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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31화 (31/122)
  • @31화

    덜컹.

    마차를 타고 대공저를 빠져나오자, 눈 감고도 읊을 수 있을 만큼 지루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밀러는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로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그러자, 맞은 편에 앉은 알렉스도 밀러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응시했다.

    “…?”

    창문 밖은 목가적인 풍경에 소규모 상업 단지가 다였다.

    ‘요즘 약을 끊으셔서 그런가?’

    식사처럼 복용하던 불안 증세 약을 끊은 지도 며칠째.

    언젠가부터 대공의 불안 증세가 잦아들어, 이쯤이면 진즉 비어야 할 약통은 아직도 꽉 차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마냥 기뻐할 수도 없다. 요즘처럼 증상이 호전된 건 처음이기도 하며, 좋아졌다가도 끝없이 악화하는 병이니까.

    그때, 밀러가 알렉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그대가 고민 있을 때마다 짓는 표정인데. 아니면 안나에게 잔소리 들었을 때 표정이거나.”

    “아.”

    알렉스는 떡 벌어진 입을 여밀 틈도 없이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말하지?”

    밀러는 가볍게 말아쥔 주먹에 관자놀이에 기대며, 나른한 표정으로 온정을 베풀었다.

    알렉스는 빠르게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더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각하께서 요즘 의원도 따로 부르시지 않으시고 약도 찾지 않으시어…….”

    “또 병을 참는 게 아니냐는 말을 예의 있게도 잘 돌렸군.”

    “아, 아닙니다!”

    알렉스는 거짓말에 꽤 능한 편인데, 밀러에게만큼은 늘 형편없는 거짓말을 구사한다. 이에 밀러는 픽, 웃었다. 하지만 알렉스가 이처럼 걱정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벌써 연회 시즌이 코앞이군.’

    누가 대공저를 정신없이 들쑤신 덕분에 연회 시즌이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제국의 연회 시즌은 한 계절 동안 이뤄지는데, 이때 어린 영애들이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해 데뷔탕트를 치루는, 일종의 귀족들만의 파티다. 하지만 이는 평면적인 이야기이다.

    “각하, 지금부터라도 의원을 불러 미리 약을 처방받는 게 어떠실지요.”

    “그대가 생각하기에도 올해는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거겠지.”

    알렉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매년 연회 시즌이 다가오면 대공저 앞으로 쌓인 초대장이 커다란 빨래 바구니로 다섯 바구니가 넘는다. 그중에서 밀러가 참석한 연회는 손에 꼽는다.

    연회장에 얼굴을 비치지 않을수록 귀족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이런저런 핑계로 연회에 불참했으나, 이마저도 더는 피할 곳이 없다.

    이처럼 밀러는 평생을 잘 굴러가는 쳇바퀴에 짓눌리지 않고자 쫓기며 살았다.

    어릴 적에는 포악한 아비에게, 대공자 시절엔 아픈 어머니의 울타리가 되기 위해서.

    대공이 된 이후로는 매 순간 쫓겨 살았다. 이 망할 불안 증세를 지우기 위해, 숨기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병은 지독하게도 숨기려 할수록 기침처럼 숨길 수가 없다. 욕심내어 숨기려는 순간, 사레들린 채로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해야만 하니까.

    이 병은 그렇게나 자비 없는 병이다.

    “각하, 지난번에 다녀간 칼로아 제국의 의원을 다시 데려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같은 제국의 의원에게는 문진조차 받을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밀러의 병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퍼질 테니까.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제국과 가장 멀고도 왕래가 없는 국가에서 실력이 뛰어난 의원을 비싼 값을 주고 데려오는 건데. 그 의원이 오는 길에 사용하는 배와 다시 데려다주는 배는 모조리 대공저 무역선을 이용했으며, 철저한 보안을 위해 밀러의 목소리와 얼굴마저 감췄다.

    이렇게까지 보안에 철저하다 보니, 간혹 의원 중에서 ‘이러다 날 죽이려는 속셈이 아니오?’라며 따지는 이들도 있었으니.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약 때문에 호전된 거 같진 않다. 다만.”

    “다만?”

    순간, 그의 뇌리에 붉은 띠로 치장한 린느의 얼굴이 스쳤다. 말괄량이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가 사진처럼 눈에 선했으니. 그의 우아한 미간이 움찔하고 크게 움직였다.

    “짐작이 가는 게 있으십니까?”

    알렉스의 재촉에도 밀러는 미간을 좁힐 뿐 말이 없었다. 그럴 만도 하지. 유리처럼 맑은 청록색 눈동자가 그의 머릿속과 심장을 넘나들며 어지럽힌 탓이다.

    그녀의 천진한 미소에 옮은 듯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가려웠다. 그것도 잠시, 알렉스의 시선에 밀러는 다급히 웃음기를 지웠으나. 마음을 숨기는 소년처럼 서툴기 그지없었다.

    * * *

    다정한 카리스마 앞에선 장사가 없다더니……. 하녀장인 안나가 린느를 찾아와 손수 메이드복을 회수했다. 그 탓에 린느는 변명도 제대로 못 해 보고 예쁘게 손본 메이드복을 뺏겼다

    그래, 메이드복은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귀여운 먼지떨이는 무슨 죄라고! 린느는 조개 모양 손잡이가 특징인 먼지떨이마저 뺏기자, 축 처진 어깨로 미리안의 방 한편에 콕 박혔다.

    그리고는 여느 영애들처럼 달달한 디저트와 향 좋은 차를 마시며 오전과 오후 시간을 모조리 보내느라 땅거미가 질 때까지도 미리안의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더불어, 린느는 연못가에 아이를 내놓은 부모님처럼 미리안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신이라니. 아니,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 거람? 하여튼, 자기가 대공이라고 아주 제멋대로야. 아오.’

    물론 이런 식의 제멋대로는 환영이다. 그냥 대공저의 시녀가 된 줄 알았건만, 가신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을 테지.

    ‘가신이라고 별거 있겠어? 일단, 알렉스가 오면 주급 협상부터 해야지. 가신이면 보너스를 더 주나?’

    안 그래도 사용인들에게 주급을 얼마나 받느냐 물었지만, 그녀들은 하나같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하긴, 주급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그들의 심정이 퍽 이해됐다.

    물론, 사용인의 주급과 가신의 주급은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사용인의 주급이라도 알아 둬야 주급 협상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 탓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놀고먹으면서 돈만 받아도 되나.’

    이렇게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네. 린느는 검지로 흰 뺨을 긁었다. 린느가 이토록 열심히 미래 설계하며 눈동자를 굴릴 동안, 미리안은 린느에게 이것저것 가져다줬다. 예쁜 액세서리, 드레스, 핸드백 등등. 이대로 두다가는 아주 입고 있던 드레스도 줄 기세였다.

    “그런데, 린느 님, 오늘 아침에 정찬실에 왜 안 오셨어요…?”

    미리안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꼿꼿하게 물었다.

    “아, 그게 커피 볶는 기계가 고장 났다길래 도와줬어요.”

    “그렇구나. 그럼 아침은 못 드셨겠네요.”

    “아니에요. 각하께서 따로 아침을 챙겨 주셔서 잘 먹었어요!”

    순간, 미리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분명 입매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어딘가 충격받은 사람처럼 온전치 못했다.

    “그, 그렇구나. 각하와 단둘이 계셨…… 겠네요. 저는… 린느 님 찾아다녔는데…….”

    “허, 저 찾아다니셨어요?”

    미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이 착용하던 목걸이를 꺼내 린느에게 건넸다.

    “이건 어때요? 이것도 린느 님에게 잘 어울려요.”

    “세상에. 이걸 다 주신다는 건 아니죠?”

    미리안은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를 목격한 린느는 자세를 고쳐 미리안을 빤히 바라봤다. 마치, 말썽을 부린 강아지를 타박하듯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미리안은 우물쭈물하며 실토했다.

    “그간… 저택 창문들을 둘러보며 건드려 봤는데, 벽난로 오른쪽 창문이 저녁 내내 열려 있더라구요….”

    미리안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거…….

    ‘밀러가 일부러 열어 둔 거야! 일부러 덫 친 거라고!’

    린느는 두 다리를 동동 굴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잠깐만요.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그리고 이상하지 않아요? 철통 보안으로 유명한 대공저인데, 벽난로 오른쪽 창문을 열어 둔다는 게!”

    “……대공저가 넓어서 확인하지 못한 걸지도 몰라요. 언제 다시 잠길지도 모른다구요.”

    “그래서 안 돼요. 너무 의심스럽잖아요?”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 줄 알고 그냥 보내요? 다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

    “아뇨! 무조건 있어요. 그러니까……!”

    바닥만 바라보던 미리안이 날카롭게 린느를 올려다봤다.

    “전 미리 말씀드리는 거뿐이에요. 린느 님이 제게 부탁하셨으니까요.”

    미리안은 마음이 아파 얼굴을 찌푸렸다. 오, 상냥한 린느. 린느는 프레이보다도 상냥하고 친절하다. 게다가, 미리안 자신과 달리 똑똑해서 그녀를 닮고 싶으며, 오래도록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제게 도망치지 말아달라 부탁했을 때에도 되도록 그녀의 뜻대로 도망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린느 님에겐 나 말고도 많아. 나 같은 애랑 늘 함께해 줄 리가 없잖아. 나 같은 사생아랑은 어울리지 않아.’

    오늘 아침에도 그렇고, 점심에도 그렇고……. 린느가 대공저에서 함께 지낸다며 투정 부릴 때만 해도, 오롯이 함께할 줄 알았는데. 그건 자신의 큰 착각이었다.

    ‘린느 님은…… 나 없이도 잘 지내실 테니까….’

    미리안은 한층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미안해요. 사실 휴가 떠나기 전부터 계획한 일이라서요. 아니면 우리 이러지 말고 함께 떠날래요?”

    린느는 희게 질린 얼굴에 턱 빠진 얼굴로 미리안을 바라봤다. 저 말은 거짓이 아니다. 왜냐면 원작에서의 미리안은 정말 오른쪽 벽난로를 통해 도망쳤었으니까.

    ‘그것도 저녁 11시 29분에!’

    린느는 커다란 눈망울을 도르르 굴렸다.

    ‘지금 무작정 도망을 막으면 나 몰래 정말 도망칠지도 몰라.’

    린느는 성난 고객을 응대하는 상담원처럼 해탈한 얼굴로 한숨을 내리 쉬었다. 그런데도 미리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말로 회유해도 통하지 않으리라, 그녀의 강력한 의지도 담겨 있었다.

    이에, 린느는 한껏 내리뜬 눈으로 세상 처량한 표정까지 지었다. 간헐적으로 가녀린 어깨도 좀 떨어 주고, 손끝도 파르르 떨어 주자, 철옹성 같던 미리안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게, 안 통한다고? 좀 더 오버해야 하나.’

    소낙비에 홀딱 젖은 고양이 표정까지 지었지만, 미리안은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결국, 린느는 땅끝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 아버지가 눈에 밟혀서요. 뭐 아버지뿐이겠어요? 아카데미에서 약혼 올릴 생각에 들뜬 동생도 걸리고…… 어머니도 눈에 밟히구요.”

    비록 얼굴 한번 못 본 가족들이지만. 린느는 뒷말을 꾹 삼키며 다시 구수한 한숨을 내쉬었다.

    “뒷마당에서 키우는 귀조르자브종도 걱정이네요…. 이름 바꿔 주겠다고 약속도 했는데, 아무튼 뭐 그래요, 미리안 님이라도 떠나세요. 미리 말해 줘서 고맙구요…….”

    이 정도면 눈 하나는 깜빡이지 않을까? 적어도 오늘은 도망간단 소리는 안 하지 않을까? 린느는 기대감을 안고서 미리안의 낯을 힐끔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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