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9화 (48/122)

@49화

속도를 줄인 대공저 마차가 잘 닦인 마찻길을 가로지르며 락센 경의 저택 본관으로 향했다. 이미 도착한 귀족들의 마차가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어, 린느는 놀이동산에 도착한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저 안에서 얼마나 멋들어지게 춤추고 있을지! 반면,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를 보자마자 귀족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간 연회라면 학을 떼던 대공이 무슨 일로 이곳까지 행차했는지 귀족들은 알 수가 없었다. 개중에 눈치 빠른 귀족들은 오늘 연회는 적당히 즐기다가 그림자처럼 빠져야겠단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달칵.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연말 영화제 시상식 레드카펫 같은 붉은 융단이 그들을 반겼다. 융단 끝에는 연회장 입구로 향하는 커다란 문이 있는데, 린느의 시선은 벌써 그곳으로 향했다.

그사이에 밀러가 유연히 마차에서 내렸다.

“손.”

대공저에 발이 묶인 그 날처럼, 그는 린느에게 또다시 손을 뻗었다. 벌써 몇 번이나 그의 손을 잡아서인지, 낯선 이들의 시선 때문인지, 이 낯선 곳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이 남자뿐이란 생각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린느는 덥석 밀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수많은 인파가 보내는 시선의 목적지는 밀러가 아닌, 린느로 단번에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 린느는 되레 밀러의 팔뚝에 손을 턱 하니 얹고서 싱긋 웃었다.

“각하께서도 좀 웃으세요. 누가 보면 각하께서 제게 납치당한 줄 알겠어요.”

린느는 복화술 달인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는 동시에, 밀러에게 나직이 타박했다. 그 시답잖은 타박에 밀러는 그만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잔잔하게 올라오던 불안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신기하지 않은가. 고작, 말 한마디인데 이렇게 안도되다니. 밀러는 평소와 달리 제게 살갑게 구는 린느를 내려다보며 남몰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간 자신이 그녀에게 좀 더 친절하게 대한 덕분이겠거니, 말도 안 되는 기대에 부풀어, 홀로 만족한 탓이다.

“세상에! 대공 각하!”

그 만족감에 젖을 시간도 없이, 멀찍이서 연회장을 가로지르며 락센 경이 뛰어왔다. 그러자 밀러는 미소를 지우고, 냉랭한 얼굴로 달려오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저 사람이 락센 경인가?’

린느는 달려오는 그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생긴 거로는 멀쩡하게 생겼으며, 여전히 그녀의 기억 속에 없는 인물이었다.

“각하를 뵙습니다!”

씩씩한 인사에도 밀러는 미세하게 턱짓만 했다.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는 인사법이지만, 락센 경은 늘상 겪는 일처럼 태연하게 허리를 굽혀 곰살궂게 굴었다.

“오시는 데에 불편한 건 없으셨는지요.”

“대공저 마차로 왔으니, 불편할 게 없지.”

“아.”

첫마디부터 막혔다. 락센 경의 눈동자가 크게 한번 휘청이더니, 다시 금세 반달로 휘었다. 회복은 빠르군.

“제가 마차를 보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었습니다!”

“언제는 보냈다고. 됐다.”

두 번째도 역시나 막혔다. 이는 밀러가 그를 일부러 난감하게 하고자 마음먹은 것도 아니었다. 원래 말투가 이런 식이며, 굳이 살면서 자신의 말투에 문제를 느끼지 못한 탓에 이런 식으로 살 뿐이었다.

황제나 황후와 알현할 땐, 공적인 대화만 나누니 감정 상할 일도 없고. 황태자와는 오랜 친우처럼 막역한 사이이니 딱히 치레할 일도 없었다. 게다가, 귀족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입맛에 맞게 굴 필요가 하등 없으니, 어쩌면 그의 이런 무심한 말투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 린느는 어색하게 웃으며, 락센 경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정말 봐도 모르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느끼하게 생긴 사람은 없었단 말이지.’

겹겹이 차려입은 비싼 옷이며 열 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에 바짝 올려 빗은 머리칼까지. 버터가 사람의 형체를 한다면, 바로 락센 경이 아니겠냐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 라밀라와 인사는 나누셨는지요.”

“해야 받을 테지.”

이야, 이보다 더 얄미운 말투는 없겠어. 린느는 밀러의 조소에 박수를 보낼 뻔했다. 이쯤 되니, 밀러도 대단하지만 그런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락센 경이 더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락센 경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린느를 향했다.

“레이디께선…….”

락센 경은 노골적으로 린느를 훑어보며 어느 가문에 누구인지 머리를 굴렸다. 만약, 밀러가 여인과 약혼을 했다거나 혼담이 오갔더라면 3살짜리 코흘리개도 알았을 텐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밀러의 스캔들은 흔적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락센 경은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동시에, 린느 역시 자신을 무어라 소개해야 할지 망설였다.

‘뭐, 고용주와 고용인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내 이름을 말하면 되나?’

그때, 밀러가 오만한 얼굴로 락센 경을 빤히 내려다봤다.

“페리하츠 대공가의 가신이자, 세르트 가의 소백작이다.”

가신이란 단어에서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들떠 있었다. 비록,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반면, 묵직하고도 낮은 목소리에 락센 경의 동공이 크게 팽창했다. 자리에서 그대로 굳은 바위처럼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물론, 이 까다로운 대공이 이례적으로 가신을 뒀단 소문은 익히 들었다만, 그게 여인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탓이다. 게다가, 그 여인과 파트너로 연회장에 참석했다?

‘설마, 결혼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가신을 이리 데려오진 않았을 테고.’

락센 경의 머리가 과부화된 기계처럼 소음을 내며 돌아갔지만, 딱히 그럴듯한 다른 답은 찾지 못했다.

“모, 몰라뵈었군요. 세르트 소백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습니다, 락센 경.”

갑작스러운 인사치레에 린느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 줬으나, 그런 그녀에게 밀러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그의 인사에 똑같이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때문에 린느는 어정쩡하게 다시 고개를 들어, 락센 경의 인사를 받기만 했다.

‘이래도 되나.’

정확히 따지자면 소백작이 백작은 아닌데, 락센 경의 인사를 이렇게 오만하게 받기만 해도 되냔 말이다. 린느는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런 쪽으론 밀러의 판단이 더욱 믿음직하니, 그를 믿기로 했다.

밀러가 그녀에게 얼마나 편파적인 사람이며, 편애하는 편인지도 모르고 린느는 그의 판단을 대책 없이 믿었다. 다행히도 인사를 마친 락센 경은 아까와 같이 담뿍 웃고 있어, 린느는 그의 미소에 홀랑 안심했다. 혹시라도, 자신을 예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할까 두려웠으나 표정만 살폈을 때는 기분이 상하지 않아 보여 안도의 숨을 몰래 내쉬었다. 그때, 밀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연회 여느라 고생깨나 했겠군. 그럼 즐기다 갈 테니, 일 봐.”

밀러는 할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가 귀족들에게 대하는 태도에 비하면, 그는 확실히 대공저에 머무는 사용인들에게 지극히 상냥한 주인이다. 그것도 아주 다정한 주인.

밀러는 말없이 제 팔에 올려진 린느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이에 린느는 어깨를 흠칫 떨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금안은 락센 경에게 욕을 하듯 날카로웠으나, 묘하게 불안감이 묻어 있었다.

‘긴장됐나 보네.’

하긴, 섀르넌이 주최한 연회 이후로 첫 연회이니 긴장할밖에. 그나마 이 정도면 병세가 아주 많이 호전된 셈이다. 원작에서의 밀러는 대공저에 틀어박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지내니까.

‘무리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이제 조금 나아졌는데…….’

린느는 애잔한 눈으로 밀러를 올려다봤고, 밀러는 맹수처럼 주변을 경계하기 바빴다. 얼마나 두려우면 저렇게까지 경계를 하는지. 린느는 오랜만에 밀러가 무척 안타깝단 생각에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겨줬다.

반면, 밀러는 헛웃음을 힘겹게 삼켰다.

‘어이가 없군.’

하나같이 정신이 나간 것들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대공과 동행한 여인에게 시선을 담아? 밀러는 린느를 뺏길까 손을 꼭 쥐고 주변을 샅샅이 노려봤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연회장을 누비도록 두는 게 계획이었건만. 이래서야 마음 놓고 놓을 수가 있나. 밀러는 힐끗 그녀의 드레스 끈을 바라봤다. 단단히 묶어 둔 끈에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먹잇감 노리는 눈동자들을 보고 있자니 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마차 안에서 린느가 말해 준 드레스 사건 때문이다. 멀쩡한 드레스 끈이 갑자기 풀렸을까? 고작 느슨하게 묶었단 이유로? 천만의 말씀.

‘질 낮은 장난을 친 거겠지.’

그 정도 추악한 장난은 장난도 아니다. 어릴 적부터 선대 대공이 아픈 대공비를 방에 가둬 놓고 대공저가 떠내려갈 만큼 연회를 열어 댄 탓에, 밀러 그 역시 알고 싶지 않은 추악한 장난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흘려들은 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제 앞에서 드레스 끈이 풀려 허둥대는 여인과 추악한 장난에 실실 비웃던 사내들을 본 탓이다. 아무리 어린 대공자여도 그 짓이 하등하고 더러운 짓이란 건 알 수밖에 없었고, 그 짓거리를 선동한 건 창피하게도 자신의 아비라는 것도 알 수밖에 없었다.

“린느.”

밀러의 부름에 사람 구경에 한창이던 린느가 밀러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린느에게서 미소를 보는 건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래, 그래서 더 위험하지.

그녀가 이렇게 웃을 때마다 딱 죽을 것만 같으니. 밀러는 평소처럼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녀의 미소에 홀려 빤히 바라봤다.

“말씀하세요.”

그때, 그녀의 어깨너머로 사내들이 살금살금 다가왔다. 달콤한 과일에 벌레가 맺히듯, 사내들이 주변을 자글자글 끓자, 밀러의 금안이 번뜩였다.

“헉.”

밀러의 금안을 확인한 남자들이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그 꼴을 보며, 밀러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그래, 지금처럼 알아서들 도망가도록, 그녀를 피하도록 만들면 돼.

여태 수많은 영식이 세르트 영애를 피하던 그 이유를, 그 근본을 살짝만 비틀면 어려울 것도 없을 테지. 과거엔 대공을 스토킹하는 집착병 말기 영애라는 추문이었다면, 미래엔 대공의 여인이라는 염문을. 밀러는 그 잘난 얼굴로 유려하게 미소를 지었다.

“린느, 음악이 바뀌었어.”

그의 음성이 린느의 귓가를 자르르 자극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