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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33화 (33/122)

@33화

린느는 미리안이 서 있던 계단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찰나였지만, 미리안의 원망 어린 눈동자가 뇌리에 박힌 탓이었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꼿꼿한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걱정되나?”

걱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집착에 진심인 밀러에게 미리안의 도망을 예고했으니, 그녀의 앞날은 안 봐도 뻔했다. 린느는 금세 마른 입술을 축이며 다급히 물었다.

“그래도 식사는 줄 거죠? 뭐든 밥은 먹여 놓고 해야 해요. 혼을 내든 탓을 하든요. 네?”

우아하게 굳어 있던 그의 미간이 탁 풀렸다. 더불어, 시원스럽게 입매를 올려 웃더니 금세 웃음을 뚝 그쳤다.

“그대가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유리처럼 훤히 보이는군. 내가 미리안의 아비처럼 몰상식한 사람인 줄 아나?”

밀러는 나직이 혀를 차며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 두라 타박했다.

“꼭대기 층에 가둬 놓고 식사를 굶긴다거나 타박할 일 없으니, 그만 쫑알대고 따라와.”

밀러의 명령에 마법이라도 깃든 것처럼 린느는 금세 마음을 놨다. 밀러라면 차라리 대놓고 묶어서 끌고 갈 성격이지 저렇게 거짓말을 할 남자는 아니니까. 밀러는 집무실을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면서도 고개만을 돌려 린느를 살폈다.

“다리가 짧아서 그런지 느려빠졌어.”

“다 들리거든요?”

린느는 제 몸에 몇 배나 커다란 소파에서 부랴부랴 일어나, 밀러의 뒤를 따라 총총 뛰어갔다. 그때마다 린느의 구두 굽 소리가 발랄하게 울렸고, 말미에 밀러의 묵직한 구둣발 소리도 느릿하게 울렸다. 간간이 차가운 바람이 창문 틈을 툭툭 쳤지만, 대공저 내부는 온기가 가득했다. 다만, 지나치게 어둡다는 게 문제랄까.

“…그런데, 혹시 양초가 부족한 거예요? 아님, 전기세가 밀린 거예요?”

“무슨 세?”

“대공저는 다 좋은데요. 너무 어두워요. 보세요! 저기서 괴한이라도 나타나면 제압하실 수 있겠어요? 바로 코앞도 안 보이는데?”

정면을 응시하던 금빛 눈동자가 자신의 가슴팍보다 작은 린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도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으로 지내면 이런 말을 대공 면전에 대고 하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괴한이라. 그런 생각은 티끌조차 해 본 적 없다만, 만약 대공저에 괴한이 닥친다면 그대의 작품이라 여겨 두지.”

“네? 아니, 말이 그렇게 되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살해 협박을 이렇게 대놓고 하나?”

“살해 협박? 제가, 각하께요?”

“그럼 누가 있겠나? 이 어두운 복도에 그대와 나뿐이건만.”

“…….”

순간, 스산한 바람이 창문을 거칠게 툭 치고 지나쳤다.

“!”

청록색 눈동자가 어둠뿐인 창문을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열심히 움직이던 그녀의 발도 우뚝 얼어붙었다. 린느가 그에게 받은 코트를 어깨에 두른 채로 걸음을 멈추자 밀러 역시 걸음을 멈추고 린느를 바라봤다. 누구를 위해 멈춘 적 없던 걸음이 어이없게도 멈춰 섰다. 그뿐일까? 밀러는 몸을 반쯤 틀어 린느를 바라보기까지 했다.

“창문 밖에 누가 있기라도 한가?”

“아오, 그, 그런 말은 좀 하지 마세요!”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밀러는 헛웃음을 뱉으며 눈을 깜빡였다. 황당해 보이는 얼굴에 대고서 린느는 투덜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저 혼자 방에서 어떻게 자라고 그런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세요? 각하께선 알렉스 손이라도 잡고 주무시면 되지만, 저는 미리안도 없고 하녀장님도 없거든요? 잠 다 잤네.”

린느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곤 밀러 곁에 딱 붙어, 그의 소맷귀를 잡아챘다.

“어서 가요!”

“하. 하하……. 참나, 하. 후우….”

밀러는 간헐적으로 실소를 뱉으며 자신을 향한 조소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린느에게 대공저 무늬가 새겨진 소맷귀를 잡힌 채로 집무실까지 직행했다.

* * *

밀러는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큰 샹들리에 불부터 켰다. 그 잠깐 사이에도 린느는 사색이 된 얼굴로 어두운 복도를 피해 집무실로 들어섰다. 자신보다 집무실에 먼저 들어선 린느를 보며 밀러는 헛웃음을 뱉었다.

딸각.

“이제 됐나?”

린느는 거대한 벽난로에 찰싹 달라붙어 고개만 끄덕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는지 가장 가까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숨을 고르기 바빴다.

‘…….’

밀러는 희귀한 생물을 보듯 린느의 행동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살피며 천천히 집무실 테이블로 향했다.

“따듯한 차라도 마실 텐가?”

“아뇨.”

그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원래 이 시간에 손님을 집무실에 들인 적도 없거니와 이 커다란 샹들리에를 킨 적도 없었다. 때문에 밀러는 이 낯선 분위기에 두 눈을 꾹 감고 의자에 기대어 말을 아꼈다.

툭.

바깥바람이 다시금 불어와 커다란 창문을 툭 치자 린느는 주변을 경계했다.

“바람일 뿐이다. 비가 오면 땅이 젖고, 바람이 불면 창문쯤이야 조금 움직일 수도 있지.”

“알거든요?”

“그러니 너무 겁에 질릴 필욘 없단 소리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니까.”

피곤에 잠긴 건지, 온기에 잠긴 건지, 낯선 분위기에 잠긴 건지. 금빛 눈동자가 린느를 지그시 응시했다. 다정한 눈빛은 아니었다만, 그렇다고 평소처럼 차가운 눈도 아니었다.

“내게 한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군. 그대도 나와 비슷한 증세를 앓았다던 그 말.”

린느는 어깨에 둘린 코트를 더욱 끌어안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시네요? 귓등으로도 안 듣고 계신 줄 알았는데…….”

귓등이란 단어에 밀러는 어이가 없단 듯이 코웃음을 쳤다. 사용하는 단어가 질 낮다며 무어라 타박하려 했지만, 희게 질린 린느의 낯을 보고서 잔소리를 삼켰다.

“나름 그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농담이시죠?”

“진담이다.”

“아니, 선택적 귀 기울이기는 빼셔야죠. 전 대공저가 아니라 제 저택이 더 편하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었잖아요?”

밀러는 또다시 듣기 싫단 듯이 고개를 휙 돌렸다. 속으로 욕을 삼키며 린느는 입술을 쭈뼛거렸다.

“아무튼, 어둠이 그대의 불안 증세를 증폭시키는 원인이라면 내가 고치도록 하지.”

입술을 쭈뼛거리던 린느가 벙찐 얼굴로 밀러를 바라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일이니, 고작 이깟 걸로 감동한 표정은 접어 둬.”

백작을 준다 했을 때도 저런 표정은 안 지었던 거 같은데. 밀러는 그녀의 속을 알 수 없단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몇 배나 하는 몸체가 단번에 우뚝 일어나자, 린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들었다.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코트 안에 몸을 웅크려 밀러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폈다.

덜컥.

밀러는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집무실 한편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고, 린느는 고개를 쭉 빼 그가 열어 두고 간 문만 바라봤다.

‘문이 두 개야? 복도로 향하는 문은 아닌 거 같은데…….’

맑디맑은 청록색 눈동자가 호기심을 가득 안고서 열린 문을 빤히 바라봤다. 넋을 놓고 훑어보던 중, 밀러가 다시 그 문을 통해 나왔다.

‘다른 방과 연결되어 있나?’

린느가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자, 밀러가 그녀의 시야를 휙 가리며 다가왔다.

“따분한 집무실을 살펴 뭐 하나?”

뒤끝 있다며 투덜대려던 찰나에, 그는 두툼한 담요를 린느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담요.”

“아니, 담요를 왜 주시는…….”

밀러는 린느의 어깨에 둘린 코트를 빤히 바라보더니, 린느를 향해 시선을 다시 옮겼다.

“그 코트보단 담요가 더 따듯할 테니 그만 이리 주지?”

“아.”

린느는 허겁지겁 코트를 벗어 밀러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코트를 들었지만, 그의 코트는 어깨에 둘렀을 때와 비교하지 못할 만큼 묵직했다. 그 묵직한 코트를 밀러는 가볍게 받아 옷걸이에 휙 걸쳤다.

“곧 있으면 집사가 보고하러 올 시간이니, 잠시 쉬어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방으로 가고 싶었으나, 어두운 복도를 떠올리자니 숨이 턱 막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린느는 마른침을 삼키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가 다시 서류를 향해 시선을 옮기자, 린느는 얼굴만 내놓고 담요를 돌돌 말아 몸을 기대었다.

“담요에 불붙이려고 그러나?”

“네?”

밀러의 시선을 따라가니, 벽난로 끝에 살짝 걸쳐진 드레스 자락과 담요 자락이 보였다. 린느는 화들짝 놀라며 벽난로에서 떨어졌다.

“저기에서 쉬어라. 거슬리게 하지 말고.”

“아, 넵.”

기다란 손끝으로 가리킨 곳은 생각보다 퍽 아늑한 공간이었다. 집무를 보는 커다란 집무실 전체와는 다르게, 작은 아치형 기둥을 지나면 휴식을 위한 공간처럼 잘 꾸려져 있었다. 밀러는 그곳 한편에 놓인 낮잠 베드를 가리켰고, 린느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총총 걸어가 낮잠 베드에 걸터앉았다.

‘이제 살 거 같네…….’

눈이 부시도록 훤한 조명 아래에 따듯한 벽난로 온기와 두툼한 담요까지. 린느는 그제야 심장께를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릴 적, 아파트에서 3일 동안 방치되었던 기억이 떠올라 아래턱이 떨렸지만, 참을 만했다. 무엇보다도 밀러가 입구를 막고 있어서인지, 안도감마저 생겼다.

‘재수 없긴 해도 듬직하긴 해.’

린느는 천천히 베드에 몸을 기대면서도 밀러의 옆태를 빠짐없이 바라봤다. 늘 피곤에 어린 눈 밑은 평소보다 훤했으며, 원작 소설에서 고통에 겨워하던 밀러의 모습은 티끌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퍽 놓였다.

“…….”

사그작대며 종잇장 넘기는 소리가 뚝 하고 멈추더니, 금빛 눈동자가 낮잠 베드로 향했다.

담요를 둘둘 말아 달걀처럼 매끈한 턱 끝에 채운 린느를 보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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