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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8화 (47/122)

@48화

린느의 호들갑도 오래가진 못했다. 2시간 내내 같은 풍경만 이어진 탓이다. 살짝 뜬 두 다리를 공중에서 동동 구르다가, 햇빛을 머금은 머리칼을 만지작대다가. 결국, 그녀의 시선은 밀러가 읽는 책과 그의 안경으로 향했다.

‘원작에서도 안경을 썼단 말은 없었던 거 같은데. 잘생기면 되지, 뭐.’

원래 잘생긴 사람이 안경을 쓰면 안경 모델이 되는 거고, 삭발하면 삭발한 잘생긴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는 안경 역시 잘 어울려, 린느는 힐끗힐끗 그를 바라봤다.

반면, 밀러는 같은 문장을 읽기를 반복했다. 방해도 저런 방해가 없지. 마치, 심심한 고양이가 장난감을 제게 굴린 것처럼 온갖 신경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어차피 바라볼 거면 당당하게 바라보지, 자꾸 힐끔댄 탓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붉은 노을이 마차를 덮쳐 그의 얼굴빛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제게 장난감을 다시 돌려달라 시위하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바라보자, 그녀가 보내는 간지러운 시선에 밀러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다 구경했나?”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무심하게 벗었다. 조금이라도 흐릿한 시야가 그의 심장 건강에 좋겠지 싶었다. 반면, 힐끔대며 그를 바라보던 린느는 어깨를 들썩이며 흠칫 놀랐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어색하기 그지없는 연기 톤으로 말했다.

“뭐, 뭘요? 뭘 구경해요?”

너무 노골적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나 싶어, 린느는 구수한 추임새와 함께 어색하게 웃었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무심히 바라보더니 기다란 검지로 고상하게 창밖을 가리켰다. 자연스레 린느의 시선도 그의 검지 끝으로 향했고, 뒤늦게 그가 말한 구경은 창밖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창피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자, 밀러는 동요하는 기색조차 없이 말했다.

“심심해서 그러나?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모르겠군.”

“두 시간 내내 앉아만 있으려니 심심해 죽겠어요. 이럴 거면 알렉스 님이랑 함께 타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두 다리 뻗고 잠이라도 잤을 거 아니에요.”

밀러는 그녀의 투정에 이해하지 못하겠단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락센 경의 저택에 도착하려면 두 시간은 더 남았어. 그럼 해가 질 테고, 숲길은 금세 어두워지기 마련이지.”

린느는 투덜거리던 입을 꼭 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금세 긴장한 듯 몸이 굳자, 밀러는 안경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걱정할 건 없어. 길이 숲길이라 어두운 것뿐이지, 맹수가 오가는 길은 아니니까.”

“다행이네요.”

밀러는 기죽은 그녀를 바라봤다. 원래에도 한 손에 들어올 만큼 린느의 체구가 작긴 하다만, 오늘따라 그녀의 안색이 더 희게 보였다. 게다가, 한껏 치장한 드레스가 그녀의 숨통을 끊을 것처럼 굴었다. 안 그래도 자그마한 몸통이 드레스 때문에 얕은 숨을 쉬자 그는 손을 뻗어 담요를 건넸다.

“잠시 옷을 편히 해 두는 게 어떨까? 도착까지 2시간인데.”

“네? 옷을요? 어떻게요?”

그걸 어찌 자신의 입으로 말할까. 밀러는 그 오만한 얼굴로 멈칫했다. 무어라 돌려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가 난감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드레스를 잡아 주는…….”

“드레스요?”

“허리를 잡아 주는 그.”

뭘 자꾸 잡아 준다는 거야? 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밀러의 말을 기다렸다. 아주 순수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으니, 밀러는 자신이 그녀에게 못 할 말이라도 꺼낸 사람처럼 불편해했다. 괜한 말로 오해 살 일은 없어야 할 게 아닌가. 미간까지 좁혀 무슨 단어를 쓸까 고민하던 중, 린느가 타박하듯 말했다.

“답답해 죽겠어요! 허리를 뭘 잡는데요? 설마, 이거요?”

린느는 자신의 허리를 가리키며 물었고, 밀러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서로 대화가 통했으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손이 안 닿는데.”

린느는 창백한 얼굴로 손을 더듬거렸다. 애석하게도 짱짱하게도 묶인 끈은 린느의 손에 풀리기는커녕 미동도 없었다. 메리가 야무지게도 묶어 둔 매듭은 그녀의 생명줄이라도 달아 둔 것처럼 풀릴 기세가 전혀 없었다.

「메리, 이렇게까지 꽉 동여매는 이유가 뭐야? 미치겠다, 정말.」

「어머, 이게 생명이에요! 연회장 한가운데서 끈이라도 풀리면 어쩌시려구요! 이렇게 얇은 드레스는 이 끈이 생명이니, 무조건 꽉 묶어야 해요.」

과거에 린느가 입은 드레스와 비슷한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가 연회장 한복판에서 끈이 풀려 난감했다는 둥 메리는 잔소리하듯 린느에게 조잘댔다. 이번 연회장엔 자신이 함께 따라갈 수도 없으니, 드레스 끈을 제대로 묶어야 한다나 뭐라나.

‘그렇다고 이렇게 군화 끈처럼 묶어 놓을 건 또 뭐야.’

그 난감한 상황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때, 산 중턱에서 갸웃거리던 붉은 태양이 자취를 슬며시 감췄다.

탁.

채 어두워지기도 전에, 밀러가 기다렸단 듯이 마차 내실 등을 켰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가장 먼저 닿은 곳은, 린느였다.

“괜찮나?”

“…네.”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닌데……. 린느는 방금 그에게 타박한 게 미안해 입을 우물거렸다. 대공저처럼 끝도 없이 넓고 미궁처럼 지리를 모르는 곳에서 어둠과 맞닥뜨릴 때 증상이 악화할 뿐이지. 매번 어두울 때마다 불안 증세가 올라오진 않는다. 물론, 마차 밖은 새카만 숲길만 보여 두렵긴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단 말이지.’

아무리 짙은 어둠에도 그와 함께라면 이상하게 안도가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게 깃든 안도의 근원이 밀러의 커다란 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매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턱짓이나 고개로만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웬일로 근래에 입으로 대답한다 했다. 린느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이만하면 많이 나아졌지 싶어, 린느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관계가 가문주와 가신 사이로 발전 아닌 발전한 이후, 그의 태도가 묘하게 바뀌었단 걸 린느 역시 체감했다. 조금 더 친절해졌다고 해야 하나? 이대로만 지내면 큰 탈은 없을 것이다.

눈치 빠른 그가 그녀의 기억상실이 거짓말이란 것만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단둘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걱정이긴 하네.’

그걸 제외한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후계자 공부를 마칠 때까지 미리안이 얌전히 지내거나 혹은 밀러가 미리안의 아비를 처리하면 일이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그럼 백작저로 돌아가서 이젠 백작 신분으로 놀고먹을 수 있겠지? 세상 신나 죽겠네.’

린느가 허공을 보며 실없이 웃자, 밀러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상체를 숙였다. 뒤늦게 그와 시선이 마주쳐, 린느는 어깨를 들썩였다.

“이리 와. 아님, 내가 갈까?”

“……네? 갑자기요?”

갑자기 오라니, 아니, 간다니! 묘한 분위기에 긴장감이 돌자, 밀러가 입을 뗐다.

“끈 풀어 줄게.”

“아.”

린느는 무한한 상상의 나래에 뺨을 톡톡 두드리며, 밀러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린느의 몸체가 살짝 기울자, 밀러의 큼지막한 손이 그녀를 넉넉히 잡았다.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거 제외하고,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있어.”

말미에 린느의 숨통을 빠듯하게 조이던 무언가가 탁하고 풀렸다. 린느의 몸을 감싸던 드레스가 힘을 잃고 느슨해지자, 린느는 두 손으로 드레스를 꼭 잡았다. 말하고 끈을 풀지!

린느는 밀러에게 타박하듯 시선을 뒀지만, 그녀가 마주한 건 그의 시선이 아니라 크고 보드라운 담요였다. 그 끈 하나 풀었다고 기다렸단 듯이 드레스가 풀어질 줄이야. 당황하기로는 린느보다 그가 더 당황했으니. 그는 시선을 돌리고, 담요만 걸쳐 줬다.

“…….”

적당히 흘러내린 드레스와 옅은 빛을 머금은 그녀의 얇은 어깨선. 밀러는 온통 검은색뿐인 창밖만 바라봤다.

* * *

재미없는 바깥 풍경임에도 밀러는 두 시간 내내 창밖만 바라봤다. 이쯤이면 그대로 잠든 게 아닐까 싶어 린느가 몸을 살짝 기울여 살피자, 밀러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안 잔다는 말만 남겼다.

락센 경이 영주로 지내는 영지에 가까워지자, 어둡기만 하던 주변에 자그마한 농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차 안으로 상업 단지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린느가 그의 오른팔을 콕 눌렀다.

“저어… 이거 좀 묶어 주실래요? 곧 내릴 거 같아서요.”

맞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곧 내리긴 할 건데. 망할. 다시 묶을 생각을 하자니, 암담했다. 풀 때는 한쪽 끈만 당기면 되지만, 묶을 때는? 밀러는 나직이 탄식을 뱉었다.

“…그대의 전속 하녀들을 데려왔어야 했어.”

사람의 목도 맨손으로 부러트릴 만큼 커다란 그의 손이 자그마한 병아리를 쥐듯 조심스레 그녀의 등으로 향했다. 태어나 신발 끈조차 제 손으로 묶어 본 적 없던 그가, 여인의 드레스 끈을 묶는다. 너무 세게 조였다가는 안 그래도 얇은 허리가 부러질까 염려되었으며, 넉넉하게 묶었다가 아까처럼 드레스가 흘러내릴까 두려웠다. 그의 손끝에 달린 목숨이 대공저에만 수십 명이건만. 단 한 번도 두려웠다거나 염려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지고 있는 책임들을 어릴 적부터 통감했으며, 자신의 막대한 권력에 수많은 책임이 따른다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제 손끝에 달린 드레스 끈에 어쩔 줄을 몰라 했으니. 기다리던 린느가 한숨을 내쉬었다.

“각하, 오늘 안에 끝나죠?”

그녀의 타박에 넉넉하던 드레스가 적당히 얇은 살갗에 밀착됐다.

“이 정도면 되나?”

“좀 더 조여도 좋을 거 같은데요?”

“숨쉬기 불편할까 봐.”

밀러는 말끝을 흐리며 개미만큼 조이고, 어떤지 물어보며 린느를 살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 진열대 앞에서 부모님 눈치를 보듯, 퍽 조심스러운 물음의 향연이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그런데 그렇게 넉넉하게 묶으면 안 된다던데요? 메리가 그러는데, 이 드레스와 비슷한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가 연회장 가운데서 끈이 풀려가지고옥!”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메리가 끈을 잡아당긴 만큼 드레스가 그녀의 라인에 맞춰 조여들었다.

“이 정도면 되겠나?”

“……넵.”

상상조차 두려운 말을 거리낌조차 없이 하다니. 밀러는 방금 린느가 말한 드레스 사건에 질겁하며, 군에서 사용하는 매듭법으로 드레스 끈을 묶었다.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을 보며, 그제야 밀러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가 불편하면 언제든지 내게 와. 귀찮게 구는 놈이 있으면 더더욱.”

그의 짧고 명료한 명령이 끝나자, 마차가 락센 경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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