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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35화 (35/122)

@35화

“대공가의 가신이 되셨다는 소식 들었어요! 물론 과거에 약간 오해가 있긴 했지만, 전 아가씨께서 언젠가 이렇게 큰일을 해내실 줄 알았다니까요?”

물론, 대공저에서 오래 머문 사용인들은 여전히 린느를 의심하고 있지만. 어린 사용인들은 어제 린느의 활약으로 의심을 풀었다는 둥 이야기가 주였다. 특히, 어제 아침 린느와 함께 아침 빵을 나눠 먹은 사용인들은 린느에게 온정을 느꼈으며, 나아가 밀러가 직접 그들의 식사를 챙겨 준 것도 린느의 배려 덕분이라는 말도 함께 전해 줬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또 아주 맞는 말도 아니기에 린느는 어색하게 웃음만 지었다.

“앞으로 아가씨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대공저에 지내실진 몰라도,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게요! 아셨죠?”

“네, 네네! 파이팅!”

“아, 말씀도 편히 해 주세요! 아가씨도 참!”

하녀는 주근깨 인 얼굴로 귀엽게 웃으며 문밖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파이팅 넘치는 건 너무 좋지만…….

‘미리안이 걱정인데…….’

몇몇 사용인들의 오해를 풀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했지만, 마음속 한편이 불편한 건 지울 수 없었다.

* * *

비록 아침 식사는 놓쳤지만, 다행히도 정오 식사 시간은 지켰다. 밀러에게 잔소리를 듣겠지 싶어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자리했으나, 정작 밀러는 평소와 별다를 게 없었다.

넓은 정찬실에 식탁 앞에 앉은 사람은 고작 둘뿐이고, 고급스러운 식기와 접시 부딪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릴 뿐 정찬실은 역시나 고요했다.

밀러는 이 숨 막히는 고요함에도 잘만 식사했지만, 린느는 로봇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때 멀찌감치에서 대기하던 사용인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입을 가렸다.

“에취!”

숨 막힐 듯이 날카로운 이목이 그 사용인에게 고정됐다. 그리고 그들의 이목은 자연스레 밀러에게로 향했다.

“…….”

다행히 밀러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사용인들은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하지만.

“에취!”

포크를 든 밀러의 손이 멈칫하자, 정찬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때, 린느가 손을 뻗었다.

“저 와인 좀 주실래요? 아, 오는 김에 잔잔한 음악 좀 틀어 주시구 거기 창문도 열어 주실래요? 오늘 입은 드레스가 먼지를 좀 많이 먹어요.”

린느는 해맑게 호호 웃으며 밀러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러자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한층 부드럽게 풀렸다. 밀러 역시 고개를 잘게 내저으며 대낮부터 와인을 찾는 린느에게 타박 아닌 타박만 뱉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이에 연신 재채기하던 사용인이 음악을 틀어 두곤 자연스럽게 정찬실 밖으로 나섰다.

‘후……. 음악이라도 틀어 두니 살 거 같네.’

린느는 음악에 맞춰 가볍게 고개를 움직였고, 그런 그녀를 힐끔 바라보며 밀러는 픽, 웃었다.

“먼지떨이를 돌려 달라 했다고.”

“네? 아, 그랬었죠.”

“소백작이나 되는 사람이 먼지떨이로 무얼 하려 돌려 달라 했을까. 난 그게 궁금한데.”

밀러는 유려한 미소와 함께 능숙하게도 비꼬았다. 배울 게 산더미인데 속없이 먼지떨이나 찾다니. 잔소리 듣고도 남을 행동이지만, 린느는 고개를 갸웃댈 뿐이었다.

“먼지떨이 손잡이가 너무 특이하고 예뻐서요. 조개 모양인 거 보셨어요? 분홍색에 자개가 들어가서 홀로그램처럼 빛나더라구요.”

“그래서.”

“그래서…… 돌려받고 싶다고 한 거죠, 뭐. 방에다 하나쯤 둬도 좋잖아요?”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있네. 밀러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곁에 있던 알렉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방 하나 빼. 세르트 영애가 쓸 집무실로. 평생 놀고 싶다면, 그깟 먼지떨이는 잊고 일을 배워, 소백작.”

집무실이란 말에 알렉스와 린느 두 사람 모두 이맛살을 구겨가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도 밀러는 명령 내리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밝고, 사람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알아봐. 어둡고 음산한 곳 말고.”

그의 명령에 린느의 눈썹이 굽이쳤다. 피도 눈물도 없는 집착 남주가 왜 저렇게 다정하담? 물론, 뱉는 말마다 틱틱대긴 하다만……. 린느는 귀 끝을 붉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도 잠시, 미리안의 빈자리에 린느의 귀 끝이 차게 식었다.

‘안 되겠어. 미리안한테 다녀와야지.’

마지막 남은 방울토마토를 포크로 쿡 찍으며 한숨을 내쉬자, 밀러가 유연히 말을 이었다.

“식사는 마음에 들었나?”

“저요?”

그럼 정찬실에 그대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밀러는 타박하지 않고 린느를 빤히 응시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당연히 맛있죠! 다른 건 몰라도 대공저 셰프의 손맛은 최고라니까요?”

다른 건 몰라도? 그럼 쉐프의 손맛 이외는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인가? 밀러의 짙은 눈썹이 움찔했으나, 린느의 웃음에 밀러 역시 말을 아꼈다.

“식사 마쳤으면 써니룸으로.”

그는 오만한 명령만 남겨 두고 써니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표정은 퍽 진중했으니, 황태자의 생신 선물을 고를 때보다도 진지했다.

밀러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린느는 곁에 있던 메리에게 손짓했다. 보는 사람마저 조바심 나도록 가느다란 손가락이 바삐 손짓하자, 메리는 한달음에 뛰어왔다.

“걱정했지? 실은…….”

메리는 주변을 살피더니 방긋 웃으며 린느의 귀에 속삭였다.

“이미 다 알고 있죠. 실은 어제저녁에 루비가 알려 줬거든요.”

“혹시 그… 성격 좋은 하녀 말이야?”

“네네. 각하께서 심부름을 보내신 거 같던데요?”

“집무실에 네 주인이 잠들었으니, 업어 가라구?”

“아, 아니요. 걱정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어요.”

세상에. 이게 무슨 저세상 다정함이래? 린느는 저도 모르게 양팔을 문지르며 눈을 파르르 떨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밀러가, 그 오만한 남자가 다정을 베풀 줄 안다고? 제국 신문감일세.

“아무튼 각하께서 아가씨의 과오를 지우고, 지켜보시는 게 분명해요.”

“나만 잘하면 된단 말을 그렇게 돌려 하는 거야?”

메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어색하게 웃을 뿐, 굳이 아니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아가씨, 써니룸으로 모실게요!”

거대한 아치를 지나쳐 써니룸에 들어서자,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찻잔을 기울이는 밀러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저 찻잔을 기울이는 거뿐인데도 대공은 대공이구나 싶을 만큼 고귀하기까지 했으니. 린느는 잠시 넋을 잃고 밀러를 바라봤다.

‘원작 린느가 왜 그렇게 밀러한테 집착했는지 알겠네.’

햇볕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그 어떤 사람보다도 어울리는 남자였다. 내리쬐는 은은한 햇빛이 그의 금안을 더욱 환하게 밝혀, 눈이 부실만큼 영롱했으며. 무심하게 넘긴 흑발과 퍽 어울렸다. 지금처럼 그가 아래를 내려다볼 때면, 신이 하찮은 인간을 바라보듯 무심하면서도 위압적이었으니. 원작 린느가 왜 도시락까지 싸 들고 밀러를 따라다녔는지 퍽 이해됐다.

“구경 그만하고 이리 앉지. 차 식는다.”

린느는 신의 음성을 들은 사람처럼 온몸을 들썩였다. 물 밀듯 올라오는 창피함에 입 안을 깨물자, 밀러는 그제야 린느에게 시선을 뒀다.

“그대가 직접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다. 혹, 차가 마시고 싶다면 말해.”

“저 커피 좋아해요.”

그럼 다행이고. 밀러는 무심한 대답과 함께 다시 책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대가 말한 주급과 복지. 나와 협상하지.”

린느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렸다. 연봉협상을 회장님과 하는 격이니 놀랄 수밖에. 밀러는 놀란 그녀에게 차분히도 통보했다.

“대공가의 정식 가신에 걸맞은 금액을 매달 백작가로 보내도록 하지. 복지는 그대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게 복지다. 대공저를 제집처럼 이용할 수 있으며, 전액 무료로 후계자 수업까지 맡아 줬으니. 이보다 더 좋은 복지도 없을 테지.”

“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조만간 지금 그대가 맡은 업무 외에 한 가지 더 제안할 테니, 기대해도 좋아.”

뭘 기대해도 좋단 말인지! 린느는 어안이 벙벙해 말을 채 꺼내지도 못했으나, 그새 밀러는 말을 휙 돌렸다.

“어제 세르트 백작저에 다녀왔는데 궁금한 건 없나?”

그의 물음에 린느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세르트 경의 걱정이 앞선 탓이다. 걱정에 그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아버지는 잘 계셔요?”

못된 스테빈스 백작이 더는 아버지를 귀찮게 안 하는지, 이 무심하기 짝이 없는 대공이 마음 상하게 하지 않았는지, 여태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어머니는 돌아오셨는지, 까탈스러운 하녀장은 여전히 까탈스러운지 등등.

물어볼 게 천지였지만, 린느는 말을 아꼈다. 그러자 밀러는 픽, 웃음을 뱉으며 차분히 말했다.

“부녀지간이 같은 질문을 하는군. 세르트 경에게도 말해 두긴 했다만, 그대도 세르트 경의 안부가 궁금하다면 언제든지 편지를 나눠. 누가 보면 내가 그대들 사이에서 못 할 짓이라도 하는 줄 알겠군.”

린느는 머쓱한지 헛기침을 해 댔다. 아니, 처음부터 안부 편지 나누라고 했으면 좋았잖아?

“미리 내게 알린다면, 간간이 백작저에 들러도 좋다. 지금처럼 얌전히 지낸다는 가정하에서.”

“그, 최대한 노력할 거지만, 얌전히 지낸다는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좀 알 수 없을까요?”

“알렉스가 당황하지 않는 선이라고 해 두지.”

“아아, 그렇군요.”

린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곁에 있던 알렉스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자 알렉스는 뻐근하고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발 수습할 일 만들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듯이.

“그리고, 하나 더.”

“여기서 더요?”

“오늘은 미리안에게 찾아가지 말도록.”

귀신 같은 남자. 그건 또 어떻게 알고 가지 말라는 걸까!

“내일은 가도 돼요?”

밀러는 대꾸도 없이 차만 우아하게 들이켰다.

그때, 써니룸으로 발 빠른 사용인이 소리죽여 달려왔다.

“각하, 섀르넌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리 모실까요?”

한적한 평화가 단번에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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