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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2화 (42/122)
  • @42화

    상황을 지켜보던 안나가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공포 스릴러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이 아닌가! 순식간에 입술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쿵쾅댔다. 린느는 차마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리, 린느 님? 괜찮으세요?”

    미리안이 걱정스레 린느를 바라봤고, 린느는 되레 미리안의 품에 폭 안겨 이불로 얼굴을 슬쩍 감췄다.

    “추우세요?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을까요?”

    미리안은 린느의 상태가 걱정스러워 죽겠단 듯이 린느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린느는 죽은 듯이 숨어들었다. 그때, 문이 스르륵 하고 다시 열렸다.

    “후우, 하아…….”

    “넬? 무슨 일이길래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하아, 그. 오는 길에 전구를… 떨어트려서. 후, 다시 가지고 오느라.”

    넬 부인은 벽을 짚고서 숨을 고르기 바빴고, 안나는 그런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넬, 괜찮아? 물 좀 줄까?”

    그녀의 물음에도 넬 부인은 손을 휘휘 저으며 괜찮단 듯이 여유를 부렸다. 얼굴만 봤을 땐 터질 듯이 붉게 물들었으면서. 결국, 보다 못한 안나가 찬물을 넬 부인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물잔을 넬 부인은 거절하지 않고 냉큼 받아 단번에 비웠다.

    “후우……. 고마워, 안나.”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안나는 약간의 조바심을 얹어 물어봤다. 오랜 친구인 넬에게 당분간 자신의 일을 맡긴 게 후회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넬은 보기와 다르게 덤벙대는 구석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꼭 좋은 말로 하면 되는 일을 툭툭 쏘는 말투로 오해 사기 십상이니 걱정될 수밖에.

    “아, 그게……!”

    숨을 고른 넬 부인이 입을 떼려던 순간, 영롱한 청록색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야산에서 마주친 맹수처럼, 이채가 도는 바람에 넬 부인은 그만 입매를 어버버 대며 말을 뭉뚱그렸다.

    “아, 아니. 아니야.”

    “넬? 찬물이 얹힌 거야? 안색이 창백해.”

    안나는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손을 꺼내 넬 부인의 이마에 얹었다. 하지만 넬 부인은 몸을 뒤로 빼며 그녀의 손길을 거부했다.

    “아, 아니야. 괜찮아. 그, 저녁 정찬 준비해야 해서 이만 가 볼게.”

    넬 부인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대며 계단 아래로 도망쳤다. 안나는 그런 넬 부인의 뒤통수에 대고 조심하라고 이르며 언니처럼 다정하게 굴었다.

    둘 사이를 지켜보던 린느가 고개를 갸우뚱대며 ‘왜 저렇게 서두른담?’ 나직이 읊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힘을 줘서 그런가 등이 쑤시네. 넬 부인이라고 했나?’

    수많은 사용인 중 원작 소설에서 이름이 거론된 건, 하녀장인 안나 한 명뿐이었으니 넬 부인에 대한 정보는 무지했다. 다만…….

    ‘안나의 고향 친구가 함께 일하는 하녀라는 말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 츤데레 부인 말이야.’

    원작 소설에서 이름이 따로 서술되진 않았지만, 그 츤데레 부인이 넬 부인인 게 분명하다. 가까운 이들에게 잔소리가 심한 게 단점이지만, 그만큼 그녀의 대공저 사랑이 깊다는 증거였다. 대공저에 대한 사랑이 깊다는 건, 대공저에 존재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과 같았으니. 하녀장인 안나만큼이나 그녀를 따르는 사용인들도 많다.

    이에, 넬 부인과 오랜 기간 함께한 사용인들은 그녀의 틱틱대는 말버릇에도 그런가 보다 하는 실정이다. 예컨대, 막 수습을 마친 어린 하녀에게 “쇠꼬챙이처럼 마른 주제에 일을 한다고?”라며 타박하며, 하녀 손을 끌어 셰프의 방에 두고서 배가 터지도록 식사를 주는 게 보통 넬 부인 방식의 애정이었다.

    그만큼 친해지기 어려운 부류지만, 한번 친해지면 끈끈한 사이로 발전하는 성격일 테지. 린느는 넬 부인과 어떻게 친해지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미리안은 그런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그때, 린느가 조심스레 미리안과 시선을 맞췄다.

    “미리안 님, 저 케이크 제가 만든 거예요. 청포도도 직접 따 온 거니까, 버리면 안 돼요.”

    “직접……? 세상에….”

    미리안은 놀란 눈으로 케이크 상자와 린느를 번갈아 봤다. 저를 위해 사 온 거여도 감동인데, 린느가 손수 만든 케이크라니!

    ‘린느 님도 힘드실 텐데, 내가 뭐라고 케이크까지 만들어 주시고…….’

    미리안은 울컥 솟는 울음을 힘겹게 삼켰다. 며칠씩이나 린느에게 걱정을 끼쳤단 생각에 가슴이 답답할 만큼 미안하고 또 고마운 탓이다. 그때, 린느가 미리안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내려가 볼게요. 아, 맞다. 미리안 님! 내일 아침부터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거예요! 알았죠?”

    린느의 말에 미리안은 젖은 눈을 반달로 휘며, 빗물을 버금은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네! 린느 님!”

    * * *

    린느에게서 도망치듯 집무실로 들어섰다. 밀러는 책상을 정리하는 알렉스도 포함하여 집무실에 있는 사용인을 모조리 내보냈다. 오랜만에 일찍 쉬겠다는 들통날 거짓말로 둘러대며 말이다.

    ‘이상하군.’

    촉새 같은 귀족들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온몸이 뜨겁고 벅차오른다. 병세로 인한 숨 막힘은 물론 아닌데도 심장이 널을 뛰며, 벅차오를 만큼 요동을 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밀러는 의자에 털썩 기대어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옅은 불빛만을 키운 집무실은 고요하고도 잔잔했다. 그 속에 동화되어 밀러의 심장도 느긋한 척 얌전을 뺐다. 이제야 숨이 조금 쉬어졌으니. 밀러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약을 오래 복용하지 않아서일까? 언제쯤이면 내 몸이 내 몸이 될까. 그게 가능은 할까? 밀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한 술래잡기 게임이 아닌가. 그것도 자신과의 술래잡기. 그것도 누가 술래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도망만 쳐야 하는 꼴이라니. 개탄스럽다.

    그때, 그의 날카로운 금안에 초대장들이 보였다. 연회장. 그 지독한 연회 시즌도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더는 참석을 미룰 수 없으며, 그렇다 하여 아직 기본적인 수업도 하지 않은 그녀를 홀로 연회장에 보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 살쾡이들 앞에 린느를 던져 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뺨이 열을 잃자, 온몸에 약간에 찬기가 흘렀다. 밀러는 무심히도 담요를 집었다. 곱게 접혀 있는 담요에선 방금까지도 그가 맡았던 익숙한 향기가 흘렀다. 그게 뭐라고 당장 눈앞에 닥친 걱정이 사그라들었다.

    며칠 전, 세르트 영애가 집무실에서 한숨 늘어지게 자고 간 흔적이었다. 밀러는 노곤하게 잠든 린느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간 큰 여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앞에서 보란 듯이 잠든 여인은 온 세상을 통틀어 그녀가 처음이었다. 동시에, 아마도 마지막이지 않을까? 그녀의 그런 배짱이 귀여우면서도 잔잔하게 짜증이 치민다.

    ‘무얼 믿고 내 앞에서 그리 잠든 건지 아직도 모르겠군.’

    도대체 무얼 믿고? 아무리 제국의 대공이라지만, 대공은 뭐 사람이 아닌가? 사내가 아니냔 말이다.

    ‘섀르넌 앞이었으면 잠은 무슨. 그렇게 태평히 졸지도 않겠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리가 없을 테니까. 고로, 린느 뷔 세르트의 주장은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다시 뜨거워졌다. 아까와 비슷한 열감이었으나, 감정은 선명했다. 그래, 이건 짜증과 화가 분명하다.

    「저, 각하께 관심 0.1도 없다구요!」

    섀르넌이 공작저에서 주최한 연회장 테라스에서. 밀러는 고백한 적도 없는데 린느에게 이미 차였다. 그때는 뭐라 대답했더라?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밀러는 그녀의 새초롬한 청록색 눈동자만 기억났다. 건방진 청포도라며 면전에 대고 화를 냈던가? 부디 그러지 않았기를.

    ‘돌겠군.’

    밀러는 제 꼴이 우스워 탄식을 뱉었다. 그래, 나 역시도 그때만 해도 그대에게 관심 없었다. 죽든 살든, 젊은 부인들을 잡아먹는 스테빈스 백작과 결혼을 하든 말든, 세르트 자작저가 스테빈스의 탐욕으로 망가지든 말든. 내 역린이자 치부를 들추지 않는 이상, 그대가 어떻게 된다 해도 아무렴 상관없었다.

    하지만 가랑비가 옷깃을 적시듯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린느는 그에게 아주 상관이 있어졌다.

    그게 언제부터였냐 묻는다면, 밀러 자신도 모른다. 원래 가랑비가 무서운 이유가 그런 이유겠지.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앓도록 만드니까. 린느는 가랑비처럼 밀러를 앓게 했다.

    ‘…….’

    그는 마른세수를 마치자마자, 우아한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경한 기분들이 린느로 인해 그의 전신을 꿰뚫는다. 그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망할 감정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도 까마득한 탓이리라.

    ‘생각해 보니…….’

    그간 세르트 영애만 보면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가 말 한마디라도 붙이려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쓸데없이 대공저에 자주 초대했던 거 같기도 하고. 게다가, 어디 그뿐인가? 외부인의 출입을 엄중히 금지하던 부엌이나 써니룸에도 당연하단 듯이 그녀의 출입을 허가했다.

    ‘단단히도 홀렸군.’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망할 감정들을 어떻게 해야…….

    ‘젠장, 해 봤어야 알지.’

    이래서 섀르넌이 자신을 비웃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차올랐다. 그래, 섀르넌은 알고 있었어. 아무리 꼿꼿한 남자라도, 제국의 대공이더라도, 못 가진 것보다 가진 게 압도적으로 많은 남자라도. 결국은, 한 사람 때문에 이런 비루한 꼴을 보인다는 걸. 섀르넌은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젠장.’

    짜증스럽다. 화가 나고 억울하며 당혹스럽다. 차라리 황제에게 정신을 차리라며 뺨을 얻어맞는 게 나을지도 모를 만큼 당황스럽단 말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니, 바로 잡는다는 말이 맞으려나.’

    밀러는 밤잠을 뒤로하고 머리를 싸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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