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1화 (41/122)
  • @41화

    “이러다 정말 두 분 사이에 감정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하지만 각하께서 저리 곁을 주신 적이 없었잖아요. 미리안 님께도 저리 곁을 주신 적이 없으셨다고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둘 조합이 가당키나 한가? 황태자와는 사적인 자리에선 술잔도 나란히 부딪치는 밀러가 아닌가! 중년의 하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의 흥미겠지. 우리 각하 정도면 타국의 황녀님도 아쉬울 판에, 뭐가 아쉽다고 일개 자작가의 영애와? 하! 말도 안 돼. 게다가 세르트 영애? 참나.”

    말끝마다 한숨을 붙여 가며 착실히도 린느를 향해 눈을 부라리자, 빨래통을 들고 지나가던 루비가 그 하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어, 백작가예요. 세르트 백작가요. 자작이 아니라…….”

    “그거나 그거나! 루비? 어디 감히 여기에 껴? 네가 지금 여기에 껴서 노닥거릴 때니?”

    “아, 아니요. 노닥거리려는 건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넬 부인.”

    루비는 콧잔등을 찡긋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넬 부인이 그녀를 향해 귀찮단 듯 손을 내저었으니. 루비는 가던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루비는 착한 린느가 욕을 먹는 상황이 속상해 걸음에 절로 힘이 빠졌다.

    “어? 루비?”

    “아, 아가씨?”

    달팽이처럼 늦장을 부린 덕분에 린느가 루비를 알아차렸으니. 숨죽여 두 사람을 엿보던 넬 부인은 놀라 뒤로 넘어졌다.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용인들은 밀러에게 들킬세라 도망치기 바빴다. 넬 부인은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아닌 몸 개그로 루비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웃음을 꾹 참았다. 슬픈 생각. 그래, 슬픈 생각 하자, 제발. 루비는 헛기침까지 해 가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메리는 어디 있는지 알아? 종일 안 보이네.”

    그야 아가씨께서 대공저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신 탓이 아닐까요? 루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꾹 참았다.

    “아까 저와 함께 아가씨를 찾으러 다니긴 했었어요!”

    “아…. 그, 그렇구나. 아하하.”

    밀러는 린느의 눈동자에 넋을 놓고 있다가, 황급히 시선을 뗐다.

    “직속 하녀도 떼어 놓고 열심히 도망 다니느라 고생했겠어. 직속 하녀를 더 둬야겠군.”

    밀러는 자연스레 린느와 거리를 두며, 루비를 빤히 응시했다. 루비는 아주 어릴 적부터 대공저에서 사용인으로 일한 하녀다. 린느와도 또래니, 통하는 바가 있을 터. 게다가, 린느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활기찬 성격에 긍정적이며, 정도 많은 편이다. 거기에다 또래보다 영리하니, 린느 곁에 두면 분명 도움이 될 테지.

    “안나에게 말해 둘 테니, 앞으로 그대 역시 세르트 영애의 전속 하녀로 지내.”

    안 봐도 뻔하지. 루비라는 저 하녀도 린느처럼 쾌활한 성격이 얼굴에서부터 선명하게 드러났다. 밀러는 두 사람이 퍽 어울린단 생각에 실소를 뱉었다. 그때였다.

    툭.

    루비의 체구만 한 빨래통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제야 빨래통에 가려 있던 루비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고. 역시나. 루비는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선 채로 기절한 것처럼 루비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그녀가 호들갑 떨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허, 헉, 저, 정말요?! 저, 정말 열심히 일할게요! 아, 아니지. 영광입니다!”

    허술하다. 이럴 때는 격조 있는 인사말이 나와야 하거늘. 하지만, 루비의 진심이 밀러에게까지 닿았다. 이런 일에는 격식이나 표현보단 진심과 충성이 더 중요한 법.

    “세르트 영애, 그대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다시 돌려보내도 좋아. 아랫사람을 잘 다루는 것도 능력이지만, 필요 없는 인력을 내보내는 것도 능력이다. 잊지 마.”

    들뜬 분위기에 다소 냉수를 끼얹는 조언이긴 하다만, 그게 그의 최선이었다. 눈치 없는 심장이 쿵쾅거리며 밀러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으나, 그는 최선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히 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감사해요!”

    린느는 밀러를 향해 눈을 맞추고 생긋 웃었다. 밀러는 입술이 바싹 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그의 심장은 눈치도 없이 빠르고 깊게 파동을 일으켰고,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닿은 곳마다 덴 듯이 뜨거워졌다. 밀러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시게요? 아직 케이크가 이만큼이나 남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밀러가 어서 자리를 비워야 미리안에게 찾아갈 수 있기에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린느는 속에 없는 말을 하며 아쉬운 척 입술을 삐죽거렸다.

    밀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루비를 바라봤다.

    “저 케이크 그대로 포장해서 보관해 둬. 그리고.”

    밀러는 평소보다 더 굳은 표정으로 린느를 바라봤다.

    “내일은 빠지지 말고 집무실로 오도록.”

    그는 명령만 남겨 두고 써니룸 밖으로 향했다.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하얗던 그의 귓바퀴가 열기를 머금고 덥혀 있었다.

    밀러가 써니룸을 비우자,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사용인들이 탄성을 뱉었다. 케이크를 보관해 두라니! 사용인들은 서로의 팔뚝을 주먹으로 때려 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함께 지켜보던 넬 부인의 안색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안나에게 말해야겠어. 이대로 두다간 저 요망한 여우가 대공비 자리를 차지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다들 바보처럼 속고 있는 거야. 그러니 나라도 저 여우의 속을 탈탈 털어 봐야지. 어떻게 지켜 온 대공저인데!’

    넬 부인은 초조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허, 넬 부인!! 이, 이것 좀 잡아 주세요!”

    전등을 갈아 끼우던 하녀가 넬 부인을 불러세웠다.

    “세상에, 왜 네가 그걸 갈고 있는 거야?”

    “저, 저 떨어져요! 어서 잡아 주세요!”

    넬 부인은 미리안의 방문을 초조하게 바라보다가 결국 하녀가 올라선 사다리를 잡아줬다.

    “키도 쪼그마한 게 이걸 한다고 이러고 있어? 효율성이 너무 떨어지잖니.”

    “죄, 죄송해요. 하지만 다른 분들도 역시 바빠서요.”

    “하여간에! 안나가 자리를 비웠다고 이렇게들 해이해지면 돼?”

    넬 부인은 타박에 타박을 얹어 잔소리했고, 사다리 끝에 올라선 어린 하녀는 어설프게 전구를 만지작댔다.

    * * *

    밀러가 집무실로 향하는 것까지 확인한 후, 린느는 재빨리 셰프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있으면 저녁 정찬 시간이니 어서 미리안에게 다녀와야 한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혹여 오늘 시간이 안 되면 내일까지 보관해 드릴 테니 말입니다.”

    눈치 빠른 셰프 최고! 밀러가 린느의 뒤를 따라오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녀에게 청포도 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내줬다.

    “고마워요, 셰프님!”

    “하하하! 앞으로 언제든지 놀러 오십쇼!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모조리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대신에 셰프님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린느는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발랄하게 인사한 후에야, 미리안이 지내는 방으로 냉큼 걸음을 옮겼다.

    ‘문도 안 열어 주면 어쩌지? 모르겠다.’

    케이크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한 채, 계단을 황급히 올라갔다. 2층을 지나, 3층으로 올라섰을 때. 전구를 가느라 낑낑대는 하녀들을 지나쳐 미리안의 방문 앞에 섰다.

    “후우…….”

    똑똑.

    예상대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시죠?”

    안나의 목소리에 린느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어린 하녀인 척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거리를 가져왔습니다.”

    문 너머로 안 먹겠다는 미리안을 안나가 말리느라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그 문 사이로 안나가 놀란 눈으로 린느를 맞이했으며, 린느는 잽싸게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아, 아가씨?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아가씨라는 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미리안이 서둘러 린느를 바라봤다.

    “이거 제가 직접 만든 건데요…. 셰프님도 인정한 솜씨거든요? 이거만 주고 갈 테니까 내쫓지 말아 주세요. 네?”

    안나는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슬쩍 미리안을 바라봤다.

    “미리안 님 이대로 굶어 죽을 일 있어요? 내가 미운 건 알겠지만 저도 제 사정이란 게 있었어요. 미리안 님이 대공저에서 도망치려는 사정이 있듯이, 저 역시 제 사정이 있다구요.”

    “…….”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해요. 만약, 미리안 님이 제 입장이었어도 저와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세 사람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가로지르며 휭휭 불어 댔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바닥을 바라보며 울음을 참던 미리안이 입을 뗐다.

    “알아요. 그리고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안 그래도 마른 편이었건만. 며칠 사이에 미리안의 체구는 더 작아져 있었다. 앙상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저는…… 린느 님을 믿었어요. 린느 님만큼은 제 편일 줄 알고……. 응석을 부렸어요. 그래서 더 아팠고, 린느님이 미웠어요….”

    미리안은 얇은 어깨를 들썩이며 정말 응석을 부리듯 엉엉 울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린느가 탁자 위로 케이크 상자를 올려 두더니, 냉큼 미리안을 다독여 줬다.

    “응석 부려도 돼요. 하지만, 그만큼 절 믿어 주면 안 될까요? 제가 책임지고 대공저에서 탈출시켜 드릴게요!”

    미리안은 린느 품에 아이처럼 안긴 채로, 정말이냐는 물음을 되풀이했다. 그때마다 린느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확언했으며, 대신에 함께 식사를 먹어야 한다는 조건도 덧붙였다.

    “바로 식사하면 속이 상할 수도 있으니까, 수프를 먹는 게 좋겠어요. 저 케이크는 내일부터 드세요. 알았죠?”

    미리안은 울음에 찬 숨을 헐떡이며,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엄마 미소를 지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세 사람의 이목이 문에 집중됐다. 그들 중에서도 린느의 눈이 가장 크게 뜨였으니 눈치 빠른 밀러 탓이리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