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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30화 (30/122)
  • @30화

    “뭐든 간에 함부로 결정짓고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금 그대의 머리칼이 내 손에 있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 붙잡힐지 모르니까.”

    마치, 어제 미리안과의 대화를 엿들은 사람처럼 밀러의 경고는 린느의 허를 제대로 찔렀다. 무서운 남자 같으니. 린느는 태연한 척 초롱초롱한 두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는 그녀의 대답을 받아 내고 나서야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나저나, 기억을 잃은 게 사실인지 의심스럽군. 몇 달 전 대공저에 숨어들어 내게 홍차를 건네지 않았던가? 이번은 커피이고?”

    밀러는 고상하게 린느를 째려봤다. 더불어 그의 손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탁자 위로 탁 놓였다. 그때까지도 린느의 청록색 눈동자는 밀러의 입매를 향했다.

    “전 기억조차 없다니까 그러시네요. 하하…. 아무튼, 그래서 제 주급은 앞으로 어떻게 정산해 주실 거죠? 본가로 직접 보내 주실지, 아님 제게 직접 지급하실지도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알렉스에게 주급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어제는 상황이 여의치 못해 물어보지 못했다며 린느가 입을 뗐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자구. 머슴살이를 해도 대감 집에서 하는 게 나으니까.’

    어디 듣도 보도 못한 귀족가도 아니고, 무려 제국에 하나뿐인 대공가가 아닌가. 이보다 더 확실한 뒷배도 없을뿐더러, 주급은 또 얼마나 짱짱할까? 이 모든 수고가 향후 몇십 년간 마음 놓고 놀러 다니기 위한 지반이라 생각해 두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린느는 패기로운 얼굴로 밀러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주급이라.”

    밀러는 제게 당당하게 제 권리를 찾는 여인을 빤히 바라봤다. 주급을 달라 할 줄이야. 그저 상황에 떠밀려 다닐 줄만 알았건만. 자신의 권리를 당돌하게 주장하는 그녀가 기특했다.

    “그건 알렉스와 이야기하도록.”

    “언제 하면 좋을까요? 그리고 대공저에서 일하면 어떤 복지가 있는지도 알렉스 님께 물어보면 될까요?”

    “……그렇다.”

    복지까지 따져 들 줄이야. 세르트 경이 오냐오냐 키웠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꽤 똑부러졌다. 어쩌면, 세르트 경이 혜안으로 그녀를 자작가의 후계자로 뒀을지도 모른다.

    겉보기엔 세르트 경의 차녀가 린느보다 후계자에 더 어울려 보일지는 몰라도, 후계 자리를 고작 성적순으로 매기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젊은 귀족의 패기와 개인 역량이 중요하지, 고작 아카데미 졸업장으로 후계 자리를 얻을 순 없다.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겠어.’

    제국에 그 어떤 귀족이 알아서 메이드복을 차려입고,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을까. 게다가 대공의 면전에 대고 주급을 달라는 말까지 하는 여인은 아마, 린느 뷔 세르트가 유일할 테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그녀의 행보에 밀러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새끼손가락을 세워, 찻잔을 기울였다. 그새 바닥을 드러낸 커피가 아쉬웠으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완벽한 커피였다. 밀러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찻잔을 지그시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재주로 이런 맛을 내는 거지?”

    “제가 커피를 좀 잘 뽑아요. 아마 저보다 맛있게 커피 뽑는 사람도 없을걸요?”

    그녀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밀러는 그녀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린느는 기다렸단 듯이 입을 열었다.

    “이래 봬도 제가 잘하는 게 많아서요. 그러니 각하께서 친히 주급에 톡톡히 신경을 써 주셔야 해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능력이 출중한 인재는 늘 환영이다. 하지만, 난 그대를 대공저의 사용인으로 들인 게 아니야. 끽해야 미리안의 동태나 살피는 것, 그리고 비밀 유지 차원에서 들인 거지.”

    “…끽해야 라고 하셨어요? 끽해야? 하! 그게 얼마나 힘든데요! 물론, 각하께서 미리안 님을 목숨보다 아끼시니 쉬운 일처럼 보이겠지만. 엄청 힘들거든요?”

    밀러의 표정이 당혹감에 굳었다. 린느의 이해할 수 없는 확언 탓이다.

    “목숨보다 아낀다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원작에서는 그러니까요.’라고 답할 수도 없으니, 린느는 입을 다물었다.

    “무얼 근거로 그대가 이토록 단언하는지 궁금한데.”

    “아니면 말구요.”

    밀러는 짧게 코웃음 치며 린느에게로 몸을 틀어 물어보려던 찰나, 앳된 하녀가 트레이를 밀며 다가왔다. 접시 덮개로 가려져 있지만, 맛 좋은 음식 냄새가 린느의 코끝을 자극했다.

    하녀는 늘 그래왔듯이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이 커다란 접시들을 테이블 위로 나열했다.

    “세상에, 이걸 제가 어떻게 혼자 다 먹어요?”

    “못 먹겠으면 남겨. 누가 다 먹으라 한 적 없다.”

    “아깝게…….”

    밀러는 신문을 다시 펼치며 잔소리를 덧붙였다.

    “내 돈 걱정해 줘서 고맙긴 하다만, 그게 아까웠으면 아침 식사 시간에 정찬실에 왔으면 됐다.”

    “거참 잔소리를 무슨 3절로 하시네. …요.”

    힘 빠지는 웃음과 함께 린느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때맞춰 하녀가 접시 덮개를 열자, 잘 구워진 채소볶음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접시 한편에는 자그마한 조각 고기가 있었는데, 고기 위로 육즙이 잘게 보글보글 끓었다.

    하녀는 3개의 접시 중에서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린느에게 밀었다.

    “아가씨, 샐러드부터 맛보셔요.”

    “고마워요!”

    해맑게 웃으며 답하자, 앳된 하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하녀는 싱긋 웃으며 입가심할 찻잔에 찻물을 쪼르르 따랐다.

    린느는 찻물이 찻잔 가득 채워진 걸 보고서, 밀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각하? 잘 먹을게요!”

    “그러든가 말든가.”

    심드렁한 대답 뒤로 신문지가 촥 하며 다시 펼쳐졌다.

    ‘어휴, 뉘 집 자식이 이렇게 까칠하냐.’

    린느는 픽, 웃으며 샐러드를 기다란 포크로 콕 찍었다.

    신선한 양상추와 토마토 그리고 조각조각 난 사과가 콰득 하며 포크에 찍혔다.

    “방금 밭에서 따온 것처럼 신선하네요?”

    “채소와 찻잎은 대공저에서 직접 공수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밭에 가 보셔도 좋습니다.”

    “대박…. 각하, 저 밭에서 피크닉해도 돼요?”

    “괜히 사용인들 할 일 만들지 말고 얌전히 지내지.”

    린느는 포크를 입에 넣어 싱그러운 채소를 꼭꼭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라도 햇볕을 쐬어야죠. 미리안 님 얼굴 하얀 거 안보이세요?”

    “핑계 좋군. 알아서 해.”

    허락이 떨어지자, 린느는 잘 익은 아스파라거스를 오독오독 앞니로 씹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밀러는 코까지 신문을 내리고 그녀의 뒤통수를 힐끔거렸다.

    린느는 그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고, 잘 익은 고기를 한입에 넣었다. 육즙이 톡톡 터지는 동시에 입 안에서 녹아 사라지는 맛에 뺨에 홍조를 띄웠다.

    “진짜, 대공저 셰프님은 금손이에요.”

    “자작저 셰프도 실력자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밀러는 그녀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하며 신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한 번에 대답해 줄 리가 없지.

    린느는 고개를 잘게 내저으며, 다시 샐러드를 꾹 찔렀다.

    “그런데, 정말 미리안 님과 저는 평생 대공저에서 살아야 해요?”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지?”

    “아니에요?”

    밀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신문 하나를 끝까지 보질 못하게 하는군.’이라며 신문을 다시 접었다.

    “내 장담컨대 영지에 떠도는 소문들은 그대의 입을 통해 나온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쓸데없는 말들을 이렇게 만들까? 그것도 근본 없이 쓸데없는 말.”

    ‘근본이 없긴 왜 없담?’

    집착 남주이니 충분히 대공저에 가둬 둘 가능성이 있지 않나?

    린느의 머릿속에 여러 상념이 부유물처럼 동동 떠다녔다.

    그리고 그 부유물을 단번에 잡아챈 건, 밀러였다.

    “미리안은 쫓기고 있다. 하여, 보호 차원으로 대공저에서 머물고 있어. 미리안을 내 시녀로 둔 것도 눈속임이고.”

    “세상에, 목숨이요? 아, 아니, 누구한테요? 혹시…… 미리안 님의 아버지 때문인가요?”

    “그걸, 그대가 어떻게 알지?”

    “미리안 님께 대강 들었어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 학대를 받았다고…….”

    밀러는 사뭇 진중한 얼굴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고작 한숨을 뱉었을 뿐인데도 그의 우아함이 한숨과 함께 섞여나온 듯 고고했다.

    “미리안은 이 상황을 전혀 몰라.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도 더 불안해하겠지.”

    미리안의 상태는 지금도 충분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보다 더 악화할 테지. 린느는 고개를 저으며 그건 안 된다 일러뒀다.

    ‘미리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하루에 세 번도 도망가겠어.’

    당분간이라도 미리안에겐 비밀로 해야 한다. 착하고 유약한 미리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린느를 위해서라도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그때, 두 사람 사이로 알렉스가 들어섰다.

    “각하, 헥턴 후작가와 파르쉘 후작가에서 각각 연회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한데, 연회일이 같은 날이라 난감합니다.”

    방금까지도 여유롭던 그의 낯에서 불안감이 엿보였다. 그는 괜스레 다 마신 찻잔을 들여다보며 타박하듯 말했다.

    “나중에.”

    근래에 불안 증세가 많이 잦아들긴 했으나, 연회 시즌에 연회장을 누빌 만큼은 아닐 테지. 대공의 건재함을 확인하기 위해 몰려든 귀족들을 상대할 여력이 제게 있을까? 밀러는 제 처지를 곱씹으며 넥타이를 조였다. 그때, 저를 바라보는 청록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

    린느의 눈동자에서 걱정과 불안이 담겨 있었다. 같잖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어 밀러는 그만 실소를 흘렸다. 도대체, 왜 그대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또 그녀의 걱정이 썩 언짢지도 않았다.

    그 사이, 그의 가슴팍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어, 차게 식었던 뺨이 다시 따스해졌다. 그 따스함 덕분에 밀러는 불안증을 씻어 내고 다시 여유로운 얼굴로 린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더 궁금한 건 없나?”

    “네?”

    밀러는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나 린느를 내려다봤다.

    원래에도 커다란 키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방금까지도 불안에 차 있던 금안이, 찬란하게 빛을 내며 린느를 바라봤다.

    “미리안은 그렇다 치고, 그대는 언제까지 대공저에서 지내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냔 소리야. 어제는 잘만 떠들더니.”

    “어…. 미리안 님께서 거처를 찾아 떠나고, 각하께서도 절 믿게 된다면 그땐, 저도 돌아갈 수 있겠죠?”

    그는 피식 웃으며 풀린 정장 단추를 한 손으로 끼웠다.

    대공가 문양이 금실로 새겨진 단추가 햇빛에 반사됐다.

    그의 존귀한 신분을 대변하듯 반짝였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단추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밀러의 미소였다.

    “틀렸어. 세르트 영애, 미리 축하한다.”

    밀러는 써니룸 밖으로 나서려던 걸음을 멈춰, 린느를 돌아봤다. 길쭉한 다리에 널찍한 어깨선에 꼭 맞는 정장이 그의 품격을 대신했다.

    “대공가의 가신이 된 소감은 세르트 자작저에 다녀온 다음에 직접 듣도록 하지. 아, 자작이 아니라 백작.”

    린느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멀어지는 밀러의 걸음 소리를 듣기만 했다.

    “배, 백작? 아니, 백작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왜 가신이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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