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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32화 (32/122)
  • @32화

    미리안은 린느의 예상대로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토독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젖은 눈을 슥슥 닦아 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린느 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미안해요…!”

    “예?”

    가, 감사해? 감사하다고? 린느는 붉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도망 여주 아무나 못 하는 거네. 맞네. 아무나 못 하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했는데 감사하단 말이 나오느냔 말이다!

    린느는 어안이 벙벙한지 바보처럼 살짝 열린 입매를 다물지 못하고 떨기만 했다.

    ‘순해 빠진 줄만 알았는데 내가 미리안을 너무 얕게 봤어.’

    린느는 해탈한 얼굴로 시계를 확인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미리안이 린느를 바라보며 눈물을 뚝 그쳤다.

    “밥……. 일단 저녁 식사부터 하고 와요, 우리.”

    그래,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해 보자. 도망이고 뭐고 간에 일단 저녁 먹고 생각해 보자고!

    린느는 유령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방 밖으로 나섰고, 미리안도 그녀 뒤를 따라나섰다.

    “가, 같이 가요! 린느 님? 린느 님!”

    * * *

    저녁 정찬을 무슨 정신으로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는데 밀러는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린느는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바라봤다.

    ‘왜, 왜 안 와? 맨날 집에서만 지내던 집돌이가 무슨 일로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저택을 비우는 거냐고! 이 망할 코알라랑 나만 두고서!’

    린느는 죄 없는 입술을 짓씹으며 시계 초침만 노려봤다. 그러든가 말든가, 미리안은 새끼 코알라처럼 린느 곁에 착 달라붙어 훌쩍이길 반복했다. 초침 소리와 미리안의 우는 소리가 섞이자, 린느가 미간을 구기며 타박했다.

    “미리안 님, 그렇게 울다가 실신하겠어요! 그만 뚝!”

    미리안은 뚝! 하며 눈물을 그쳤다. 이럴 때 보면 아이처럼 순한데…….

    ‘아니지, 낚이면 안 돼. 미리안은 도망 여주다. 고구마 여주다. 다 된 밥에 재 뿌릴지도 모를 원작 여주다.’

    린느는 어금니까지 깨물어가며 되새겼다. 그때, 린느의 청록색 눈동자가 멈칫했다.

    “그런데… 미리안 님? 맨몸으로 그대로 도망갈 생각이에요?”

    “네? 네.”

    순진한 거야? 아니면 뭔데! 린느는 한숨을 폭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니, 너무 대책 없는 거 아니에요? 뭐든 밥심인데 너무 무모한 거 아니냔 말씀이에요.”

    “괜찮아요. 어차피 대공저에선 뭘 먹어도 똑같아요.”

    “뭘 먹으란 소리는 아니고……. 하, 여기서 기다려 봐요. 제가 자그마한 디저트라도 좀 가져올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거참 말 좀 들어요. 이 방에 있어요. 알았죠?”

    린느가 단호하게 잘라내자, 미리안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린느는 나직이 한숨을 돌렸고, 천천히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색하지 않게, 유연하게, 평소처럼.

    복도로 나와 문을 천천히 닫으며, 미리안에게 안심하란 듯이 미소까지 보였다. 그러자, 미리안은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손도 흔들어 줬다.

    달칵.

    문을 닫자마자, 린느는 발꿈치를 들어 그대로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중앙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오자 쓸고 닦던 사용인들이 토끼 눈으로 린느를 바라봤다.

    ‘아니, 곧 있으면 잘 시간인데 밀러는 왜 안 와!? 누굴 피 말려 죽일 생각인가!’

    그때, 하녀장이 하녀 여럿을 거느리며 현관을 청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알렉스는 밀러와 동행했으니,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은 하녀장인 안나뿐이다.

    ‘밀러 언제 오냐고 하녀장에게 물어볼까? 그나마 물어볼 사람은 저 하녀장뿐인데…….’

    미리안이 도망치기 전에, 밀러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최대한 미리안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움직여야 하고.

    린느는 게처럼 살금살금 옆으로 걸어, 하녀장에게 다가갔다.

    “저녁 정찬 시간도 지났는데…….”

    “예, 각하께선 세르트 백작저에서 저녁 정찬을 마치고 지금 오고 계신답니다.”

    망할.

    ‘아버지, 지금 어떤 순간인데 밀러와 저녁 정찬을 하셨습니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미리안이 도망가면 백작이고 자작이고 멸문뿐일 테니까!

    린느가 멍하니 빗자루질하는 하녀를 바라보자, 하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 그…… 한입에 먹을 수 있는 디저트들이 있을까요? 미리안 님께 드리려는데.”

    “그럼요! 혹… 저녁 정찬이 허술하셨는지요?”

    린느는 두 손을 가로저으며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쉐프의 손맛이 일품인지라 먹고 나서 뒤돌면 또 먹고 싶고! 그런 거죠! 하하.”

    하녀장은 입꼬리를 올려 다정하게도 웃었다. 마치 제빵소 아주머니처럼 포근한 웃음이었다.

    “그럼 제가 디저트를 챙겨 올라갈 테니 먼저 가 계시겠어요? 바람이 차가우니 말이죠.”

    “아이구, 아니에요. 밤공기 쐬며 여기서 기다릴게요. 대공저 밤공기는 산뜻하네요?”

    “그렇다면…… 저기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다리 아프시겠어요.”

    그녀의 다정한 권유에 린느는 현관문을 등진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대공저 입구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아니지, 당장이라도 말을 타고 나가 횃불이라도 흔들어 밀러를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서 그냥 얌전히 기다리자. 멀리 나가 기다린다고 밀러가 일찍 오는 것도 아니고……. 어휴, 내 팔자야.’

    린느는 소파에 기대어 허벅다리를 주먹으로 통통 두들겼다. 대공저와 퍽 어울리는 투박하고도 고풍스러운 벽난로가 장작을 태우며 린느의 다리를 따듯하게 덥혔다. 바람 끝은 분명 차갑지만, 따스한 온기에 눈두덩이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이 와중에 잠이 오냐고…….’

    얼마나 지났을까?

    소란스러운 소리에 깜빡 졸던 린느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이제 막 도착한 밀러가 린느를 발견하고서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곤 막 데려온 강아지를 발견한 사람처럼 신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적응 못 하면 어쩌나 했더니, 역시나 그대답군. 대공저 로비에서 낮잠이라니. 아, 저녁잠인가?”

    그 잘난 얼굴로 린느를 빤히 바라보더니 어깨에 둘린 코트를 린느 위로 덮었다.

    갑자기 코트를 왜 주나 싶어 그를 빤히 바라보자, 밀러는 만족에 겨운 표정으로 린느를 바라봤다.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오세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기다렸단 말에 밀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내, 그는 왼손으로 소파 머리를 짚어, 린느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대가 날… 기다렸다고?”

    “그럼요! 이리 귀 좀 대 봐요.”

    린느의 조그마한 양손이 그의 귀를 감싸려던 순간.

    “가, 각하?”

    미리안이 계단 위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린느는 다급히 뻗은 손을 거뒀지만, 밀러는 별다른 내색 없이 미리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늘따라 날 찾는 사람이 많군.”

    “리, 린느 님께서 하도 오지 않으시길래 내려온 거예요.”

    밀러는 린느를 바라보더니, 유려하게 미소 지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서 날 기다렸고?”

    “어…….”

    린느는 눈동자만 굴려 로비 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자명종을 바라봤다.

    ‘11시 14분? 미친…!’

    고작 15분 남았다니. 15분 남았다니!

    지금 아니면 말할 기회조차 사라지고, 이 세상에서 린느도 사라지겠지!

    어디 린느만 사라질까? 결혼을 앞둔 동생과 이제 막 친해진 아버지도 사라질 테고!

    메리도 죽고, 얼굴 한번 못 본 어머니도 죽겠지. 뒷마당에 있는 댕댕이는 또 어쩌고.

    린느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

    “미리안 님, 미안해요! 각하, 오늘 저녁 11시 29분쯤 미리안 님께서 벽난로 오른편 창문을 통해 도망치실 예정이랍니다!”

    쨍쨍한 목소리가 대공저 로비를 울리고도 남았다.

    이를 지켜보던 알렉스와 하녀장은 시간을 뺏긴 사람들처럼 자리에서 굳었다. 눈동자가 터질 듯이 팽창한 채로 그 어떤 말도 뱉지 못하고 얼어붙은 건 덤이었다.

    “…….”

    미리안은 희게 질린 낯빛으로 당황하더니, 금세 원망에 찬 눈으로 린느를 노려봤다.

    밀러는 그런 미리안을 빤히 바라보더니,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안나.”

    “……예, 주인님.”

    “미리안 데리고 올라가.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마라.”

    하녀장은 두 손을 벌벌 떨며 미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미리안은 두 다리가 풀렸는지 이마를 감싸 안은 채 휘청였다.

    그 와중에도 미리안의 적색 눈동자가 린느를 노려보기 바빴다.

    ‘그렇게 째려봐도 어쩔 수 없어. 난 내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미리안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밀러는 픽, 웃었다.

    “배짱 한번 두둑하군. 일을 이렇게 벌이나?”

    “그러게 각하께서 일찍 귀가하셨어야죠. 저택에 알렉스 님도 없는데 어떡해요?”

    “앞으론 꼬박꼬박 시간 맞춰 귀가하도록 하지.”

    “……저 이제 어쩌죠? 미리안 님께 단단히 찍힌 거 같은데. 다시는 제게 비밀 이야기도 안 할걸요?”

    “그러겠지. 하지만 그건 미리안 탓이다. 자신이 도망가면 그대가 가장 난감할 걸 알면서도 도망가길 자초했으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때, 밀러의 커다란 손이 린느에게 뻗어졌다. 그의 유려하고도 여유로운 미소가 린느의 걱정을 앗아갔다.

    “나머지는 집무실에 가서 이야기하지. 밤공기가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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