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34화 (34/122)

@34화

‘집무실로 부른 이유가 이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이제 막 안정을 찾은 그녀를 깨우기에도 민망했다. 작기는 왜 또 저렇게 작은지! 밀러는 자신의 한 손바닥의 절반만도 못한 린느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게 도톰한 담요를 끌어안고 잠든 모습은 영락없이 아기 새가 커다란 분수대에서 종일 놀다 지쳐 잠든 행색이 아닌가. 원래도 흰 피부였지만, 기분 탓인지 몰라도 평소보다 그녀의 피부는 더욱 희게 질려 보였다.

‘저 몸으로 부엌일은 무슨.’

밀러는 우아하게도 쯧, 혀를 찼다. 저 작은 몸으로 일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세르트 경의 얼굴은 또 어떻게 보겠는가? 밀러는 저녁 정찬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세르트 경이 문득 떠올랐다.

「각하께서 그리 살펴 주신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나 아시다시피 제 딸아이가 워낙 발랄하고 긍정적인 아이인지라 무턱대고 일을 그르칠까 조오금 걱정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후계자 공부가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친자식이어도 속이 하루에 12번도 더 끓는 일인데, 그걸 각하께서 직접 감내하시어 린느의 후계자 공부를 맡아 주신다 하니…….」

걱정되어 딱 죽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세르트 경은 입을 그만 다물었다. 혹여라도 철없는 린느가 후계자 공부를 하던 중에 큰 실수를 벌여 대공의 심기라도 건들까 걱정이었다. 세르트 경은 걱정에 파묻혀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했었다.

하여, 세르트 경은 앉은 자리에서 어떻게든 밀러를 회유하려 했지만, 밀러는 그때마다 턱짓과 말 한마디로 유연하게 상대했다.

「그대가 우려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 세르트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내 가문의 가신으로서 부족함 없이 대하겠네. 약속하지.」

세르트 경은 밀러의 확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나아가, 제 딸이 아무리 뺀질거려도 절대 크게 혼내지 말라는 약속도 받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어디, 약속뿐일까? 남사스럽긴 해도 새끼손가락이라도 걸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 철부지를 데리고 후계자 수업시키는 것도 아찔한데, 대공가의 가신이라니. 그것도, 굳이 두 딸 중에서 린느라니! 세르트 경은 밀러의 선택이 고맙기도 했으나, 퍽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대공이 세르트 가의 뒷배만 되어 준다면, 귀족들은 자연스레 린느의 입지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딸의 미래를 위해, 세르트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아이를 잘 좀 부탁드립니다.」

유능한 가정교사에게 아이를 맡기는 심정이리라.

“…….”

밀러는 새근새근 잠든 린느를 빤히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어떤 귀족이 제국의 대공가 집무실 한편에서 저렇게 잠들 수가 있을까? 황태자쯤은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그 커다란 손에서 만년필을 툭 내려놓더니, 고풍스러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제 곁에 잘 정돈된 밀린 초대장들이 그의 탄탄한 팔뚝에 스쳤다.

밀러는 곤히 잠든 린느와 초대장을 번갈아 봤다. 생각해 보니… 누구보다도 연회장을 좋아하는 여인이지 않은가. 드디어 주인 잃은 초대장에게 주인을 찾아줄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려면 사교계에 발을 들여야 하는데.’

기본적인 공부만 시켜도 저 똑똑한 여인은 알아서 연회장을 누빌 것이다. 대공가의 가신이란 이름으로 누구보다도 더 찬란하게 누릴 테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상상하며 밀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각사각.

밀러는 자그마한 서류에 과할 만큼 커다란 인장을 쿵 하고 찍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작위 중에서 ‘백작’ 작위를 세르트 자작가에 수여하겠다는 서류였다. 마치, 깐깐한 교수처럼 밀러의 눈동자는 쉼 없이 움직였다. 그가 제 손으로 직접 남에게 내린 첫 작위이며, 첫 가신을 들인 탓이리라.

똑똑.

“들라.”

두꺼운 집무실 문이 스르륵 열리며 총괄 집사가 들어섰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검은색 정장에는 티끌만큼의 먼지조차 없었으며 흰 장갑은 매일 아침에 새것으로 교체한 덕에 저녁에도 여전히 쨍할 만큼 희었다. 더불어, 오늘 저녁에 일어난 일 때문인지 집사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대공저 불을 넉넉하게 켜 두는 게 어떠할까 싶은데.”

“불 말씀입니까?”

근심이 가득하던 집사의 안색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미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건만, 갑자기 불은 무슨 불? 집사는 노련함을 담은 주름을 접어가며 밀러의 말을 경청했다.

“어두운 곳 없이 꼼꼼하게 불을 켜 둬. 이용하지 않는 방은 불은 꺼 두고 문단속만 해 둬.”

“오늘 저녁부터 지시하신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주인님.”

“아, 대공저 앞뜰과 뒤뜰에 있는 가로등도 켜 둬. 어차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고장 내는 거보단 종종 켜 두는 게 나을 테니까.”

“예, 주인님. 말씀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집사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저녁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던 대공저의 꼴이 죽은 선대 대공비의 눈물을 연상케 한다며 학을 떼던 밀러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대공저에 있는 불을 전부 켜라 명령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 두는 건데, 대공저 밭에 세르트 영애의 출입을 허용하라.”

“바, 밭 말씀입니까?”

“그래, 밭.”

방도 아니고 밭에 귀족 영애가 출입할 일이 뭐 있다고……? 아니지, 그 엉뚱한 세르트 영애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집사는 잠든 린느를 발견하고서 흠칫 떨었다. 그러자, 밀러가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영애가 추위에 약해서 잠시 쉬고 있는 거니 개의치 말라. 어차피 불편하여 곧 깨어날 테니까.”

“…예, 주인님. 세르트 영애께서 깨어나시면 불러 주십시오. 하녀들을 불러와 방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와 이따금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 * *

할머니의 옥돌 매트 온기에 노곤하게 찐 듯이 온몸이 부드러웠다. 담요는 또 뭐 이렇게 보드랍고 따듯한지! 겨울철 동면에 든 다람쥐처럼 린느는 어깨를 치대며 담요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도 잠시. 고요한 분위기를 깨는 산뜻한 참새 소리에 눈이 번뜩 뜨였다.

“헉!”

급하게 뜨인 눈두덩이는 주말 내내 늦잠 잔 회사원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여느 때보다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는 상체를 일으켰다.

‘지, 집무실?’

린느는 손바닥으로 양 뺨을 톡톡 치며 ‘미쳤나 봐. 미쳤어!’를 반복했다. 그때, 멀찍이서 화병을 닦던 하녀가 쪼르르 뛰어왔다.

“기침하셨어요? 준비해 드릴 테니 이리 따라오세요!”

낯익은 얼굴이다 했더니, 써니룸에서 트레이를 밀고 온 그 하녀였다. 익숙한 얼굴에 린느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그보다 혹시 저와 함께 온 하녀 못 봤어요?”

“아, 메리요!?”

“통성명까지 나눴나 보네요. 하하…….”

린느의 하녀 아니랄까 봐. 하루 만에 대공저 하녀들과 안면 트고 잘 지내는 게 분명했다. 하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지금쯤이면 아가씨 방 청소하고 있을 거예요! 일단, 세숫물부터 떠 올 테니 기다리셔요!”

“자, 잠깐만요!”

하녀는 그 짧은 다리로 금세 집무실 문에 도착해, 토끼 눈으로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미리안 님은…… 괜찮아요?”

“아….”

말문이 턱 막혔는지 하녀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대답하기를 꺼려 했다. 주근깨가 인 콧잔등을 두어 번 찡긋거리더니, 다시 린느에게 다가왔다. 잘 차려입은 메이드복엔 포근한 햇빛 향이 담뿍 배어 있었다. 하녀는 손가락을 활짝 펼쳐 린느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종일 주무시기만 하신다던데요? 하녀장님께선 언급조차 하지 말라 입단속 하셨는데 아가씨께선 미리안 님과 친하셨으니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린느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을 끄덕였다. 미리안과 친했는데 그녀의 면전에서 고자질을 했으니, 다시 떠올려도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하녀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아가씨께서 옳은 일을 하셨다 말씀드리고 싶었던 거뿐이었어요. 아가씨께서 용기 내 주셨기 때문에 어제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미리안 님 그렇게 안 뵈었는데……. 만약, 어제 미리안 님께서 정말 도망이라도 치셨다면…….”

하녀는 희게 질린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고 도리질했다.

“아무튼, 아가씨께서 정말 용기가 대단하셨어요! 늘, 용기 있는 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요!”

“용기는 무슨. 하하…….”

하녀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엄지를 떡하니 올렸다.

“전 아직도 아가씨의 우렁찬 목소리를 잊지 못하는걸요? 저는 우리 각하께서 애커만 경께 화내시는 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니 아가씨께서 애커만 경께 소리치는 목소리였어요!”

잊을 만하면 원작 린느의 흔적이 이렇게 묻어나오는구나. 린느는 뻐근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하녀도 그만 눈치챘는지 난감한 얼굴로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이미 늦었지만.

“아, 아무튼 저희 주인님께서 왜 아가씨를 선택하셨는지 저흰 알아요.”

선택이란 단어에 린느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선… 택이요?”

집무실에 잠든 걸 들킨 것도 문제지만, 대공의 선택을 받은 아가씨라니!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린느는 마른침을 삼키며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 도대체 무슨 선택? 선택이라니?’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뒷골이 서늘할 때쯤, 하녀는 그 천진한 얼굴로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