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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0화 (40/122)
  • @40화

    밀러의 기다란 다리가 활기를 머금고 성큼성큼 내디뎌졌다. 다시는 린느를 두고 쥐라고 표현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말이다. 그가 대공저 로비로 들어서자, 열심히 쓸고 닦던 사용인들이 밀러를 향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그가 쌩하니 지나쳤다.

    쌩 지나친 것도 놀랍지만, 밀러가 향한 곳이 집무실이 아니라 부엌인 걸 알아챈 사용인들은 고개마저 갸웃거렸다.

    뚜벅.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셰프의 방을 빤히 노려봤다. 드디어 찾았다, 드디어! 밀러가 대공자 시절에도 이런 시답잖은 숨바꼭질은 한 적도 없건만! 대공이나 됐는데, 대공저에서 그것도 요망한 세르트 영애와 숨바꼭질할 줄이야! 헛웃음이 올라왔다.

    똑똑.

    당장이라도 셰프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채신머리없이 그런 예의 없는 짓을 할 순 없지. 밀러는 약간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잡고, 널찍한 어깨를 툭툭 털며 셰프의 대답을 기다렸다.

    “들어오세요.”

    말미에 그의 커다란 손이 넉넉하게 손잡이를 잡고서 열어젖혔다. 그러자 예쁘게 포장까지 마친 케이크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린느와 딱 마주쳤으니. 린느는 저승사자라도 본 사람처럼 깜짝 놀라 숨을 들이쉬었다.

    “각하!”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다고 하기엔 꽤 오래 헤매기는 했다만. 아무튼, 이럴 줄 알았다. 밀러는 타박하듯 린느를 빤히 바라보더니, 금세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만약 그녀가 먹을 디저트라면 이렇게 정성스레 포장하지도 않았겠지. 섀르넌에게 줄 선물이라면 몰라도.

    “……이게 뭔가?”

    밀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사나워졌다. 그러자, 셰프는 입을 꾹 다물고서 괜스레 뒷정리하는 척 시선을 피했다. 따스한 온기마저 차게 식힐 만큼, 밀러의 표정 하나 목소리 하나 모두가 다 얼음장처럼 냉랭했다. 하지만, 그의 냉기에도 린느는 동요조차 하지 않았으니.

    “아, 너무해요. 깜짝 선물로 주려 했는데……!”

    순간, 밀러의 짙은 눈썹이 크게 움찔했다.

    “나한테 말인가?”

    “네.”

    “술과 거짓말은 할수록 는다더니. 그대의 거짓말도 늘었나 보군.”

    “아닌데. 정말이에요.”

    린느는 흰 케이크 위로 청포도가 얹어진 걸 가리키며 말했다.

    “각하께서 청포도 케이크를 좋아하신다면서요? 그래서 청포도 케이크를 한 거예요.”

    물론, 잔소리 방지용 뇌물에다가, 미리안 주려다가 만든 케이크지만……. 어쨌든, 밀러에게도 주려고 한 건 맞으니까……! 린느는 너스레를 떨며 자연스레 밀러에게 케이크 상자를 들려줬다.

    “이틀 동안 땡땡이치기도 했고……. 아무튼 각하 드리려고 만든 거니까 좀 믿으세요. 맨날 속고만 사셨나.”

    괜스레 타박하며 말을 얹었지만, 밀러는 자리에서 언 채로 제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만 바라봤다. 고장이 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그의 시선은 케이크에 멈춰 있었다.

    “아가씨께서 실력이 출중하여 제가 도와드릴 것도 없었습니다. 아주 아주 인재이십니다!”

    “에이, 제가 또 실력이 조오금 있긴 하죠.”

    학창 시절부터 빼빼로 데이마다 직접 만든 수제 빼빼로를 반 친구들에게 돌리지 않았나. 게다가 고등학생 때는 아주 전공을 살려 관련 과로 진학했으니, 이쯤이야.

    “배운 적도 없으신데 이 정도 실력이라면, 웬만한 셰프들은 직장을 잃을 겁니다! 하하하!”

    “아이, 또 너무 띄워 주시네요.”

    린느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도 쉐프의 칭찬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뭐든 간에 고맙다.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며칠 전 그가 보여 줬던 미소보다도 더 환한 미소였다. 그 탓에 린느는 마음이 조오금 불편해졌다.

    ‘이렇게 좋아해 줄 줄은 몰랐네. 괜히 미안하게…….’

    케이크 줘 봐야, 고맙단 소리는 됐고 잔소리나 들을 줄 알았건만. 예상치 못한 밀러의 반응에 린느 역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밀러가 조심스레 물었다.

    “써니룸에서 함께 먹지.”

    “…아, 네!”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은 제안이었다. 두 사람이 쭈뼛거리며 주방 밖으로 나서자, 셰프는 재빨리 숨겨 둔 남은 청포도 케이크 상자를 안전한 곳에 보관했다.

    * * *

    써니룸까지 원래 이렇게 멀었던가? 린느는 힐끔거리며 밀러의 안색을 살폈다. 메이드복을 뺏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메이드복을 입고 활보했냐며 혼나고도 남을 상황에 허락도 없이 뒷마당에 다녀온 것도 잔소리 듣고도 남을 상황이 아닌가.

    물론 청포도 케이크로 화가 풀린 거 같긴 하다만…. 그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나 통할 일이지. 공과 사가 기름과 물처럼 철저한 남자에게 그깟 케이크 선물로 이 모든 말썽을 무마할 순 없으리라.

    ‘하, 주방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아까는 너무 놀란 탓에 숨만 들이쉬었지만, 사실 밀러와 마주치자마자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의 성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청포도 케이크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역시 밀러다운 날카로운 질문이로군. 린느는 뻐근한 웃음을 숨기며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그걸 말씀드리면 재, 재미가 없죠!”

    미리안에게 선물하려다 셰프 말에 급하게 밀러 것도 추가했다는 사실은 숨겨 두기 위해 대충 얼버무렸다.

    물론, 이 똑똑한 남자가 그냥 넘기겠냐마는…….

    “그런가……. 알겠다. 더는 물어보지 않지.”

    이게 통한다고? 린느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당혹감을 감추려 애썼다. 원래 이렇게 유한 남자였던가? 절대 아닌데……. 심지어 저녁 정찬 전에 디저트도 안 먹는 그가 아닌가. 린느의 예상을 보기 좋게 간파당했다.

    “커피?”

    “네? 네네.”

    써니룸으로 들어서자, 멀찍이서 초록 잎 식물에 물을 주던 하녀가 총총 뛰어왔다. 밀러는 웃음기를 금세 지우고서 커피를 주문했고, 하녀는 금세 또다시 써니룸 밖으로 뛰어나갔다.

    “샹들리에를 켤까?”

    “괜찮아요.”

    “지금은 괜찮겠지만, 곧 노을이 지면 어두워질 텐데.”

    다정한 걱정이었지만, 그의 무심한 말투에 가려졌다. 차마 린느의 입으로 밀러와 같이 있어서 괜찮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그, 괜찮아요. 어차피 누가 와도 각하께서 다 때려눕혀 주시겠죠.”

    “내가……?”

    “네, 각하께서요.”

    “그런 일은 없겠지만, 침입자가 들어온다면…….”

    상상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감히 대공저를 들쑤신 것도 모자라, 이 여인까지 화를 입을 걸 생각하니 잔잔하게 열이 올랐다. 그것도 잠시, 그녀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 케이크를 보자마자 노기가 금세 풀렸다.

    “세상에. 대공가의 가신인데 지켜 주기야 하겠지, 라니요? 꼭 지켜 주셔야죠.”

    뇌우가 대공저 전체를 뒤흔든 그날처럼요. 린느는 뒷말을 삼켰다. 괜히 해 봐야 하등 도움 될 게 없는 말일 테니까. 밀러는 어쨌든 미리안만 원할 테고, 미리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방에 갇혀 있을 텐데…….’

    어서 케이크를 가져다주고 싶지만, 서두르면 안 된다. 이 눈치 빠른 남자가 모두 알아차릴지도 모르니까. 린느는 한숨을 삼켰다.

    “그래, 내가 그대를 지켜 줄게. 하지만, 그대도 약속 하나 해.”

    지켜 준다는 말에 한 번, 약속이란 말에 두 번. 린느는 사정없이 쿵쾅대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그것도 잠시. 약속이란 말에 긴장되어 린느는 조심스레 밀러를 올려다봤다.

    “내가 그대를 매 순간 지켜 줄 수는 없어. 그러니 그대도 그대를 지키기 위해 내일부터는 집무실에 나와. 그게 곧 내가 그대를 지키는 방법 중 하나니까.”

    “…안 그래도 내일부터는 나가려고 했어요.”

    “그래, 다행이야. 나도 오늘까지만 참으려 했거든.”

    밀러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고, 타이밍 좋게 커피잔이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예쁘게 포장된 케이크 상자가 자리했으니. 커피 향과 달달한 케이크 향이 써니룸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정말 셰프의 말대로 그대가 만든 케이크인가?”

    밀러는 케이크 상자 끝을 조심스레 잡아, 손수 케이크를 꺼냈다. 모양새가 말끔한 게 디저트 가게에서 당장 판매해도 이상할 게 없는 퀄리티가 아닌가. 밀러는 그를 위해 만든 케이크를 제국의 보물처럼 닳을까 조심히 만졌다. 표정은 위엄 있었으나, 그의 손끝은 초짜 조각가처럼 어수룩했다.

    “그럼요. 맛도 좋을 거예요.”

    보조 셰프로 일도 했었으니, 맛도 무리는 없겠지! 린느는 방긋 웃으며 밀러에게 포크를 쥐여 줬다. 그래, 달달한 거 먹고 기분 풀란 말이야. 라고 말하듯이 린느는 그의 포크질을 재촉했다. 밀러는 케이크 모양이 망가질까 조심히 덜어, 한입 머금었다.

    “맛있죠?”

    린느는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밀러를 올려다봤다.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 짓게 하는 미소에 밀러는 입에 물린 케이크를 잊고 그녀의 눈동자에 흠뻑 빠졌다. 그 커다란 몸이 굳고, 심장이 요동을 쳤다.

    케이크뿐만 아니라, 그녀가 선사한 이 미소가 더 달콤하다고 고백할 만큼 황홀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이의 미소라서 이처럼 달콤한 걸까? 그래서, 미리안도 섀르넌도 린느에게 홀려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밀러는 제 꼴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올라왔다.

    이 감정이었구나. 그녀와 시선이 닿을 때마다 가슴팍이 울렁거리는 이 느낌. 그 생경한 감정에 밀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맛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고작 나온 말이라곤 흔해 빠진 칭찬이었다. 린느는 그의 안색을 잠시 살피더니, 다시 배시시 웃었다. 어차피 칭찬할 거라면 더 성의 있게 해 달라며 투덜거렸다.

    밀러는 말없이 그녀의 손에 포크를 쥐여 줬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눈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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