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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39화 (39/122)
  • @39화

    “아, 저기……. 음? 분명, 저기 청포도밭에 계셨는데…….”

    밀러는 헛웃음이 올라왔다. 분명, 소란스러운 틈을 타 도망간 게 틀림없을 테지!

    ‘감히 내 저택에서 도망을 가다니, 세르트 영애다운 생각이군.’

    밀러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부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러자, 인부는 이맛살까지 접어 가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제 손은 더럽습니다, 각하.”

    말미에 밀러의 손이 거침없이 인부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그의 탄탄한 어깨를 툭툭 두드리기까지 했으니. 그 모습을 보며 사용인들은 그만 탄성을 뱉었다.

    “그대들의 손이야말로 진정 깨끗하고 존귀하다. 정말 더러운 손은 따로 있으니, 앞으론 그대들의 손을 더럽다 칭하지 말라.”

    명령하는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으나, 품은 뜻은 지극히 따듯했다. 그 탓에 인부들은 때아닌 눈물바다를 이뤘다. 밀러가 뒷마당을 벗어날 때까지도 그들은 허리를 숙여 배웅했다.

    달칵.

    뒷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밀러는 자신의 오른손을 빤히 바라봤다. 악수하는 동안에도 인부는 제 손에 묻은 흙이 밀러의 손에 닿을까 어정쩡하게 잡는 척만 했고, 밀러는 그의 손을 잡기 위해 더욱 뻗었으니. 때아닌 술래잡기였다. 그리고 농부의 뜻대로 밀러 손엔 작은 흙도 묻어 있지 않았다.

    ‘증세도 많이 나아졌으니 앞으론 뒷마당도 신경을 써야겠군.’

    뒷마당에 나가는 걸 두고 외출이라 표현하기엔 민망하지만, 밀러의 불안 증세가 극도로 치달았을 때는 뒷마당에 나가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 탓에 뒷마당에 직접 나가 그의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고작 일 년에 두 번이 다였다.

    밀러는 오른 주먹이 희게 질리도록 힘을 줬다. 이대로만 상태가 호전된다면, 평생 그의 목을 옥죄는 목줄을 잘라낼 수 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다. 밀러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 말괄량이부터 찾아야 하니까.

    * * *

    “어머, 아가씨? 여기서 뭐 하세요?!”

    “쉬쉿!”

    하녀장에게 메이드복 뺏긴 지 얼마나 됐다고, 린느는 또 다른 메이드복을 입고서 나타났다. 그것도 앞치마에 잘 익은 과일들을 담은 채로.

    “허, 뒷마당에 다녀오신 거예요?”

    “네. 아, 셰프님 안에 계셔요? 제가 정말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셰프님이야 늘 계시지요. 다만…….”

    루비가 입술을 뜯으며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디저트를 만들어서 미리안 님께 가시려는 건 아니죠?”

    대공저에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건가? 린느는 흠칫 놀라며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요. 그리고 말씀 놓으세요!”

    “아, 맞다. 헤헤……. 루비라고 했지?”

    순간 루비의 눈동자가 크게 뜨이더니, 기쁨에 찬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당연하지! 루비는 기억하지!”

    “가, 감사해요!”

    루비는 귀여운 강아지처럼 눈꺼풀을 마구 깜빡이며, 방긋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루비…… 어쨌든 미리안 님이 내게 실망하신 건 맞잖아. 너도 알다시피.”

    루비는 돌연 웃음기를 지우고 난감하단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물론, 린느가 이 과일로 디저트를 만들어 미리안을 찾아간다 해도 루비가 난감할 건 없다.

    “솔직히요…. 아가씨께서 미리안 님 때문에 각하께 잔소리라도 들으실까 봐 걱정이에요. 저야 눈감아 드리면 그만이지만…….”

    루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오른발 끝으로 바닥을 슥슥 문질렀다. 그 모습에 린느는 미간을 좁혔다.

    “뭐야, 루비이. 나 완전 감동받았잖어. 나 혼날까 봐 막은 거였어?”

    “그럼요……. 각하께서 화나시면 얼마나 무서운데요.”

    “아, 진짜 어쩌면 좋아. 너무 귀염뽀짝하잖아? 완전 꼭 안아 주고 싶은데 내 옷이 너무 더러워서 안 되겠다. 루비, 나중에 드레스로 갈아입으면 한 번 꼭 안아 줄게!”

    바닥만 바라보던 루비의 시선이 린느에게 닿았고. 눈이 안 보일 만큼 활짝 웃음 지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 이거 하나 먹을래? 친구들이랑 나눠 먹어. 두 송이밖에 안 되지만.”

    린느는 청포도 두 송이를 루비에게 안겨 준 후에야, 셰프가 지내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 와중에도 루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린느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 너머로 활기찬 노래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린느는 저도 모르게 목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문을 열어젖혔다.

    “셰프님!”

    들어와도 좋다고는 했지만, 문을 뜯을 기세로 활짝 열어젖히라고 한 적은 없는데……. 쉐프는 놀란 눈으로 린느를 바라봤고,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혹시 세르트 영애이십니까?”

    “네! 어머 메이드복을 입었는데도 바로 알아보시네요?”

    “세상에! 안나가 이를 알면 또 난리가 나겠군요! 하하하!”

    셰프는 호탕하게 웃으며 눈가를 스윽 닦았다. 며칠 전, 안나의 한탄이 떠오른 탓이다.

    「아가씨요? 제 생각보다 나쁜 분 같지는 않았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메이드복까지 입고 부엌에서 일하실 리가 없잖아요? 문제는 그걸 각하께 들켰다는 거겠죠.」

    「이런! 하하하! 각하께서 뭐라 하셨나?」

    「당장 메이드복부터 뺏으라 하셨죠. 하……. 아가씨께서 이전의 과오 때문에 더 노력하시는 건 알겠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 혹시라도 셰프님께 찾아와 일을 달라 하시면 절대 안 된다 하셔야 합니다. 알겠죠?」

    미안, 안나. 그 약속은 못 지킬 거 같아. 셰프는 하하 웃으며 의자를 내왔다.

    “일단 여기에 앉으시지요. 아유, 설마 뒷마당까지 직접 가서 따 오신 겁니까?”

    “그럼요! 부탁을 드리려면 제가 직접 재료는 가져와야죠.”

    “허허…….”

    이렇게 재료까지 직접 가져왔는데 어떻게 내쫓겠어, 안나. 미안하다! 셰프는 사람 좋게 미소 지으며, 싱싱한 청포도를 건네받았다.

    “한데, 각하께서 청포도 케이크를 좋아하시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각하께서요?”

    “네! 아, 각하께 드릴 디저트가 아닌가 보군요.”

    그렇긴 하다만, 밀러에게 잔소리를 덜 먹으려면 이 정도 정성은 보여야 하지 않을까? 계획을 바꾸자.

    “혹시 이 정도 양으로 청포도 케이크 두 개 가능할까요, 셰프님?”

    “아유, 그럼요. 충분하다마다요! 그럼 제가 케이크를 만들어 둘 테니 올라가서 쉬고 계십시오.”

    “쉬긴요! 저도 옆에서 거들게요.”

    순간 셰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귀족가의 영애가 일을 거든다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30년을 넘게 황실 전속 셰프로 일을 하며 온갖 귀족들의 계략을 봐 오지 않았던가. 그런 일에 염증을 느껴, 대공가의 전속 셰프로 일자리를 바꿨으니 말 다 했지. 만약, 때마침 밀러가 이직을 권하지 않았더라면, 셰프를 관두고 농사를 지을 참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가 막 황실 제빵소 사용인으로 발탁됐을 때만 해도, 어제는 황후를 죽여 달라며 약병을 들이미는 귀족이 있는가 하면, 오늘은 황후가 약병을 가져와 후작을 죽여 달라 하기도 했으니. 어릴 적부터 볼 꼴 못 볼 꼴을 보고 지낸 그였기에 이 상황이 더욱 와닿지 않았다.

    “그,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제 일을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네! 저 사실, 셰프님 팬이에요.”

    패, 팬?! 셰프는 반죽 준비를 하다 말고 멈칫했다. 팬이라고? 팬?

    “저희 백작저 셰프님의 솜씨도 엄청나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영지 내에서 백작저 셰프님이 최고구나 했는데 웬걸. 대공저 셰프님의 솜씨는 천상계라구요. 덕분에 매일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으니, 팬이 될 수밖에 없죠!”

    아아…… 이 작은 천사가 하는 말을 홀로 들어야 한다니. 가슴팍이 미어지게 아쉬웠다. 쉐프는 울음 섞인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여한이 없습니다. 그간 수모를 견디며 일한 보람이 이렇게 찾아오는군요.”

    셰프는 목소리를 잘게 떨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황실 전속 셰프라는 이력이 그를 화려하게 빛내 주지만, 그 화려함 뒤에 추악함이 얼마나 많았던가. 수년 전에는 황태자가 황제를 죽이고자 음식에 독약을 넣었고, 그 일로 셰프는 손목을 잘릴 위기까지 처했었다.

    만약, 현 황태자이자, 그 당시 2황자였던 카를리안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그의 요리 인생도 그걸로 끝이었을 테지! 어디 요리 인생만 끝이겠는가? 인생이 아주 끝나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다행히, 카를리안 황태자 덕분에 그의 누명이 말끔히 씻겼고 손목도 지킬 수 있었지만. 고된 고문으로 한동안 자리를 보전해야만 했다. 물론, 황제를 죽이고자 했던 황태자는 1황자로 강등되고, 유폐되어 죽은 사람처럼 지내긴 하지만……. 아직도 그때 그 기억이 악몽으로 둔갑하여 숨을 옥죄기도 한다.

    그 탓에 그는 자신의 그릇에 넘치는 명예로 인생을 망친 게 아닐까 하는 후회도 했다. 하지만 그런 후회가 싹 가셨다.

    ‘그래, 이거면 됐어. 잘 버텼다.’

    셰프는 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를 스윽 닦아 냈다.

    “아시다시피 오븐은 아주 위험합니다. 잘못하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지요. 그러니, 제 말만 잘 따라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그럼요!”

    린느는 입이 가려웠다. 자기 역시 제과제빵 자격증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

    * * *

    대공저가 넓다는 건 제국의 꼬마도 알 테지. 하지만, 이렇게 넓었던가? 아니면 숨어든 린느가 조그마한 걸까? 밀러는 온실과 앞마당, 동쪽 별채까지 뒤졌지만, 소득은 없었다.

    ‘……쥐새끼라고 놀린 대가인가. 정말 쥐가 된 건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군.’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더니, 오만이었다. 의상실, 오페라 극장, 연회장에서 마주칠 때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여겼건만. 이젠 오기마저 생길 참이었다. 밀러는 다시 대공저 로비로 향하며, 대공저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밀러의 고운 미간이 잘게 쪼개졌다.

    ‘아직 저녁 정찬 준비시간까지 멀었는데, 오븐은 왜 사용하는 거지?’

    그것도 부엌 굴뚝도 아니고, 쉐프의 방과 연결된 굴뚝이 아닌가. 밀러는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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