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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51화 (50/122)

@51화

락센 경의 말처럼 죽은 노공들이 그를 힐난하러 유령이 되어 찾아온 것처럼. 뱀처럼 굴던 이들의 얼굴이 메두사의 얼굴을 마주한 조무래기 병사처럼 멍청한 표정도 서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표정을 살필 여력조차 없었다.

“애, 애커먼 경?”

알렉스는 싸늘하게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마치, 카메라로 찍듯이. 알렉스의 시선은 밀러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그 주인에 그 보좌관이었다. 이에, 귀족들은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샴페인 잔을 탁 내려놨다.

“하, 하하하! 이거 참 난감하군. 어째 상황이 오해하기 딱 좋은 모양새이지만…….”

“오해라니요.”

알렉스가 말허리를 단번에 잘라냈다. 말 같잖은 그들의 변명을 들어 줄 시간 따위 없단 듯, 알렉스는 그들보다 더 진득하게 미소를 유지한 채로 그들을 하나하나 노려봤다. 대놓고 노려봤다고 표현하기에도 무리인, 날카로운 미소였다. 알렉스는 어깨를 툭툭 털며 말했다.

“오해할 게 뭐 있다고 오해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오묘한 말에 귀족들은 빠르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까놓고 보자면, 알렉스의 눈치를 살필 것도 없지 않은가? 자신들이 페리하츠 대공가를 욕보인 것도 아니며, 더불어 대공 각하의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눈치 빠르다는 귀족 한 명이 너스레를 떨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그렇지요. 애커먼 경께서 제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그저 두 분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한마디씩 얹은 거뿐이니 말입니다.”

일단 잡아떼는 게 먼저다. 뭐든 간에 인정하는 순간, 인정하기 전으로 되돌릴 순 없다. 그러니, 일단 우길 수밖에.

“맞습니다. 오해랄 게 없지요.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셔서 그만…….”

그때,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소맷귀를 정리하며 알렉스가 다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게 뭐라고 절 잡아 두고 말씀하시는진 모르겠지만, 각하께 꼭 말씀 올리도록 하죠. 그럼, 이만.”

오해할 게 없단 말에 흡족해하며 웃고 있던 귀족들의 안면이 단박에 굳었다. 알렉스를 잡으려던 그들은 한발 늦었다. 이미 떠난 배를 보듯이 귀족들의 표정이 온전치 못했다. 마치, 다신 돌아오지 않을 배를 보듯이 마른침까지 삼켰다.

그사이, 알렉스는 어느새 춤을 마치고 린느와 팔짱을 끼며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밀러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리고, 알렉스가 말을 마치자 밀러가 자리에서 그들을 내려다봤다.

억겁의 시간이 그들 사이를 갈라선 것처럼. 무척이나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들은 잠시간 저 대쪽 같은 대공 각하께 무어라 변명할지 고민을 하다가도, 쓸데없는 변명으로 그의 심기를 더욱 건드릴까 싶어 변명을 포기했다. 다음은, 무조건 빌기. 오해고 뭐고 간에 일단 빌고 봐야겠다며 그들은 쿵쾅거리는 심장께를 다독였다. 고작 몇 초일 뿐인데도, 밀러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폭탄으로 두들겨 맞은 듯 아파 왔다.

린느는 그런 밀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했기에 눈으로 욕을 한데?’

차라리 콩 쥐어박고 혼을 내는 게 낫지, 눈으로 욕하는 모습은 실로 숨이 막히는 모양새였다. 밀러가 자신의 곁에 있음에 안도하며 린느는 그 귀족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중년의 남자들이 질겁하며 린느의 시선을 피했다.

‘왜 저래. 뒷말하다 걸린 사람들처럼.’

린느는 밀러의 팔뚝을 톡톡 끌어당겼다. 그러자, 숨도 쉬지 않고 노려보던 맹수의 시선이 제 주인을 찾은 것처럼 누그러졌다.

“각하, 저 이제 놀러 다녀도 될까요?”

말문이 막혔다. 이미 그녀에게 해 둔 말은 있지만, 저렇게 더러운 것들 사이에 린느를 둘 순 없고. 밀러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는 자신의 눈이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 그녀를 놓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린느를 품에서 놔줬다.

그러자, 그의 품에서 풀려난 린느가 두어 걸음 내딛더니 금방 밀러에게 다가와 손을 뻗어 귀를 달라 보챘다. 밀러는 의심도 없이 상체를 숙여, 그녀에게 귀를 내줬다.

“약 아껴 드시지 마세요. 알았죠?”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밀러는 그만 아량 넓은 귀여운 걱정에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웃음기를 없애고 그녀의 귀에 똑같이 속삭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나.”

밀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 빛나는 금안에 이채까지 띠며 비장하게 말했다.

“버릇없어도 좋아. 예전처럼 마음껏 돌아다녀.”

이래서 낙하산이 무섭다니까. 린느는 그의 오만함이 제게도 옮을까 넌더리를 치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런데도 그의 안색에 만족감이 없자, 린느는 엄지를 척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잔걱정도 많으셔라.”

린느는 뒤로 돌아 귀여운 얼굴로 용맹한 척 위엄을 떨며, 부인들 사이로 향했다. 그녀가 부인들 사이로 자연스레 스며드는 걸 확인한 뒤에야, 밀러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알렉스.”

밀러의 부름에 알렉스는 신의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바짝 각을 세워 그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 * *

부인들이 모인 자리엔 부인이라 칭하기 민망할 만큼 앳된 이들도 보였으며, 중후한 매력을 가진 부인들도 많았다. 거적때기를 입어도 누가 봐도 귀족이라 칭할 만큼 우아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저번 연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른 거 같은데…….’

다른 영지라서 그런가? 사뭇 진중하고도 묘한 분위기가 연회장 내부를 뜨겁게 달궜다. 부인들은 화려한 부채로 입을 가려 말을 나누다가도, 린느와 시선이 부딪치면 사르르 웃으며 묵례하기 바빴다.

‘이게 어른들의 연회란 말이지?’

고작 샴페인으로 드레스를 망치는 정도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좀 더 차분하면서도 달뜬 분위기에 린느는 조심스레 자리를 만들어 샴페인을 홀짝였다. 그러자, 기다렸단 듯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화려한 부채 뒤로 눈웃음이 보였다. 린느는 제게 인사를 건네는 부인에게 활짝 웃어 주며 살갑게 대했다.

“안녕하세요?”

“그 작품, 드뷔르 마담이죠?”

“네! 와, 눈썰미가 엄청나시네요.”

부인은 흐뭇하게 웃음 지으며, 자연스레 린느 옆자리를 차지했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에, 기회만 노리던 이들이 아쉬운 듯 쯧, 혀를 찼다. 그도 그럴 게, 연회장에 내내 얼굴도 비치지 않던 대공이 낯선 여인을 데려온 것도 모자라, 누가 훔쳐라도 갈까 싶은지 내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지 않았던가.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바로 코앞에서 펼쳐졌으니, 그들의 호기심은 치솟을 대로 치솟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얼음송곳이란 별명까지 가진 남자가 여인을 저리 애틋하게 바라보다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부인들은 린느 주위를 뱅 둘러 호호 웃었다.

“눈썰미랄 게 뭐 있나요. 레이디의 미모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서 때려 맞힌 거죠. 아,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한 명이 통성명을 내놓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저마다 자기소개하느라 바빴다. 단 1초라도 제 곁에 있는 사람보다 린느의 눈에 띄기 위해 정성도 그런 정성이 없었다. 하지만…….

‘아, 이름이 뭐라 했지? 아, 알리나? 미치겠네.’

그들의 이름들이 한데 섞여 린느의 머릿속을 뒤집어놨다. 통성명하는 이가 5명이 넘어간 탓이다. 잔잔하게 깔린 음악 소리에 글라스 부딪치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까지! 이런 상황에 무려 몇 초 안에 여러 명의 이름을 어떻게 외우란 말인가. 무슨 술자리 게임도 아니고!

‘물어보지 마라. 제발.’

린느는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되물어 볼까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그 누구도 린느에게 다시 자신들의 이름을 되묻거나 확인하지 않았다. 감히, 그런 짓을 할 리도 없었으며 그녀가 자신들의 이름을 착실히 외워 줄 이유가 하등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서로 견제하기 위해 앞다퉈 통성명을 한 게 마음에 걸려, 서로 말을 아꼈다. 그만큼이나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잘 아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린느의 입장은 달랐다.

“반겨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이런 연회엔 오랜만이라서요.”

“별말씀을요. 레이디께서 저희 인사를 받아 주셔서 감사한걸요.”

말꼬를 다시 트자, 부인들이 앞다퉈 말을 이었다. 저마다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그녀의 시선을 단 1초라도 더 받기 위해 칼 없는 전쟁이 이어졌다.

“혹, 파우더 룸에 가실 일이 있다면 절 불러 주세요. 제가 머리칼을 만져 드릴게요.”

“어머, 농담이시죠? 머리카락 만질 일도 없으시면서, 레이디의 머리칼을 만져 드린다구요?”

호호 웃으며 부채로 입을 가리자, 먼저 파우더룸으로 함께 가자던 부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도 아주 찰나일 뿐, 다시 미소를 지으며 없던 일처럼 흘려보냈다.

‘살벌하네. 미치겠다. 내가 생각한 연회는 이게 아닌데.’

린느는 당장이라도 밀러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남겨진 부인들이 무슨 말을 오갈지 몰라 그것 또한 걱정이었다. 귀여운 메리와 루비가 보고 싶고, 셰프의 음식이 그리워졌다. 오전 정찬 후에 도란도란 코코아 잔을 나누던 미리안도 보고 싶어졌다.

‘피곤해.’

린느는 어려운 자리 한 가운데서 뺨에 경련이 일도록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을 어려워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레, 레이디? 체리 좋아하세요?”

“아, 체리! 여기요!”

린느의 표정이 눈에 보일 만큼 시무룩해지자, 서로를 견제하던 부인들이 갑작스레 동맹을 맺고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체리 좋아해요. 레이디들께서도 좋아하세요?”

저 표정을 보고 누가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인들은 한마음으로 답했다.

“그럼요!”

“전 체리만 세 바구니씩 먹어요.”

“저도요! 전, 네 바구니요!”

체리를 입에 넣으며 답하는 부인도 있었으니, 그 모습이 또 고마워 린느는 싱긋 웃었다. 그 짧은 미소에도 부인들은 안도하며 따라 웃었다. 그때였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부인들을 가르며 린느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소백작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청초한 얼굴에 가녀린 몸선. 아니, 말랐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그녀의 몸에 과분할 만큼 화려한 드레스가 입혀져, 아름답긴 하나 제 옷을 입지 않은 사람처럼 불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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