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내 기억으론 그대 역시 나와 한동안 집무실을 함께 썼던 거로 기억한다만.”
“맞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다르고 대상이 다르지 않은가. 알렉스야 밀러와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 온 사이이고, 성별도 같지 않은가. 하지만, 린느는…….
“그럼 문제없지 않나?”
문제야 아주 많지! 린느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알렉스를 향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동요하지 말고 안 된다고 하라는 무언의 부탁이었으나.
“그, 그럼요! 문제라니요. 문제 될 게 없죠.”
망했다. 린느는 미간을 파르르 떨며, 억지로 입만 웃었다. 세상에, 제국에서 가장 엄한 사람 옆에서 일하란 소리야? 그것도 후계자 수업을?
‘미쳤다. 난 이제 죽었어.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진짜 밀러 곁에 눌러앉아서 일만 하게 생겼다고.’
어깨를 바닥까지 떨어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린느는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간간이 고개만 끄덕였고, 그런 그녀를 보며 밀러는 웃음을 참았다.
“아, 공작은 복도 반대편에 있을 테니, 알렉스 그대가 배웅해줘. 난 할 일이 많아서.”
“네, 각하!”
알렉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할 일 없어 보이는데…….”
“내 할 일을 그대가 어떻게 알고?”
“저어, 그냥 집무실 내어 주시면 안 돼요? 너무하잖아요…….”
밀러는 뭐가 너무하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가볍게 턱짓했다.
“황제 폐하께서 각하께 자기 집무실에서 일하라고 명령하시면 좋아요? 숨 막혀서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전혀. 난 황제 폐하가 곁에 있어도 내 할 몫은 다 한다.”
“그야 그건 각하께서 워낙 강심장이고 잘나셨으니까 가능한 거구요. 전 일개 백작가의 영애라구요.”
타박하듯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반복하자, 밀러는 고개를 잘게 내저었다.
“내 가문의 가신 정도면 그 정도는 웃으면서 해야지.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저, 학구열이 높으신 건 알겠지만. 저는 그냥 편하게 살고 싶어요. 피둥피둥 놀고먹는 백작이 제 꿈이라구요.”
“그렇게 피둥피둥 놀고 싶다면, 기본은 다져 놓고 놀아야 할 터. 정말 그대 생각처럼 피둥피둥 놀았다가는 그 많은 재산도 거품이나 다름없다.”
“전 도박도 안 하고, 술도 뭐, 조금 좋아하긴 하지만 적당히 마실 예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피둥피둥 놀아도 전 재산을 날리는 일은 없어요.”
“말대꾸는 제국 최고라지.”
밀러는 뒷짐을 지며, 날랜 눈으로 린느를 째려봤다. 평소라면 그만 입을 다물고, 그의 말에 동조해 주겠지만. 밀러가 이렇게까지 후계자 교육에 진심인 줄 알았으니,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않은가.
“아무튼, 저는 그렇게 못 해요. 하고 싶어도 못 한다구요.”
그녀의 투정 어린 말에 밀러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는 그 금빛 눈동자엔 약간의 당혹감마저 서려 있었다. 제국의 법이 바뀐 지도 벌써 여러 해이거늘. 아직도 귀족법에 대해 이렇게 무지할 수가 있나?
“낙과한 사과보다도 더 많은 게 귀족이라 했고. 현 황제 폐하께서 법을 바꾸셨지. 귀족들 또한 매년 시험을 보고 적당한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봉급을 30%로 줄이겠다는 법 말이다. 고로, 능력이 없으면 30%에 해당하는 봉급만 받으며 살아야 한다.”
이야, 산 넘어 산이라더니, 그 꼴이 딱 이거네. 물론 좋은 법이긴 하지만 린느에겐 악재나 다름없어 헛웃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래도 30%라도 주는 게 어디인가! 밀러는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린느의 눈을 들여다보듯 바라봤다.
“보아하니, 봉급 30%만 받고 후계자 수업을 미루겠다는 표정이군. 참고로 가신의 봉급도 함께 삭감된다. 그러니, 헛된 생각은 그만둬.”
린느는 그의 통찰력에 흠칫했다. 눈치가 빠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속을 들킬 줄이야. 밀러는 고개를 잘게 내저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황제 폐하께서 법을 개정하시면서 귀족들에게 시험만 보도록 했겠나? 당연히 귀족들의 봉급도 대폭 낮췄을 거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할 텐데. 그대처럼 봉급 30%만 노리는 귀족들 때문에 말이지.”
“……아, 알아요. 그냥 그 사실을 믿기 싫은 거였어요…. 망했어.”
린느는 선잠 깬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삼키느라 애썼다.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후계자고 뭐고 그냥 동생에게 물려주고 재산만 받으면 안 되나? 세상에, 현생에 치여서 빙의했더니 시험을 보라고? 말도 안 된다, 정말.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에 억울해 죽겠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기 바쁘자, 밀러는 입술을 꾹 눌러 웃음을 참았다. 한편으로는 피둥피둥 놀고먹을 궁리나 하는 이 말괄량이를 책상 앞에 어떻게 붙여 놓아야 하나 걱정도 앞섰으니. 앞으로 넘을 산이 수두룩했다.
* * *
린느의 책상이 밀러의 집무실 한편에 마련되는 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치, 가구 상인이 대공저 앞에서 책상을 들고 기다린 것처럼 재촉할 틈도 없이 배달됐으니까. 문제는 린느였다.
쿵.
대공가의 인장이 쿵쿵 박힐 때마다, 알렉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더불어, 텅 빈 린느의 책상을 곁눈질하며 안절부절못했으니. 또, 린느가 알렉스를 따돌린 게 틀림없었다.
“오늘은 또 무슨 핑계로 세르트 영애는 안 보이고 그대만 왔나?”
“필요한 책이 있다 하셨는데…….”
벌써 이틀째 땡땡이다. 밀러는 말없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텅 빈 린느의 책상을 바라봤다.
“이럴 줄은 진작 알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니 당황스럽군. 내 집무실에 책상까지 들여 줬더니, 대놓고 자리를 비울 줄이야.”
제국에서 밀러를 바람맞힌 사람은 린느가 최초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알렉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제가 당장 가서 모셔 오겠습니다.”
말미에 밀러의 커다란 손이 알렉스의 행동을 저지했다.
“내가 갈 테니, 그대는 미리안의 상태를 보고하도록.”
“예, 예!”
알렉스는 다리가 보이지 않게 후다닥 뛰어나갔다. 밀러는 알렉스가 집무실 밖으로 나선 걸 확인하고서야 서둘러 겉옷을 어깨에 둘렀다. 왠지 모르게 들뜬 표정이었다.
그의 기다란 다리는 이미 갈 곳을 아는 사람처럼 여유로웠으며, 밀러의 입꼬리는 숨바꼭질의 술래라도 된 것처럼 비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다만, 걸리면 죽을 수도 있을 법한 잔악한 미소였다.
“이틀이면 많이 봐줬지.”
그의 낮고도 낮은 목소리가 환한 복도를 잔잔하게 울렸다.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지나치는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여 밀러에게 인사하자, 밀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일 년에 두어 번을 제외하고 그가 직접 뒷마당에 갈 일이 없었으니, 사용인들은 초조한 낯으로 그런 밀러를 바라만 봤다.
커다란 아치형 문을 여러 개 지나치고 나서야, 뒷마당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보였다. 며칠 전, 한바탕 소낙비가 내린 후로 내내 날씨가 좋았으니. 린느가 있을 법한 곳은 뻔했다.
“뒷마당 오두막에서 여신처럼 피크닉이나 즐기며 쉬고 있겠지.”
대공저 뒷마당에서 자라는 과실들이 어디 적당히 달던가? 꿀보다 단 게 대공저에서 자라는 과실들이 아니던가. 그는 확신에 찬 걸음을 옮겨,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허리를 굽혀 밭일하던 사용인들이 그를 발견하고서 자리에서 얼었다.
“더위를 먹었나……. 설마, 저분 우리 각하는 아니시지?”
“마, 마, 맞는 거 같은데요?”
“에이, 아직 오실 때가 아니구먼 무슨 소리. 우리 각하께서는 매년 3월과 10월에만 오시지 않던가?”
“아, 아, 아니 맞다니까!”
평화롭던 밭에 전쟁터 한복판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자, 밀러는 그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쓸데없는 소란은 피우지 말라는 그의 배려였으나…….
“이리 오라는 말씀이겠지요?”
“뭐 하나! 어서 다들 모이지 않고!”
밭 여기저기에서 열심히 일하던 인부들이 허겁지겁 뛰어나와 밀러에게 향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선 밀러는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 각하!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무,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허겁지겁 뛰어온 인부들의 표정은 퍽 진중하기까지 했으니. 밀러는 그런 그들에게 세르트 영애를 찾으러 왔다는 말을 하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자신들의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시간을 뺏었으니, 적어도 그런 사소한 일로 불러세워선 안 된단 생각 탓이다.
“…잠시 들렀다.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인부들은 입을 가리고서 감동으로 눈을 적셨다. 목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닦으며, 젖은 눈을 숨기기 바쁜 인부도 있었으며, 자리에 주저앉아 앞치마로 눈물을 닦는 부인들도 수두룩했다.
고작 노고를 치하한다는 말 한마디에 눈시울을 붉히다니. 밀러는 모래를 머금은 듯 입 안이 꺼끌꺼끌했다. 그간, 자신이 너무 뒷마당을 책임지는 사용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자책감 탓이다.
사용인 중에서 가장 나이 지긋한 인부가 모자를 벗어 가슴팍에 내더니, 상체를 푹 숙였다. 그의 머리칼은 백발에 가까웠으나, 햇살에 그은 피부 아래로 잔근육이 자리해 긴 세월 노동의 흔적이 멋스럽게 배어 있었다.
“각하께서 이토록 저희를 챙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해 준 것도 없거늘.”
인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아침에도 세르트 영애를 저희에게 보내 주시어 노고를 치하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가씨께서 보기엔 그래도 청포도 수확을 야무지게 도와주셨답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청소도 재미있다더니. 린느가 딱 그 짝이었다. 뒷마당에서 피크닉이나 즐길 줄 알았더니, 일을 도와줬다니 의외였다.
그 조그마한 손으로 무슨 밭일을 한다고! 밀러의 금안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