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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29화 (29/122)
  • @29화

    단호하게 말해 둘 생각이었으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두 사람 사이가 좁아질수록 더더욱. 황제 앞에서도 잘도 내뱉던 말이 왜 이렇게 뱉어지지가 않는지. 밀러는 한 칸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혹여라도 섀르넌과 괜한 일 만들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덕분에 괜한 일 만들 틈도 없네요!”

    린느는 끝까지 투덜대며 도망치듯 중앙계단을 올랐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놓치지 않겠단 듯 시선을 고정했다.

    “말하는데 도망을 가? 내 저택에서?”

    “도망가긴요? 전 일하러 가는 거예요.”

    “미리안에게 가는 건가? 미리안은 애가 아니니, 적당히 하고 이리 오지?”

    “하, 각하께서 대공저에 저를 꿍쳐 두신 것도 참고 있거든요? 남이야 좀 놔두세요!”

    밀러의 잘난 미간이 팍 구겨졌다.

    “내가… 그대를 꿍쳐 뒀다고?”

    밀러는 자리에서 굳은 채로 실소를 뱉었다. 건방진 영애라며 따지려 할 땐,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밀러는 실소를 뱉으며 알렉스를 향해 몸을 틀었다.

    “지난 연회에 공작저에서 연주한 악단을 찾아.”

    20년 전, 선대 대공이 주최한 연회를 끝으로 대공저에선 음악 소리조차 크게 울린 적 없었다.

    그런 그가 악단을 왜……?

    알렉스는 밀러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의구심을 놓을 수 없었다.

    * * *

    덜컥.

    “리, 린느님?”

    “쉿!”

    린느는 미리안 방문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숨을 골랐다.

    그러자 미리안이 놀란 눈으로 린느를 말똥말똥 바라봤고, 린느는 문에 귀를 가져갔다.

    ‘하, 이놈의 주둥이 진짜. 참아야 하는데!’

    린느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천천히 문에서 등을 뗐다.

    “리, 린느 님 언제 오셨어요?”

    “……미리안 님.”

    린느는 아이처럼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미리안에게 다가가 품에 폭 안겼다. 미리안은 그런 린느의 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어… 대공저에서 지내기로 했어요. 망할. 이 햇빛 한 줌 안 들어오는 대공저에서 전 말라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이게 무슨 일인지……. 그러니까 앞으로 린느 님께서도 대공저에서… 지낸다는 말씀이죠?”

    미리안의 목소리는 다른 때와 달리 선명했으며, 힘마저 실려 있었다.

    “네, 대공저에서 지내기로 했어요……. 혹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의상실 때문에 각하께서 화나신 거 같아요….”

    망할, 속이 그렇게 좁을 줄 알았으면 절대 말도 꺼내지 말걸! 그때, 미리안이 린느의 손을 꼭 잡았다.

    “린느 님, 우리 도망가요.”

    “저도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네요.”

    “정말 도망가면 되잖아요! 네? 이제 우린 둘이잖아요. 더 쉬울 거예요.”

    아니지, 더 어렵지! 누가 도망 여주 아니랄까 봐 바로 도망 계획부터 짜다니.

    “안 돼요. 도망가면 우리 가문부터 아작 낼걸요? 게다가, 도망가 봐야 거기가 거기라구요.”

    “……멸문을 당한다구요?”

    미리안은 입을 가리며 놀란 척 눈을 크게 떴지만, 린느는 그런 미리안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멸문당한다는데도 태평하네. 아, 아니지? 미리안은 가문이 멸문당해도 잃을 게 없잖아…?’

    그럼 진심을 다해 도망갈지도 모른단 소리잖아?

    ‘아, 안 되지. 미리안이 도망가면 그 화를 나한테 다 풀지도 몰라.’

    린느는 사뭇 진중한 얼굴로 미리안을 따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리안 님, 이런 때일수록 절대 도망가면 안 돼요.”

    “왜죠?”

    “생각을 해 보세요. 멸문을 당한단 소리는 미리안 님의 오라버니까지 피해받는다는 소리예요. 아시겠어요?”

    그제야 미리안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하지만, 미리안은 다시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었으니 각하의 손에 닿지 않을 거예요.”

    미리안의 안일한 생각에 린느는 한숨이 절로 끓었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미리안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린느님께서 힘들어하시길래 드린 말씀이었어요. 저는 그렇다 쳐도, 린느님까지 대공저에서 지내는 건 너무 가혹한 거 같아서… 화가 나서 그랬어요. 혹시라도 도망간다면 린느님께 미리 말씀은 드릴게요…….”

    미리 말이라도 해 준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린느는 지친 얼굴로 미리안의 등을 토닥였다.

    * * *

    대공저의 아침은 부산스럽지만 고요하다. 수십 명의 사용인이 대공저를 빡빡 닦고 쓸고, 아침 준비에 여념이 없지만, 티끌의 소음도 없이 시냇물처럼 막힘이 없다. 아침 7시부터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8시면 칼같이 아침 식사를 한다. 9시부터는 자유시간인데, 대개 이 시간에 밀러는 써니룸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간략한 이 패턴은 밀러가 대공이 된 이후로 쭉 이어져 온 일정이었다. 그런데 린느가 있어야 할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고 밀러는 알렉스를 바라봤다.

    “식사 시간이 끝나가는데도 세르트 영애의 머리칼조차 보이지 않는군. 어제 일정을 알려 준 게 맞나?”

    “죄송합니다, 각하!”

    알렉스는 난감한 듯 초조한 얼굴빛으로 정찬실 문만 바라봤다.

    그때, 미리안이 들고 있던 식기류를 소리 내 접시 위로 툭 내려놨다. 밀러는 말없이 미리안을 바라봤다.

    “식사가 마음에 안 드나?”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순간, 대기 중이던 사용인들의 눈이 터질 듯이 크게 뜨인 채 미리안에게 꽂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함한 건 알렉스였으니, 그가 무어라 말릴 틈도 없이 미리안은 그대로 정찬실 밖으로 나섰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밀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망이군.”

    그 말 한마디만 남겨 두고 밀러는 그대로 써니룸으로 향했다. 그러자 사용인들과 알렉스는 허둥대며 밀러의 걸음을 따랐다.

    밀러의 기다란 다리로 몇 걸음 디뎠을 뿐인데도 금세 써니룸에 도착했다. 그가 써니룸에 도착하자 사다리를 짚고 올라가 먼지떨이를 흔들던 하녀가 잽싸게 내려왔다. 그러든가 말든가. 밀러는 한숨과 함께 명령했다.

    “커피.”

    그 말만 남기고 밀러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침부터 기분 참 좋군.”

    밀러의 말에 알렉스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드르륵.

    따사로운 햇볕이 밀러의 정장 바지를 데울 때쯤, 하녀가 트레이를 밀며 들어섰다.

    밀러는 하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신문을 건네받아 펼쳤다.

    “맛있게 드세요.”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놓인 커피잔을 향해 밀러가 시선을 옮겼다.

    커피 향이 어찌나 진하고 향긋한지, 특유의 신문 냄새마저 삼킨 탓이었다.

    그제야 오전 내내 좁히고 있던 미간이 느슨하게 풀렸다.

    “커피 향이 좋군. 원두를 바꿨나?”

    “…그건 모르겠는데요.”

    맹랑한 대답에 밀러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걸 그대가 아니면 누가 알……. 잘난 고개 좀 들어보지? 바닥에 동전이라도 떨어트렸나?”

    밀러의 타박에 하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공저 메이드복과 묘하게 디자인이 달랐다. 어정쩡한 드레스 길이가 마음에 안 들었지, 멋대로 기장을 손봤으며. 메이드복 여기저기엔 귀여운 리본이 얹어져 사랑스러움을 더했다.

    게다가 촌스러운 빵모자는 간단하게 생략했으며 비싸 보이는 귀걸이까지 착용했으니. 밀러는 헛웃음을 뱉었다.

    “도대체, 그 복장은 뭐며,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세르트 영애.”

    “일하는 중인데요?”

    “그러니까, 누가 그대보고 메이드복까지 차려입고 일하라 했냔 말이다. 알렉스인가?”

    금빛 눈동자가 사납게 알렉스를 꽂자, 린느가 양손을 마구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고용주를 위해서 열일하는 거뿐이거든요? 알렉스 님은 죄 없어요.”

    “고용주?”

    “네, 고용주.”

    밀러는 신문을 고이 접어 테이블 위로 가볍게 던졌다. 그리고는 거만하게 몸을 뒤로 기대어 소파 끝에 양팔을 올렸다.

    “내가 그대의 고용주인가?”

    “네네.”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자 밀러는 픽, 웃었다.

    ‘정말 미쳤나? 왜 저렇게 실없이 웃어?’

    린느는 입술을 쭈뼛거리며 트레이 손잡이를 잡았다.

    “아무튼, 즐거운 시간…….”

    “이리 와.”

    청록색 눈을 깜빡이더니, 검지로 가슴께를 쿡 찔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밀러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식사 차려 와.”

    “네, 각하.”

    알렉스는 발바닥에 불붙은 사람처럼 쪼르르 써니룸에서 나갔다.

    “저 식사했는데요?”

    “거짓말하긴.”

    “정말 먹었어요. 아침 식사 차리기 전에 사용인들과 함께 모닝빵 먹었는걸요.”

    “매정한 여인이군. 하다못해 사용인들의 식사를 뺏어 먹나?”

    “뺏어…… 먹다니요?”

    밀러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상체를 린느에게로 기울였다.

    “아침 부엌 담당 사용인들의 식사는 빵이고. 정해진 몫이 있어 그 안에서 그들끼리 나누는 게 보통이지.”

    “허. 그, 그걸 왜 이제 알려 줘요?!”

    뻔뻔하게 묻는 린느를 보며 밀러는 크게 웃었으나 그것도 잠시, 웃음을 뚝 그쳤다.

    “그야, 그대가 이런 맹랑한 짓을 할 줄 몰랐으니까. 그대가 하녀를 자처해 사용인들의 빵을 노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밀러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그럼, 그대에게 아침 식사를 뺏긴 사용인들에게 빵을 더 주도록 하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밀러 곁에 냉큼 앉았다.

    밀러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고소한 원두 향에 픽, 웃었다.

    “도대체 원두를 어떻게 볶았기에 그대에게서 원두 향이 진동을 하는 걸까?”

    “그냥…….”

    커피 박람회에서 근대식 커피 볶는 방법을 시연하는 알바를 했다고 할 수도 없고…….

    린느는 말을 얼버무리더니, 헤 하며 웃어 보였다.

    그러자 밀러는 기다란 검지 위로 린느의 머리칼을 늘어트렸다. 시간이 멈춘 듯, 금빛 눈동자가 린느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픽 웃었다.

    “이것도 그대의 수작 중 하나일까?”

    “수… 작이라뇨. 말씀도. 하하.”

    “린느.”

    밀러가 낮고도 그윽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린느는 놀란 눈으로 밀러를 올려다봤다. 꾹 다물린 밀러의 입술이 떼어지기만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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