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제야 요망스럽게 말대꾸를 해 대던 섀르넌의 입이 다물렸다. 그의 다물린 입을 확인하고서야 밀러는 다시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고, 섀르넌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에이, 첫사랑이라 하기엔 무리죠. 고작 7살 공자 시절 이야기인걸요.”
섀르넌은 가볍게 걸음을 재촉하며 밀러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나이는 상관없어. 진심이냐 아니냐의 문제이지.”
“7살의 진심이 뭐 얼마나 진지하다고 그러십니까?”
“그야 난 모르지. 섀르넌 그대만 알 테니까.”
밀러는 히죽거리는 섀르넌에게 조소하며 못을 박았다. 그의 잔악한 조소에 섀르넌은 또다시 입이 다물렸다. 어쩌면 밀러가 과묵한 성격이라 다행일지도 모를 테지. 말 한마디에도 이렇게 얄미운데, 그가 말까지 많았더라면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제국민들마다 밀러에게 한마디씩 꼬집혀, 매년 대공 각하께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임 같은 게 열렸을지도 모른다. 섀르넌은 말문이 막힌 채로 밀러의 뒤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섰다.
두 남자가 저택에 발을 딛자마자 흐릿하던 하늘에서 비가 와락 쏟아졌다. 그러자 흐릿한 하늘이 금세 거멓게 물들었고, 아직 대낮이라 불을 밝히지 않은 대공저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세르트 영애에게 비를 맞히려 한 게 틀림없군. 이런 날씨에 산책은 무슨.”
“산책은 핑계였죠. 각하께서 자꾸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시니까요.”
밀러는 대답 대신 걸음을 재촉했다. 이전에도 둘만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절대 내어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각하? 어딜 가시는 겁니까?”
밀러는 섀르넌의 물음을 간단히 무시하고, 바닥을 쓸던 사용인에게 물었다.
“알렉스 어디 있나?”
“2층에 계실 겁니다. 제가 데려올까요?”
“됐다.”
밀러는 중앙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영문도 모르고 섀르넌 역시 그의 기다란 다리로 밀러의 뒤를 따랐다. 좀처럼 걸음을 재촉하는 그가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서두르는지!
“각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리고 여긴 3층인걸요?”
“왼쪽으로 가. 난 오른쪽으로 갈 테니까.”
알렉스가 2층에 있다면 린느와 함께 있는 걸 테고, 함께 있단 걸 보니 린느는 안전하다. 하지만, 린느는 늘 예상을 뛰어넘는 여인이 아닌가. 3층부터 살핀 다음 알렉스에게 가 봐도 늦지 않을 테지.
섀르넌은 영문도 모르고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밀러 역시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모조리 닫혀 있는 문에 밀러는 조바심이 일었다. 앞으로 대공저를 환하게 밝혀 두라 집사장에게 일러 두긴 했으나, 그건 저녁일 때만이었다.
대낮에는 창문께로 햇빛이 들어오고, 린느 역시 밝은 곳만 다니니 걱정할 게 없으리라 여겼던 게 문제였다. 오늘처럼 갑작스레 소낙비라도 내리면, 대공저는 무덤 속처럼 어두워지지 않던가. 밀러는 손바닥에 땀을 쥐며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때, 바깥에서 하늘이 찢어지듯 천둥소리가 울리자, 어디선가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덜컥.
문을 열어젖히자, 분홍색 드레스 자락이 책상 밑으로 빼꼼 나와 있었다.
“린느!”
“꺅!”
겁에 질린 청록색 눈동자가 밀러와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게 느려진 듯했으며, 그의 널찍한 가슴이 쿵 하며 내려앉았다.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에서 진득한 죄책감이 올라온 탓이리라.
그녀의 흰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고, 두 다리는 이미 풀렸는지 일어나지도 못했다. 마치, 밀러처럼 그녀 역시 숨쉬기 버거운지 작은 숨통만 헐떡였다.
달칵.
그가 재빨리 불을 켜자, 린느는 그제야 숨을 할딱이며 몰아 내쉬었다. 밀러는 그 커다란 몸을 숙여, 린느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리하지 마라. 의원을 불러올 테니 일단…….”
린느의 손이 거칠게 밀러의 소맷귀를 잡아챘다. 겁에 질린 탓에 힘 조절이 안 되는지 온몸을 파르르 떨면서도 끝까지 밀러의 소맷귀를 놓지 않았다. 마치, 제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붙잡은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찌나 힘이 센지 밀러의 걸음마저 묶었다. 린느는 무어라 말을 내뱉고 싶은지, 숨을 달싹였지만 말 대신 숨만 할딱였다.
“안 갈 테니까 안심해. 말하려고 애쓰지도 마. 그럼 더 숨이 가빠져.”
그의 말에 마법이라도 실렸는지, 린느의 숨통이 탁 트였다. 시체처럼 창백하던 그녀의 안색에 희미한 생기가 돌자,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밀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는 바닥에 그대로 앉아, 끊임없이 린느의 안색을 살폈다. 잠깐 상태가 나아졌다 해서 아주 끝난 게 아니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기에, 린느의 안색을 살피는 데에도 틈 없이 완벽했다. 여차하면 자신이 먹는 약이라도 건넬까 싶었지만, 희게 질려 있던 그녀의 안색이 차차 돌아오자, 밀러는 남몰래 안도했다.
“맨날 붙어 다니는 하녀는 어디에 있고, 알렉스는 어디에 있는지 퍽 궁금한데. 말할 수 있을 때 말해 줘.”
말했다가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지도 모른다. 그 탓에 린느는 숨을 고르면서도 무슨 변명을 댈지 고민했다. 메리는 미리안에게 줄 간식을 만들러 부엌에 갔고, 알렉스는 하도 조잘거리길래 2층에 떼어 놓고 3층으로 도망 왔으니,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굳이 탓하자면 린느, 자신의 탓이지.
“책임을 묻고자 어디 있는지 묻는 게 아니니 마음 놔. 누가 보면 내가 그들을 산 채로 잡아먹겠다고 한 줄 알겠어.”
뭐 꼭 정말 뜯어 먹어야 먹는 건가. 잡아먹을 듯이 혼내면 그것도 잡아먹은 거지. 린느는 깊은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표정 보니 살 만한 거 같군. 일단 이리 나오지 그래.”
밀러의 커다란 손이 다시금 린느에게 펼쳐졌다. 마차에서 그가 내민 손보다 다정해진 건 기분 탓일까? 린느는 어둠이 잠식된 동굴에서 빛을 본 사람처럼. 천천히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갑게 질려 있던 그녀의 손이 밀러의 온기에 데워졌다.
“미안하다.”
“네?”
너무 당황해서인지 꽉 막혀 있던 목구멍이 뻥 하고 뚫렸다.
“미안하다고 했어.”
린느는 당혹스러운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미안하다고? 대공 입에서 미안하단 말이 나온 거야?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앞으로는 낮에도 불을 켜 두라 명령해서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지.”
“아, 아니……. 제가 잘못한 거예요. 아마, 알렉스 님은 2층에서 절 찾고 있을 거거든요.”
그럼 그렇지. 알렉스가 제 할 일을 이렇게 방치하고 무책임하게 굴 인물인가? 어디서 울음 섞인 외침이 들린다 했더니, 알렉스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밀러는 헛웃음을 지으며, 제 손을 꼭 잡은 린느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이렇게 작디작은 손으로 얼마나 무서우면 귀를 막고 있었을까. 애잔하긴.
“그렇다 해도 내 책임이다. 이 저택에서 그대의 아픔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니, 더욱 신경 썼어야 했어. 게다가, 세르트 경에게 그대를 잘 책임지겠다 해놓고 이런 실수를 저지른 건 명백히 내 불찰이다.”
“명백하기까지야…. 아무튼 감사해요. 저도 앞으론 알렉스 님 따돌리고 혼자 돌아다니지 않을게요.”
“그럼 더 좋고.”
말미에 밀러는 입매를 단정하게 끌어올려 웃었다. 그가 짓는 웃음에는 조소 아니면 실소 아니면 헛웃음만 있는 줄 알았건만. 린느는 그의 미소에 홀린 듯이 바라봤다.
“세르트 영애! 제에발, 제에발 어디 계시면 계시다고 대답이라도 해 주세요!! 각하께서 돌아오시면 전 죽습니다!”
알렉스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린느의 어깨가 잘게 들썩였다.
“여, 여기 있어요!”
린느의 외침에 알렉스가 쏜살같이 달려와 거친 숨을 내몰아 쉬었다. 상체를 들썩이면서까지 숨을 몰아쉬더니, 뒤늦게 밀러를 발견하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대차게 망했네.
“가, 각, 각하…….”
알렉스는 놀란 눈으로 밀러를 바라보더니, 꼭 맞잡은 두 사람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고장 난 사람처럼 손만 빤히 바라보자, 린느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쏙 뺐다.
“아이고. 아하하, 잠깐 3층도 구경한다는 것을 이렇게 막 돌아다녀 버렸네요. 죄송해요, 알렉스님!”
“…아, 예. 그렇…… 지만 제가 알아서 세르트 영애를 잘 모셨어야 했죠. 하하….”
묘한 기류에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린느와 밀러를 힐끔거렸다. 여태 밀러를 보좌한 지도 어언 몇 년인가! 그 수년 동안 제국의 대공이라는 위치에서도 밀러는 단 한 건의 스캔들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선대 대공의 지독한 여성 편력 탓이었으니. 밀러가 그토록 사랑에 건조한 이유도, 스캔들에 학을 떼는 이유도 퍽 이해됐다.
하물며, 여동생처럼 보살피는 미리안에게도 단 한 번도 내어 주지 않던 손이 아닌가. 마차에 올라탈 때도 내릴 때도 그녀의 손을 잡아 부축해 준 적도 없어, 민망하던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손을 내어 주시다니.’
알렉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다. 비록 예상치도 못한 상대이긴 해도, 밀러가 여인의 손을 잡아 주다니! 예삿일이 아니다.
밀러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를 직접 보좌하는 이가 누구던가, 알렉스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알렉스는 더욱더 확신했다.
‘각하께서 아픔을 조금씩 이겨 내고 계시는구나…. 다행이야.’
어둠에 잠식된 것처럼 어두컴컴하던 대공저가 저녁마다 환하게 빛날 수 있는 것도, 밀러가 아픔을 이겨 내고 있단 증거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여인에게 마음을 열고 손도 잡을 정도라니. 주책맞게 코끝이 매워졌다.
“1층 집무실에 책상 하나 더 둬라.”
“……네?”
“내 집무실에 세르트 영애가 쓸 만한 책상을 두란 소리다.”
그의 명령에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뜨였지만, 밀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