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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36화 (36/122)

@36화

대공저에 들른 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리 섀르넌과 밀러 사이가 막역하다지만, 섀르넌이 대공저에 자주 방문할 이유는 없다. 린느 때문이겠지. 밀러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응접실로.”

그 짧은 말만 남겨 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린느 역시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밀러는 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밭에 가 보고 싶다 했던가. 집사에게 미리 말해 뒀으니 가 봐도 좋아.”

“밭은 나중에 갈래요.”

“그럼 알렉스와 집무실을 보지 그래?”

“급한 일도 아닌걸요?”

밀러의 금안이 날카롭게 린느를 향했다. 마치, 혼이라도 낼 것처럼 사나웠으나 린느는 되레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

“그럼 여기 있어.”

하지만 상대는 밀러였으니. 밀러는 린느를 떼놓고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왜, 왜요! 같이 가요!”

밀러는 노기 어린 한숨을 뱉으며 어금니를 물었다. 그의 흰 턱에 근육이 불거졌으나 린느는 그것도 모르고 총총 그의 뒤만 따랐다.

* * *

밀러가 먼저 응접실로 들어서자, 섀르넌은 잘게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면전에 대고 너무 실망하는 거 아닌가?”

“실망이라뇨.”

섀르넌은 작위적으로 웃더니, 급한 대로 찻잔을 기울였다. 그런데도 그의 연푸른 눈동자는 끊임없이 응접실 입구를 살폈다. 분명 응접실로 안내해 주던 하인이 밀러와 린느가 함께 티 타임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섀르넌의 기대가 아주 헛된 건 아니었다.

“공작님!!”

린느는 오랜 친우와 마주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능숙한 마술사처럼 양 손바닥을 활짝 펼친 채로 요리조리 움직이더니, 박수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두 남자의 낯에서 완벽하게 희비가 갈렸다.

“잘 지냈습니까? 인사도 제대로 못 해 마음에 걸려 대공저에 들렀습니다.”

섀르넌은 양 입꼬리를 반듯하게 올려 웃으며, 린느를 반겼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밀러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뚜름하게 웃더니, 고개마저 휙 돌렸다.

“그럼요! 저야 늘 잘 지내죠. 대공 각하 덕분에요.”

세상 온갖 불만이란 불만은 끌어와 인상을 찌푸리던 밀러가 멋쩍게 픽, 웃었다. 그것도 잠시, 자신이 웃음을 짓고 있단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입매를 굳혀 웃음기를 지웠다. 마치, 웃음이라도 지으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식사는 하셨어요? 저희는 방금 식사를 마쳤거든요!”

방문할 때마다 침묵에 고요하기까지 하던 대공저가 아니던가. 그런 대공저에 활기를 불어넣다니. 역시, 린느 그녀다웠다. 섀르넌이 조그마한 수다쟁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럼 산책이라도 하시겠어요?”

“안 된다.”

물어본 건 섀르넌이었으며, 당사자는 린느였건만. 난데없이 밀러가 대신 답하자 두 사람은 당황한 듯 밀러를 빤히 바라봤다.

“바쁘다.”

“아니…… 전 세르트 영애에게 물어봤…….”

“세르트 영애가 바쁘단 소리였어.”

갑자기요? 갑자기 바쁘다고요? 대공저에서 피둥피둥 놀고만 있는데? 린느는 금시초문이란 듯 당황한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봤다. 섀르넌은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으며, 밀러는 말 그대로 여유 넘치는 미소만 비쳤다. 얄밉긴!

“세르트 영애, 알렉스와 집무실을 골라 둬. 늦게 고르면 텅 빈 집무실에서 쓸쓸하게 업무를 봐야 할 테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네? 아니…….”

“각하 말씀이 옳으십니다. 세르트 영애, 함께 가시죠. 지금 가서 골라 둬야 가구 상인도 때를 맞춰 주문 제작을 할 겁니다. 그럼, 영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인테리어하실 수 있습니다.”

눈치 빠른 알렉스가 후다닥 뛰어와, 린느를 재촉했다. 그것도 솔깃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린느는 잠시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고민하더니, 섀르넌에게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중앙계단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밀러는 조소를 뱉었다.

최대한 빨리하긴 뭘 빨리해. 그리고 뭘 기다려? 누구 마음대로. 밀러는 린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말없이 응접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돌연 걸음을 멈추고 섀르넌을 바라봤다.

“뭐 하나?”

“……예?”

“산책.”

밀러는 큰 보폭으로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 * *

예상대로 두 남자 사이엔 눈치 없이 지저귀는 새소리와 부지런한 사용인들이 낙엽 쓰는 소리만 흘렀다. 조잘거리는 수다쟁이가 빠지니 정적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정적도 두 남자만의 몫이었으니. 두 남자가 나란히 산책길을 나서자, 말 없기로 소문난 대공저 하녀들마저도 수다쟁이로 변했다.

“그림이 따로 없네요….”

“그러게. 이 맛에 대공저에서 일한다니까?”

“평생소원이에요, 저 두 분 사이에 나란히 서 보는 게.”

“어머, 미쳤나 봐. 나란히 선다는 게 말이나 되니?”

“하지만 소원은 공짜잖아요…….”

하녀는 양 손바닥을 딱 붙여 왼뺨에 비스듬하게 두고 양 눈을 폭 감았다. 마치, 막 잠든 어린 영애처럼 두 뺨을 붉게 달군 채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 공짜니까 잘 꿔 둬.”

“하, 그러고 보면 세르트 영애는 복도 많아요. 보니까 공작님과도 친분이 있는 거 같던데.”

“아가씨야 워낙 붙임성이 좋잖아요? 그 왜, 출근 첫날부터 부엌에서 일을 도우셨다며요?”

“그뿐이게요? 그날 원두 볶는 기계가 고장 나서 난리도 아니었는데, 세상에 그 기계 고친 사람이 아가씨라면서요?”

“세상에, 기계 고친 게 아가씨 작품이었어요?!”

모여 있던 하녀들 모두 화들짝 놀라더니, 동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자기들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튄 탓이었다.

“그날 아가씨 아니었으면 각하께 모닝커피도 못 드릴 뻔했어요. 그날따라 심기가 불편하셨는데, 어휴. 모닝커피까지 못 챙겼더라면 우리 모두 하녀장님께 불려 갔을걸요?”

하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진저리를 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안나는 사용인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다정한 사람이지만, 일 처리에서는 칼로 잰 듯이 반듯한 사람이다. 그 탓에 어린 하녀들의 우상이 되곤 하는데, 그만큼이나 그녀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뭐, 아가씨께서 과거에 저지른 일들도 있긴 하다만, 고쳐나가시려고 노력하니 우리도 돕는 게 맞다고 봐요.”

은근슬쩍 루비가 말을 얹자, 그녀 또래의 하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중년의 하녀가 루비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빨래 바구니를 들고서 자리를 떠났다.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무척이나 부지런한 거 같습니다. 오늘 같은 날에도 빨래를 널다니.”

섀르넌은 갑작스레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더니, 얄밉게도 웃었다.

“한 번 미루면 영원히 못 한다. 그게 안나의 철칙이지. 나 역시 그녀의 철칙을 인정한다.”

“아, 그러고 보니 부인께서 보이지 않네요?”

“미리안과 함께 있을 테지.”

그건 또 무슨 소리람? 섀르넌은 이해하지 못하겠단 듯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설마 미리안의 아비가 대공저까지 왔었습니까?”

“하, 차라리 그러면 좋겠군. 죽일 명분이라도 생기니까.”

지루한 잡지를 타박하듯, 그가 뱉은 말은 살벌했으나 그의 표정은 퍽 무심했다.

“미리안이 도망을 가려 했고, 그걸 세르트 영애가 막았어. 만약, 세르트 영애가 막지 못했더라면 미리안은 저기 숲에서 시체로 발견됐을 테지.”

그럼 악몽이 반복된다. 포악한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병적인 죄책감 위로, 또 다른 죄책감이 얹어질 것이다.

어머니와 지독하게 닮은 미리안은 그에게서 여인이 아니다. 그의 죄책감을 지울 수 있는 존재일 뿐이지.

“이젠 미리안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상황을 알게 되면 그녀도 도망치길 주저하겠죠.”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아. 미리안은 현재 많이 불안한 상태니까. 게다가, 이번 일로 미리안이 세르트 영애에게 실망했으니 정말 도망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인에게 미리안과 함께 있으라고 명령하셨군요.”

밀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 어렵네요. 각하의 말씀대로 미리안의 아비가 하루라도 빨리 제 발로 찾아오면 좋겠네요.”

밀러가 미리안의 본가로 보내는 돈을 끊었어도, 미리안의 아비는 제 목숨을 누구보다도 아끼는 자이니 쉬이 대공저로 찾아오진 않을 거다. 하지만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그는 결국, 탐욕에 굴복하고 자신의 딸을 더 좋은 값에 팔기 위해 대공저를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흐릿하던 하늘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밀러는 걸음을 돌렸다.

“산책은 이쯤 하지.”

재미도 없고. 밀러는 뒷말을 삼키며 유연히 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섀르넌이 시치미를 떼며 유연한 척 말했다.

“그래서, 더는 미리안이 세르트 영애를 찾지 않는다는 거죠? 그럼 굳이 세르트 영애가 대공저에 남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대공가의 가신인데 어딜 가나?”

“가신이라 해도 굳이 대공저에서 지내며 공부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요.”

“웃기고 있군.”

“웃기고자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전 세르트 영애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어서요.”

순간, 금빛 눈동자가 사납게 섀르넌을 응시했다. 술에 취한 황태자가 밀러의 술잔을 넘치도록 따랐을 때보다도 서늘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섀르넌 역시 물러설 기미 없이 미소와 함께 밀러를 바라봤다. 두 남자는 말도 없이 시선을 부딪친 채 멈춰 섰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바람마저 잔잔해졌다.

“이성적인 관심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유세 떨기는.”

“원래 사랑은 관심으로 시작하니까요. 저야 해 봐서 잘 알죠.”

“해 봐서 잘 안다니, 세르트 영애에게도 그렇게 말해. 그대 이전에 죽도록 사랑한 첫사랑이 있었다고.”

돌연 섀르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못 하겠으면 내가 전해 줄까? 세르트 영애도 알 건 알고 그대의 ‘이성’적인 관심을 받아야 공평한 게 아닌가 싶어 하는 말이야.”

그의 유려한 미소가 섀르넌을 찍어 누를 듯이 오만하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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