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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50화 (49/122)

@50화

낮은 음성이 귓가를 울리자, 오소소 소름이 돋아 눈이 반쯤 감겼다. 린느는 저도 모르게 할딱 숨을 들이쉬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그녀의 손을 느릿하게 놔주자, 두 사람만을 위한 연회처럼 하나둘 커플들이 빠져나갔다.

“왜 다들 춤을 안 추는 거죠?”

“글쎄.”

뻔한 이유였으나, 밀러는 장난기 어린 낯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티끌만큼 올린 입꼬리가 그렇게 매력적이었다.

“구두는 단단한 거로 준비했어.”

“참내. 저 춤 연습했거든요?”

“좋아. 뭐든 배워 두면 도움은 돼.”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칭찬을 끝으로, 말미에 밀러가 린느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스텝을 옮겼다. 느릿한 음악에 린느의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연습이라도 했는지 움직임이 눈에 띄게 가벼웠고 매끄러웠다.

“머리가 나쁘진 않아.”

춤을 연습한 지 고작 한 달도 안 됐는데 이 정도 성과라니. 밀러는 그녀의 춤에 감탄하여, 한다는 칭찬이 고작 그뿐이었다.

“저 배운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러니 하는 말이지.”

“설마 그게 지금 칭찬이었어요? 하, 각하께선 칭찬에는 진짜 젬병인 거 알아요?”

밀러는 린느의 허리를 확 끌어안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칭찬에 젬병이라니. 그가 젬병인 건, 망할 불안 증세 하나이건만. 밀러는 그녀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요. 저 정말 이래도 돼요?”

“뭘 했는데.”

“아니….”

린느는 멀찍이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락센 경을 흠칫 바라봤다.

“전 아직 백작도 아닌데, 막 인사도 안 받아 주고 그러면 너무 싸가지, 아니 예의 없어 보일 거 같아서요.”

밀러는 기다란 팔을 쭉 뻗어, 린느를 한 바퀴 돌게 하더니 다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기본 스텝만 밟아도, 그의 손에 맡기면 풍성한 춤으로 보여 신경 쓸 게 없었다.

“모든 사람에게 예의 바를 이유가 있나? 모두에게 친절할 이유가 있냔 소리야.”

그의 물음에 린느는 그만 입이 다물렸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한 탓이다.

“설령, 그대가 예의 없이 굴어도 저들은 그대에게 단 한마디도 못 해. 그게 내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 중 하나였거든.”

그가 건넨 선물을 가벼이 무시하고, 모든 이들에게 친절한 린느가 처음엔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사용인 사이에서 린느에 대한 소문이 돌아도 린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공저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저택처럼 돌보지 않았는가.

결국, 그녀의 노력으로 대공저 사용인들의 대부분이 그녀의 매력에 폭 빠졌다. 이 앙큼한 여인은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제게서 대공저 사용인 리스트까지 빌려 가, 일한 지 고작 한 달도 안 된 마부의 아들부터 정원사의 넷째 딸에게까지 한 줄 편지를 남겼다.

그녀가 이토록 진심으로 다가가니, 주인을 닮아 무뚝뚝하던 사용인들도 린느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일을 돕는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건 대공저에서 일하는 사용인이니 가능한 일이다.

“린느, 그대가 진심으로 친절을 베푼다 해서 상대도 당연히 진심으로 답할 거란 기대는 마. 특히, 귀족들.”

락센 경에게 닿은 금안이 거칠어졌다.

“앞에서 잘 웃는 귀족들은 더더욱 경계해.”

린느는 그의 조언에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밀러의 손에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닿은 귀족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웃음뿐이었으니. 그 모습이 기괴해, 린느는 저도 모르게 밀러의 팔을 꼭 잡았다. 미묘한 감촉에 밀러가 린느를 내려다보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선물을 준 거야. 그대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움츠러들 것 없단 듯, 그는 말미에 웃음까지 보였다. 마치, 귀족들의 웃는 얼굴에 침 뱉으라며 등 떠밀어 부추기는 모양새였으니. 린느는 밀러를 따라 픽, 웃었다. 두 사람의 미소와 어울리는 느릿한 춤사위가 연회장을 누볐다.

귀족들은 얼음송곳보다 날카로운 대공에게 미소를 안겨 준 여인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아주 초면은 아닌 거 같은데 누구인진 모르겠군.”

“하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레이디와 마주치고도 기억 못 할 리가 없잖소?”

“음, 타국의 레이디일까요?”

귀족들은 끙, 앓는 소리를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바빴다. 그때, 웃는 낯으로 락센 경이 그들 사이에 스며들었다. 샴페인 잔을 기울며,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을 배경 삼아 말했다.

“페리하츠 대공가의 가신이라더군요.”

“아, 정말입니까!?”

“세상에. 새로운 가신을 들이셨다 들었다만, 그게…….”

여인일 줄이야. 귀족들은 말을 뱉는 대신에 린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귀족들 사이로 말소리가 급격히 줄었다. 그들은 새초롬한 얼굴로 잘만 웃는 린느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어떻게 대공 각하의 마음을 다 홀리셨나.”

속으로 한다는 말이 툭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자 거대한 댐에 얇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눈치 보던 귀족들이 한마디씩 거든 탓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북부의 찬바람보다 쌀쌀맞은 분이 저리 미소를 지으시다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사내란 그런 거죠.”

하이에나 떼가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의 오기 가득한 입주름에 미소가 실렸다. 그것도 잠시, 샴페인 잔을 입에서 떼자마자 락센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 좀 보라죠! 우리 라밀라를 위해 이렇게 연회장도 짓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돌아가신 노공들이 이 꼴을 보며 배알 빠진 놈이라며 자신을 힐난할 거라며 락센은 잘도 떠들었다. 샴페인을 한 손에 들고 양팔을 펼치니, 그 가증이 실로 라밀라를 향한 애정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락센은 자연스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린 이렇게 약한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소에 빠져 이런 허파에 구멍 난 짓도 서슴지 않는 거지요.”

“맞소. 맞는 말씀이오!”

귀족들은 뒤룩하게 찐 살을 출렁거리며 넉살 좋게 웃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잔을 부딪쳐가며 알량한 승리감에 젖어 웃었다. 그때 살살 눈치를 살피던 락센이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테빈스 경께선 불참하셨군요.”

“좀 더 기다리면 오시지 않겠습니까?”

술과 여자라면 빼지 않고 쏘다니는 노인이 아니던가. 차마 그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픽, 웃었다. 서로 눈만 바라봐도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이미 아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락센은 곁에 있던 큐브 모양의 치즈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연회 시즌에는 저택에서만 머물지 않겠습니까?”

락센의 말에 귀족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눈썹을 굽이쳤다. 연회 시즌을 위해 사는 노인이 무슨 일로 이번 연회 시즌에 저택에서만 머문다는 걸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귀족이 타박하듯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인지 쭉 말을 좀 해 보세요.”

답답해서 원. 성격 급한 귀족이 한술 떠 주자 락센은 냉큼 받아먹었다.

“글쎄, 어린 영애와 혼담을 나누려 했다던데……. 저도 깊이 아는 일은 아닌지라.”

락센은 작은 불씨 하나로 마른 낙엽 뭉치에 불을 질렀다. 이제 활활 타오르길 방관하기만 하면 완성인 바짝 마른 낙엽 아닌가. 락센은 잔을 기울며 다시 미소를 가렸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귀족들은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스테빈스 경께선 욕심이 과합니다. 그만하면 되셨지 뭘 또 혼인하신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연세에 비해 건강하시긴 하다만, 세월에 장사 있습니까? 저 보십시오. 딸랑 다섯 있는 여인들도 감당하지 못해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 트로피를 따 둔 사람처럼 여유롭기까지 했으니, 퍽 역겨운 웃음이었다. 한 명이 운을 떼자, 다른 귀족들도 저마다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어찌나 허풍스러운지 그들의 대화를 듣던 부인들도 혀를 내둘렀다.

뭐, 정부들이 제 바짓가랑이를 잡아? 뜨거운 밤을 보내? 저들이 구실이나 하겠냐며 중년의 부인들은 더러운 꼴을 본 사람처럼 쯧, 혀를 찼다.

“부인들에게 소박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부인이요? 정부한테도 소박 안 맞으면 다행이죠. 부인, 우리 저기로 가요. 정말 더러워서 못 들어 주겠네.”

부인들은 부채 뒤로 그들을 조소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험담은 듣지도 못하고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끝내주는 기술을 지녔는지 허풍을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점차 그 수위가 선을 넘자, 락센이 큼흠, 헛기침하며 그들의 말을 잘랐다. 그가 지르려던 불은 밤 기술 따위가 아니었다.

대공이 스테빈스 백작에게 압박을 줬고, 스테빈스 백작이 혼담을 나누려던 이는 다름 아닌, 대공의 스토커인 세르트 백작가의 장녀란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여태 스토커를 핑계로 연회 불참을 숨 쉬듯이 한 대공이 이상하지 않냐며, 틀림없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단 의구심을 던지려 했건만. 멍청한 귀족들 때문에 말이 이상한 곳을 향했다.

‘스테빈스 이야기에서 어떻게 밤 기술로 넘어가나. 답답하긴.’

그때, 연회장을 다 울리던 음악이 마무리됐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두 사람을 감싸 안았고, 그들도 웃는 낯으로 손뼉을 쳐댔다.

“캬, 저 미소 좀 보십시오. 저 미소라면 저라도 가신으로 삼겠습니다.”

“그러게요. 생기가 넘치는 게, 아주 그냥…….”

린느를 향해 서슴지 않고 비아냥대는 목소리는 밀러에게는 절대 닿지 않을 만큼 적당히 컸다. 그때, 락센 경이 기다렸단 듯이 그들에게 말을 흘렸다.

“세르트 소백작이랍니다.”

“저 여인이?”

“영식이 없다 해도 영애에게 소백작을……. 잠깐, 세르트 가문이라 하셨소?”

밤낮없이 대공저를 들쑤시는 그 영애? 에이, 그럴 리가 있나. 귀족들은 허허 웃으며 손을 훠이 저었다.

“세르트 경의 장녀가 제정신이 아니니, 저 여인은 차녀가 아니겠습니까?”

“차녀라도 제정신이라 퍽 다행이구만. 얼굴도 반반하니, 잘 홀려 먹게 생겼고…….”

더 말을 이으려던 찰나에, 기다란 그림자가 그들을 넉넉하게 가렸다. 한눈에 봐도 생긴 거로나 마음가짐으로나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진 그들과 다르게 훤칠한 젊은 귀족의 그림자였다.

“길 좀 비켜주시죠.”

그때, 승리감에 도취 되어 있던 중년의 귀족들이 몸을 틀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감히 길을 비키라 마라인지! 예의 없는 젊은 귀족에게 한마디 몰아세우려던 찰나에, 그들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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