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28화 (28/122)
  • @28화

    섀르넌은 넋 나간 얼굴로 ‘비밀… 친구?’라며 읊조렸다.

    밀러는 몰아치는 폭풍우처럼 쐐기를 박기 위해 입을 뗐다.

    “게다가, 세르트 영애는 혼처 찾기도 포기했으니, 당분간 그 넓은 자작저에서 피둥피둥 놀 일만 있겠지. 그렇게 시간 보낼 바에 대공저에서 지내는 게 낫지 않겠나?”

    물론 그 말괄량이가 얌전히 지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에 섀르넌은 믿기지 않단 얼굴로 되물었다.

    “포기요? 혼인을 포기한다니,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귀족 간의 결혼은 가문 간의 거래. 정확히 표현하자면, 혼기 찬 젊은 귀족들을 이용한 가문주들의 거래였다. 그렇기에 결혼 당사자의 의견은 하등 쓸모없으며, 곧 젊은 귀족들의 숙명과도 같거늘. 세르트 영애가 혼인을 포기했단 뜻은 세르트 자작가의 가문주인 세르트 경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세르트 경이 허락했다.”

    이는 밀러 역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세르트 경이 아픈 손가락인 린느를 위해 무리한 게 틀림없다. 부모의 마음이란 그런 건가. 밀러는 세르트 경의 속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이를 핑계로 마음 놓고 그녀를 가신으로 삼을 수 있으니, 그거로 됐다.

    “하여, 조만간 세르트 경에게 서신을 넣을까 한다. 그녀의 후계자 공부를 대공저에서 시키면 어떻겠냐고.”

    밀러는 섀르넌의 안색을 살피며 찻잔을 기울였다. 그의 예상대로 섀르넌의 안색은 영 좋지 못했다.

    “굳이 후계자 공부를 대공저에서 시킬 이유가 없을 텐데요. 세르트 영애의 성정이라면 대공저보단 자작저가 더 편할 테고요.”

    “공작, 잊지 마. 그녀는 내 치부를 목격한 자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그대도 알고 있겠지.”

    밀러의 엄중한 목소리엔 폭력성마저 깃들어 있었다. 섀르넌의 그의 말에 더는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대공가의 가신 정도면 세르트 영애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격이 아닌가?”

    밀러는 몸을 뒤로 기대며 그 기다란 다리를 포개었다. 잘 닦인 구두코가 빛에 반사되며 양복바지가 발목께쯤 올라가 그의 오만한 자세를 완성시켰다.

    고작 예쁜 드레스나 선물하고 금화 몇 푼보다 대공가의 가신 자리가 그녀에게도 훨씬 이득일 터. 서로 밑지는 거 없이 깔끔한 거래가 아닌가. 그는 가슴팍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내 들며 비릿하게 웃었다. 승리를 확신한 조소였다.

    이에 섀르넌의 눈동자가 잠시 방황했으며, 그의 붉은 입술은 달싹이길 반복했다. 말미에 청초한 미소를 입꼬리에 걸쳤다. 그의 입매는 보조개를 얹어 사랑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맞는 말씀입니다. 세르트 영애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죠. 그럼 저 역시 세르트 영애가 후계자 공부를 마칠 때까지,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그녀에 대해 알아가야겠습니다.”

    섀르넌의 고백에 밀러의 웃음기가 뚝 끊어지듯 멈췄다.

    “사실 시답잖은 악단 이야기했을 때부터 세르트 영애에게 궁금한 게 많았거든요. 그날, 댄스를 마치고 그대로 보낸 걸 며칠 내내 후회했어요.”

    밀러는 사납게 시가를 송곳니로 물며 실소를 뱉었다.

    도대체 린느 뷔 세르트가 무슨 짓을 했길래 다들 정신을 못 차릴까?

    그녀가 도대체 뭐길래, 그녀와 스친 인연들은 연어처럼 다시 거슬러 린느를 찾냔 말이다.

    몇 달 동안 대공저에만 박혀 지내던 미리안도 린느와 마주친 이후로 웃음을 찾았고.

    섀르넌과 한 여인을 두고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한다니.

    밀러는 기다랗고 튼튼한 성냥을 칙 그으며 시가 끝을 붉게 달궜다. 그런데도 섀르넌은 끊임없이 미소 지으며 밀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으니. 밀러가 답을 내어 줄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을 것처럼 집요했다.

    “물론 각하께서 세르트 영애를 가신으로 두신다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각하와 달리 영애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으니까요.”

    섀르넌은 노골적으로 ‘이성’이란 단어에 힘을 줘 발음했고, 밀러는 그만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래서. 그 ‘이성’적인 관심으로 공작부인 자리라도 내어 줄 수 있나?”

    공작가의 노공들이 그 꼴을 보고만 있진 않을 테지.

    자작가의 영애를 공작부인으로 둔다면, 명예에 목숨을 거는 그 노공들이 뒷목을 잡고 쓰러질 테니까.

    반면, 대공가의 사정은 달랐다. 당장 평민이 대공비가 되어도 밀러가 눈치 볼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밀러가 만족스러운 낯으로 시가를 창백한 뺨이 홀쭉해질 만큼 진득하게 흡입했다. 그의 잇새로 뿌연 연기가 새어 나오자, 그제야 섀르넌이 입을 뗐다.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니, 단언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은 밀러를 고장 내기에 충분했다. 밀러는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올려 두며 진중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충동적이군. 그대답지 않아.”

    “각하께서 욕심이 과하십니다. 답지 않게요.”

    섀르넌의 지적에 밀러의 반듯한 미간이 잘게 쪼개졌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욕심이란 건지.

    “욕심이라기엔 아직 제대로 욕심부린 적이 없어 당황스럽군. 내가 보기엔 오히려 공작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 같은데. 아닌가?”

    섀르넌은 가볍게 농담 던지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저야 당연히 욕심부려야죠. 전 각하와 달리 세르트 영애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으니까요.”

    섀르넌이 또다시 ‘이성’에 힘을 줘 발음하자, 밀러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성가시단 듯 한쪽 뺨을 치켜올리며 혀를 다셨다. 그러자, 섀르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기한 듯 밀러를 바라봤다.

    “각하, 설마 각하께서도 세르트 영애에게 마음을 품으신 건 아니시죠?”

    거위도 아니고 품긴 뭘 품는다고! 절대 그럴 리 없다 확언하려는 순간. 무언가가 턱, 밀러의 입을 막았다. 밀러의 아픔을 진심으로 얼러 만져 준 청록색 눈동자가 떠오른 탓이다. 표현에 서툰 소년처럼, 그의 금안에는 옅은 불안이 어려 있었다.

    섀르넌은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며 탄식을 삼켰다. 설마 했는데……. 섀르넌은 쫓기는 사람처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대공이 세르트 영애에게 마음을 품는다면, 섀르넌은 그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시작도 못 하고 그녀를 뺏길지도 모른단 생각에 그는 밀러에게 묵례를 하고 응접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때, 뒤에서 또 다른 걸음 소리가 울렸다. 섀르넌은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뒤편에서 울리는 구둣발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각하? 왜…… 따라오시는지.”

    “내 저택인데 누가 누굴 따라간단 소리지?”

    밀러는 어깨에 둘린 두꺼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면서까지 걸음을 재촉했다.

    다각다각 거리는 소리가 점차 폭이 좁혀졌고, 두 남자의 걸음은 자연히 빨라졌으니. 뒤처진 섀르넌이 유치하단 듯 헛웃음을 뱉었다. 로비에 도착해서야 밀러의 구둣발 소리가 뚝 멈췄다.

    “그럼 공작저로 조심히 돌아가길.”

    “이왕 걸음 했으니 세르트 영애에게 인사를 하고 싶은데요.”

    “내가 친히 인사해 주고 있지 않나? 나로는 부족한가?”

    “에이, 설마요. 그냥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섀르넌 공!”

    중앙계단에 서 있던 알렉스가 섀르넌 공작을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알렉스! 어디 있다가 이제 와요? 보고 싶었잖습니까.”

    대공 각하와 단둘이 있느라 진이 빠졌다는 말과 함께 섀르넌은 알렉스와 너스레 떨며 인사를 나눴다. 그때, 밀러의 시선이 중앙계단 2층을 향했으니.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내려오지 마.’

    밀러는 초조한 눈으로 2층만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바람을 산산이 조각내며 린느가 발랄하게 내려왔으니. 청록색 눈동자가 밀러의 금안에 닿자마자, 발랄하던 린느의 미소가 팍 굳었다.

    ‘하, 집돌이. 역시 집에 있었네.’

    린느는 붉은 입술을 꾹 깨물며 걸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세르트 영애?”

    섀르넌 목소리에 린느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머, 세상에! 공작님!”

    린느는 그 작은 두 손바닥으로 야무지게 드레스를 올려 쥔 채로 도도도 뛰어 내려왔다.

    알렉스와 메리가 양팔로 허공을 내저으며 그녀의 걸음을 늦추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대박, 공작님께서 대공저엔 무슨 일이세요?!”

    “저야 각하께 인사차 자주 들리는 편인지라.”

    섀르넌은 입꼬리를 활짝 올려 웃었다.

    린느는 그런 그의 미소를 보며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밀러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자, 린느는 어물쩍 미소를 지웠다.

    “조만간 또 뵙도록 하죠. 세르트 영애께 줄 선물이 있어서요.”

    “선물이요?!”

    린느는 크게 뜨인 눈으로 섀르넌을 바라봤다. 오밀조밀한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런 그녀의 미소를 보며 섀르넌이 픽, 웃었다.

    “연회 끝나고 곧장 보내려 했는데, 여러모로 할 일이 많아 선물이 늦었습니다.”

    린느는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선물이라뇨. 제가 드려야죠!”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섀르넌의 구두로 향했으니.

    연회장에서 열심히 밟아 대던 그의 구두가 생각난 탓이었다.

    “아닙니다. 세르트 영애 덕분에 그날 연회장이 얼마나 분위기가 좋았는데요. 아, 다음에 또 연회를 연다면 초대장을 꼭 보내 드리죠.”

    섀르넌은 천진하게 웃으며 린느의 대답을 종용했다.

    린느는 벅찬 마음을 다독이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다음 연회에도 꼭, 꼭! 참석할게요.”

    섀르넌은 고개를 끄덕이며 린느를 따라 웃었다.

    그것도 잠시. 두 사람 사이로 장벽처럼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알렉스, 공작을 배웅하라.”

    린느는 까치발을 들며 섀르넌을 향해 목을 늘렸지만, 무리였다.

    밀러의 커다란 키에 널찍한 몸체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얼씨구.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신다 이거지?’

    린느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앙계단에 올랐다. 서너 칸 정도 올라서자, 그제야 대공저 현관으로 향하는 섀르넌이 보였다.

    “고, 공작님! 조심히 살펴 가세요!”

    양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요란스럽게 인사하자, 섀르넌도 걸음을 멈춰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낀 밀러가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린느를 바라봤다.

    “원래 인사성이 이렇게나 밝던가? 드레스를 잡고 뛰어와 인사할 만큼?”

    “그럼요? 저 원래 인사성 엄청 밝아요.”

    “그런데. 나한텐 인사도 안 하고?”

    린느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벙찐 얼굴로 밀러를 바라보자, 밀러 역시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중앙계단에 서너 칸이나 올라 있던 린느였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비등비등했다.

    탁.

    밀러는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듯 한 칸 올라섰고, 린느는 본능적으로 주춤했다.

    “아, 아까 인사드렸잖아요? 그런데 또 인사를 해요?”

    “그런 이상한 인사법은 누가 알려 줬지?”

    “상식적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밀러는 기다렸단 듯이 비릿한 조소를 뱉으며, 말미에 반듯하게 잘 넘겨진 검은 머리칼을 한번 쓸어 넘겼다.

    “내가 언제는 상식적이던가?”

    본인이 굉장히 몰상식하단 거 아는가 보지?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제 같은 저택에서 지내는데 어떻게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해요? 이상해요.”

    “이상하긴. 내 저택에서 머물 땐, 내 저택의 법칙을 따라야 편할 거야.”

    거참 이상한 법칙이라고 중얼거리며 린느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웃지 마.”

    “울 순 없잖아요.”

    “그대가 울 리는 없지만. 만약 운다면 등은 두드려 주지.”

    밀러는 자신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못하는 린느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내 말뜻은 섀르넌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말란 소리였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