떼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게 질려 있던 라밀라의 얼굴빛이 점차 생기를 찾아갔다. 흰 피부 위로 생긴 상처들은 그대로였지만, 라밀라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편안해 보였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정적을, 라밀라가 깼다.

“…린느 님이시죠?”

린느는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흠칫 놀라 몸을 웅크리고 묻자, 라밀라는 귀엽단 듯 피식 웃었다. 아까와 달리 편안한 미소였다.

“세르트 가문의 소백작님이시니 모를 리가요. 세르트 경께서 소백작님의 자랑을 얼마나 하셨는지, 저도 모르게 소백작님과 안면이라도 튼 거 같았어요. 그런데 이리 직접 뵈니, 세르트 경께서 하신 말씀들이 모조리 사실이구나 했답니다.”

“아, 아하하.”

자식 자랑에 진심이시구나. 린느는 어쩐지 뭉클한 마음에 소리 없이 웃었다. 라밀라는 그 모습이 부럽단 듯 따라 웃었다.

“안나는 잘 지내죠? 넬은 알아서도 잘 지낼 테고…….”

라밀라는 그리움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마치 고향 사람들의 안부를 묻듯이 조심스러웠다.

“다들 잘 지내셔요. 아마, 라밀라 님께서 이렇게 걱정해 주시는 걸 안다면 기뻐할 거에요.”

“……글쎄요.”

라밀라는 소리 없이 웃더니, 어색하게 굳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말을 바꿨다. 셰프의 쿠키 이야기와 뒷마당에 해마다 열리는 갖가지 과일들과 채소 이야기도 나눴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던 라밀라가 시계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이런, 제가 눈치 없이 너무 오랫동안 소백작님을 붙잡고 있었네요.”

“아니에요. 저도 즐거웠는걸요?”

린느가 다정스레 웃자, 그녀의 미소에 불안감이 사라진 듯이 라밀라도 따라 웃었다. 드레스 끈을 다시 매만지며, 라밀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각하께서도 잘 지내시죠?”

잘 지낸다는 대답을 하려던 찰나에, 린느가 대답을 아꼈다. 이토록 대공저를 꿰뚫고 있는 라밀라가 밀러의 불안 증세를 모르는지 아는지 알 수 없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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