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연회 당일이라고 해서 대공저 아침이 달라진 건 없었다. 똑같은 시간에 미리안, 밀러 그리고 린느. 이렇게 세 사람이 오전 정찬을 함께하고, 모닝커피를 마시며 아침을 맞이하는 건 여느 때와 똑같았다. 미리안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 두며, 길게 목을 빼며 밀러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의 커다란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미리안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린느 님, 정말 연회장에 가실 거예요?”
“네! 너무 설레고 떨리는 거 있죠?”
두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떨자, 미리안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만의 외출인지 모르겠어요! 세상에, 도대체 며칠을 지낸 거지?”
린느는 손가락을 접는 동시에 그 커다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날짜를 세느라 여념이 없었다. 미리안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다시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아, 아무튼 엄청 오래됐어요! 하, 이번엔 연회장 전체를 휩쓸고 올 거예요. 그러려고 연회 전용 춤도 배워 놨으니, 이참에 뽐내고 와야죠! 아, 그런데 미리안 님은 왜 참석 안 하세요?”
신나게 떠들던 린느가 평소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미리안에게 물었다. 함께 가면 좋으련만.
“저야 뭐…….”
“아! 조금 불편하다고 하셨었죠? 에이, 제가 그런 못된 영애들 상대해 줄 수 있는데!”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저택이 편해요.”
도망여주 입에서 저택이 편하단 소리가 나오다니. 린느는 웃음기를 싹 지우며 걱정스레 미리안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도망을 계획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라고 묻고 싶었으나, 괜히 얌전히 잠든 사자의 코털을 건들까 싶어 말을 뱅뱅 돌릴 뿐이었다.
“막, 제가 없는 동안의 외출을 계획하신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답해 달란 듯이 물었다. 그러자, 미리안이 음전히 웃었다.
“아니에요. 저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겨서 그런 생각 전혀 없어요. 린느 님 걱정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린느는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그때, 써니룸으로 안나가 들어왔다.
“아가씨, 말씀하신 가방을 모두 마차에 실었습니다. 이제 환복하시고 떠날 준비만 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린느는 미리안을 더 추궁해서 그녀의 속마음을 물어볼지 잠시 고민했으나, 안나가 알아서 해 주리라 믿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느가 하는 걱정을 밀러도 역시 하고 있을 테니, 이 일은 밀러가 알아서 하지 않냐는 믿음이었다.
‘지나칠 만큼 조심성 있는 성격이니 알아서 하겠지.’
그 정도 대비도 없이 연회장으로 떠날 그가 아니지 않은가. 린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에 도착한 린느는 안나가 어찌해서 이 명망 높고도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대공저의 하녀장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누구 못지않게 깔끔한 일 처리 덕분이었다.
* * *
린느는 함께 부엌일을 했던 하녀들의 손을 잡고서 그들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나 없는 동안 심심해하지 말구. 알았지?”
“그럼요. 저희 걱정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린느의 품에 안긴 어린 하녀들이 린느의 말에 간헐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누가 보면 타국으로 아주 떠나는 모양새처럼 보이기도 했으니. 멀찌감치서 이를 지켜보던 넬 부인이 안나에게 말했다.
“한 일주일 다녀오신다니?”
“얘도 참. 아가씨께서 대공저에 들어와 처음으로 외박하시는 거니, 그럴 수도 있지.”
“아니, 하도 유난스럽길래 난 또 일주일은 넘게 있다 오시는 줄 알았지.”
넬 부인은 뾰로통한 얼굴로 핏, 고개를 내저었다. 안나는 그런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른 후에야, 집무실에서 나오는 밀러에게 달려갔다. 언제 어디서든 완벽한 그는, 오늘 역시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사용인들이 로비까지 나와 린느와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는 퍽 소란스러웠지만, 그 모습이 보기 싫거나 꺼려지진 않았다. 밀러는 생경한 그 풍경을 보며 입꼬리를 꾹 눌렀다. 보기 좋은 모습에도 쉬이 웃음을 내어 주면 안 된다는 그의 강박 탓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안나에게 물었다.
“준비는 다 됐나?”
“예, 각하. 마차 바퀴 상태도 확인했으며, 튼실한 말로 준비했답니다. 아가씨의 짐도 두 번째 마차에 모두 실었으니, 출발하시면 됩니다.”
밀러는 평소와 똑같이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시선이 끈덕지게도 린느에게 들러붙은 것뿐이었다. 린느는 따가운 시선에 밀러를 바라봤다. 린느는 그에게 입 모양으로 ‘왜요?’라고 물었으나, 밀러는 별다른 대답 없이 대공저 밖으로 나섰다.
‘으이구, 저 까칠이. 마차 안에서 잠이나 자야겠네. 아니, 다른 마차를 타야겠어.’
린느는 붉게 달궈진 밀러의 귀 끝은 보지 못하고, 투덜대기만 했다. 린느는 다시 제게 몰려드는 하녀들의 손을 다독였으며, 밀러는 마차 안에서 그런 그녀를 말없이 기다려 줬다.
“아가씨, 이제 마차에 오르셔야 해요.”
“아, 내 정신 좀 봐. 부인, 20분 후에 이 바구니에 담긴 편지들 좀 나눠 주시겠어요?”
“네? 편지요?”
“대단한 건 아니구……. 그냥 써 본 거예요.”
안나는 놀란 눈으로 편지지를 바라보더니, 시선을 린느에게로 옮겨 엄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진심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런데 미리안 님은 바쁘세요?”
“두통 때문에 어젯밤에 잠을 뒤척이셨는데, 방금 올라가 보니 주무시고 계시더라구요.”
“아아, 저는 괜찮아요. 부인이 미리안 님 좀 잘 챙겨 주세요!”
“그럼요.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그제야 린느는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차는 총 두 대였다.
“따라오십시오.”
알렉스는 린느를 데리고 밀러가 타지 않은 마차로 향하려 하자, 밀러가 타고 있던 마차 문이 활짝 열렸다. 놀란 린느와 알렉스가 열린 문을 바라봤다.
“알렉스, 그대가 두 번째 마차에 타.”
“제가 말입니까?”
밀러는 제게 되묻는 알렉스를 빤히 바라봤다. 뭘 알면서 두 번을 물어보냔 듯 타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린느는 나직이 탄식을 뱉으며 밀러의 맞은편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어색해 죽으라는 거야, 뭐야.’
린느는 입매를 뻐근하게 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밀러는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문을 꽉 닫았다.
“불편해 죽겠다는 표정이군.”
“…상사와 장기 출장을 떠나는 기분이랄까요.”
밀러는 짧게 웃더니, 그마저도 뚝 그쳤다. 도대체 웃는 법을 어떻게 배웠길래 저렇게 살벌하게 웃는 걸까? 요즘엔 간혹가다 정상적인 웃음을 보이기도 했지만, 밀러에게서 그런 편안한 웃음을 보기란 가뭄에 콩 나듯 흔하지 않았다.
어느새 마차가 출발하고, 어린 하녀들이 대공저 앞마당까지 나와 배웅했다. 그들이 탄 마차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안나는 린느의 말대로 20분을 채운 후 편지 바구니를 열어젖혔다.
“…….”
당장 자리에 있는 사용인들은 린느가 적은 편지를 읽으며 음미했다. 어떤 이에게는 따듯한 위로를, 어떤 이에게는 장난기 가득한 편지. 편지에 담긴 내용은 가지각색이었다.
아직 린느와 안면을 트지 않은 사용인들은, 자신에게도 편지를 썼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저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어, 대공저에 웃음이 번져 갔다.
“넬, 네 편지도 있어. 어서 이리 와 봐.”
안나의 부름에 넬 부인은 늦장을 부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린느가 적은 편지가 고까운 것도 아니고, 그녀의 이 앙큼한 짓이 언짢은 것도 아니었다. 린느가 자신에게 남긴 편지를 읽고 나면, 저들처럼 그녀에게 빠져들까 두려웠다. 그럼, 그녀를 경계하는 건 누가 할까? 넬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건네받았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마음이 이렇게 설레는 건지! 넬 부인은 린느를 닮아 작고 귀여운 편지를 꺼내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꾹 짓눌렀다.
[넬 부인께, 사실 저는 다 알고 있어요.]
넬 부인은 편지를 다 읽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다 알고 있다는 건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흠칫 돌아보며, 다시 편지지를 뒤적였다. 설마 이게 끝이냐며 편지지 내부를 들여다봤다.
[넬 부인이 얼마나 따듯한 사람인지요. 그리고 누구보다도 대공저를 사랑한다는 것도요! 늘 고마워요!♡ -부인과 친해지고 싶은 린느가- ]
넬 부인은 저도 모르게 픽, 미소 지었다. 몇 년 전 시집보낸 딸에게서 도착한 편지처럼, 그녀는 품속에 넣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산업 스파이처럼 근엄하기까지 했으니, 이를 지켜보던 안나가 도리질을 하며 실소를 뱉었다.
* * *
덜컹덜컹.
마차가 눈에 익숙한 풍경에서 점차 벗어났다. 안나의 말대로 말들이 어찌나 튼실한지, 지친 기색도 없이 단번에 생경한 길까지 들어섰다. 대공저 입구에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나무처럼 높이 늘어선 나무가 즐비했다.
“키가 엄청 크긴 한데, 대공저에 있는 나무보단 작지 않아요?”
“나무 말인가?”
“네. 헐, 저 꽃밭 봐요! 대박. 저런 꽃은 처음 보는데?”
고작 나무와 꽃을 보는데도 린느의 눈동자는 신대륙을 만난 탐험가처럼 초롱초롱했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보라는 나무와 꽃은 안 보고, 마차 내실 창문에 딱 붙은 린느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봐요! 꽃망울이 오밀조밀하고, 색도 특이해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에 밀러는 턱을 괴며 뒤로 기댔다. 오밀조밀하고 색도 특이하단 말에 밀러는 그만 실소를 뱉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떠오른 탓이다.
“그래. 예뻐. 예쁘지.”
지독하게 예쁘지, 홀릴 만큼. 밀러는 널찍한 가슴팍을 두어 번 고쳐 때렸다. 그런다고 날뛰는 심장이 다시 얌전해질 것도 아닌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