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린느는 바닥만 바라보며 알렉스의 뒤를 착실히 따랐다.
‘비밀 친구는 무슨 놈의 비밀 친구.’
이제 와서 연회장 일로 꼬투리를 잡힐 줄이야.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다. 까딱하다간, 정말 멸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멸문당하면 금수저 플렉스 삶은 고사하고, 그대로 죽음이 아닌가!
“돌겠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진심이 톡 나왔지만, 눈치 빠른 알렉스는 못 들은 척 묵묵히 앞장섰다.
‘알렉스는 착하니까 뭐라도 귀띔해 주지 않을까?’
바닥만 바라보던 린느가 알렉스의 제복을 콕콕 찔렀다.
“알렉스 님?”
“죄송합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는 듯합니다.”
“눈치도 빠르시네요. 그럼 질문은 받아 주시나요? 도와달란 건 아니고 간단한 질문 정도.”
“어렵지 않습니다.”
알렉스의 제복 구두가 간간이 바닥을 울리는 소리를 냈고, 그 옆에서 또각거리는 린느의 구두 소리가 함께 울렸다.
“각하께선 저를 싫어하시죠?”
노골적인 물음에 알렉스의 입매가 어정쩡하게 굳었다. 면전에 대고 ‘네, 싫어하십니다’라고 답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알렉스의 생각은 린느의 예상과 달랐다.
‘그러게, 각하께서 세르트 영애를 싫어하는 거 같진 않은데……. 또 싫어하시는 거 같기도 하고.’
알렉스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릴 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네? 알렉스 님?”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자, 잘 모르겠다니요? 세상에. 아, 제가 기분 상할까 봐 그러시나요? 아니에요! 전 정말 괜찮아요. 그냥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제가 어떻게 감히 각하의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하하……. 다만, 각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신 데엔 이유가 다 있겠지요.”
알렉스는 눈동자가 사라지도록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이 방입니다, 세르트 영애.”
린느는 긴장한 얼굴로 방문을 바라봤다.
‘대공저 꼭대기 다락방에 가둘 줄 알았는데, 다행이야. 평범해 보여서.’
짙은 고동색의 문은 깔끔하게 코팅되어 있었으며, 문고리는 호텔 문고리처럼 금빛으로 빛났다. 물론, 방문만 멀쩡하고 방 안은 쥐나 벌레가 득실댈지도 모르지만, 일단 문이라도 말끔하니 다행이다.
‘침대라도 있으면 좋겠다….’
알렉스는 친절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덜컥.
“……세상에.”
문이 열리는 동시에 선선한 바람이 린느의 머리칼을 들썩였다.
“청소와 환기 때문에 열어 뒀을 겁니다. 창문 닫아 드리죠.”
톤 다운된 아이보리빛 융단이 알렉스의 구둣발에 폭신폭신 눌렸다. 그것도 잠시, 발걸음을 떼자마자 폭신한 융단이 탄력 좋게 다시 일어났다.
‘와, 대공저는 안 쓰는 방에도 새 가구를 채워 놓나 보네.’
바닥에 깔린 융단도 융단이지만, 곡선으로 잘 다듬어진 가구들도 새것처럼 흠집 하나 없었으니. 린느는 검지로 가구를 조심히 쓸어 만졌다.
“엄청나네요. 제 방보다 더 뻔쩍해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어제 새벽에 급하게 주문을 넣는 바람에 아직 협탁은 도착하지 않았지만요.”
“어제 새벽이요?”
경악을 머금은 린느의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소리는 어제 새벽부터 이미 날 대공저에 잡아 두려는 속셈이었단 소리잖아?’
린느는 교무실에 호출된 학생처럼 초조한 낯빛으로 바닥만 바라봤다.
알렉스는 커다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가 확인하더니, 몸을 핑 돌렸다.
“협탁은 내일이면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간단한 대공저의 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다급히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공저 응접실을 느긋하게 둘러보던 섀르넌 곁으로 밀러가 다가갔다.
“손님이 와서 늦었다.”
“손님이요?”
섀르넌은 산뜻한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지독하게 천진한 얼굴로 밀러를 바라봤다.
손님이라면 응접실에 와 있을 텐데, 응접실에는 밀러와 섀르넌 자신뿐인데?
게다가 바깥에 주차된 마차도 따로 없었기에 궁금할 수밖에.
“무슨 손님이길래요?”
밀러는 상석에 앉으며 픽, 웃었다.
“청포도.”
“청포도?”
섀르넌 역시 천천히 다가와 의자에 걸터앉았다.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소맷귀 아래로 기다란 손가락이 찻잔을 잡았다.
“청포도 납품업자가 왔습니까? 각하께서 청포도를 좋아하시는 줄은 또 몰랐네요.”
섀르넌은 싱긋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잘 말린 찻잎에 뜨거운 찻물이 닿아 은은한 향이 풍미였다.
찻물을 두어 모금 삼킬 때쯤, 밀러 역시 찻잔을 움켜쥐었다.
“세르트 영애 말이다. 먹는 청포도 말고.”
순간, 고장 난 기계처럼 섀르넌의 눈동자와 몸이 멈췄다.
그리고는 입매를 몇 번이나 달싹인 끝에야 말을 뱉었다.
“세, 세르트 영애가 대공저에 왜……. 스토킹 때문입니까?”
“아니, 내가 불렀다.”
그러니까, 왜?
싫다면서 제 손으로 세르트 영애를 왜 데려왔냔 말이다.
섀르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찻잔을 툭 내려놨다.
“겁박을 당하시는 겁니까? 영애 그렇게 안 봤는데…….”
“겁박이라. 하…… 하하!”
밀러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대어 느긋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타고 복도까지 울렸다. 복도에서 대기하던 사용인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웃지만 마시고 말씀을 해 주세요. 혹, 각하께서 난감한 상황이시라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밀러는 넉넉하게 웃고 나선 찻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내내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꿈틀거렸다.
“그대만 알고 있어. 세르트 영애가 기억을 잃었다더군.”
“…기억을 잃어요? 설마, 연회장 기억도요?”
섀르넌의 연푸른 눈동자가 밀러가 비칠 만큼 크게 뜨였다.
“그것보다 훨씬 전 기억을 잃었어. 왜, 요즘 영애의 낌새가 묘하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때를 기점으로 과거 기억이 없다더군.”
섀르넌은 나직이 탄성을 뱉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참에 오해를 푸시고자 영애를 초대하셨나 봅니다.”
밀러는 별다른 대답 없이 찻잔만을 기울였고, 섀르넌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싱긋 웃었다.
“세르트 영애가 대공저에 올 줄 알았더라면 선물을 들고 올 걸 그랬습니다.”
“선물?”
“네, 아시다시피 영애의 댄스가 아주 참신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댄스 슈즈를 맞춤 제작 맡겨 놨었어요. 연회 끝나자마자 맡겼는데 이제야 나온 거 있죠?”
섀르넌은 사이즈 알아내는 것도 일이었다며 가볍게 웃으며 찻잔 손잡이에 검지를 걸었다. 희고 기다란 검지를 바라보며, 밀러가 입을 뗐다.
“댄스 슈즈……. 그 생각을 못 했군. 오늘부터 대공저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내가 직접 전해 주지.”
찰나에 섀르넌의 눈동자가 크게 팽창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세르트 영애가 대공저에서 지낸다니요?”
“안 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지.”
“하, 하지만… 세르트 영애에게 추문이 붙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미리안은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다 이 지역 영애도 아니니 괜찮지만. 세르트 영애는……!”
“추문이 걱정이라면 이미 늦지 않았나 싶은데.”
하긴, 세르트 영애가 대공저를 들쑤시며 집착한다는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졌으니 추문 걱정은 늦어도 아주 늦은 걱정이었다.
‘그렇다 해도, 기억을 잃은 영애에게 너무 가혹한 게 아닐까? 그녀가 저지른 과오가 있긴 하지만…….’
상념들이 뒤엉킬 때쯤, 밀러가 소리를 내어 찻잔을 내려놓자, 그 소리에 섀르넌의 상념이 뚝 하고 끊겼다.
“걱정은 접어 둬. 누구를 걱정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밀러의 눈동자가 묘하게 위협적이었다.
섀르넌에게 쉽게 비치지 않는 눈빛이었기에 섀르넌은 멋쩍게 웃었다.
“…….”
섀르넌의 입가에 내내 머물던 미소가 묽게 옅어지더니 끝내 지워졌다.
뜨거운 찻물을 날름 삼키며, 섀르넌이 말을 이었다.
“그럼, 세르트 영애 또한 미리안처럼 시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만약, 시녀로 두시고자 한다면, 언제까지입니까? 미리안이 대공저를 떠날 때까지입니까?”
섀르넌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밀러는 차분하고도 느릿하게 그의 물음에 답했다.
“정해진 건 없어. 다만, 미리안이 대공저에서 지내는 동안이라도 편안했으면 할 뿐.”
밀러는 처음 미리안을 마주쳤을 때를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백작가의 사생아인 그녀가, 철옹성 같은 백작저 담벼락에 옹송그려 앉아 파르르 떠는 모습.
밀러는 그런 미리안을 보자마자, 말에서 뛰어 내려와 그녀를 일으켰다.
선대 대공비가 살아 돌아온 줄 알고서 한달음에 달려간 거였으나, 죽은 선대 대공비가 살아 돌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사실이 밀러를 더욱 아프게 했으며, 그는 자신보다 더 아픔이 짙은 미리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대공저로 데려왔으니. 그 날래고 날랜 금빛 눈동자가 선대 대공비를 떠올리며 처연한 빛으로 바꼈다. 이에 섀르넌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각하께서 미리안의 사정을 봐주시는 건 좋지만… 세르트 영애는요?”
“세르트 영애야 그녀가 원하는 선물을 주면 되고.”
섀르넌이 말을 아끼자, 두 남자 사이로 정적이 감돌았다. 응접실 전체가 겨울날 마른 가지처럼 메말랐으니. 사용인들은 묘한 분위기를 읽고서 걸음 소리를 죽여 하나둘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마지막 남은 사용인까지 응접실 밖으로 나서자, 밀러가 상체를 테이블로 기대었다.
“미리안은 어차피 떠날 사람이고. 두 사람 사이도 꽤 돈독한 편이니, 함께 지내는 게 무리는 아니다.”
밀러는 린느가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말은 쏙 빼놓고서 말을 마쳤다. 아마, 이 자리에 린느가 있었더라면 또 한바탕했을 테지. 섀르넌은 하늘처럼 맑은 연푸른 눈으로 밀러를 빤히 바라봤다.
“그럼 미리안이 떠난 이후엔 세르트 영애는요?”
“그 또한 미리 생각해 둔 게 있어. 그런데…….”
밀러가 돌연 낯을 굳혀 섀르넌을 빤히 응시했다.
“오늘따라 그대의 질문이 과하군. 왜, 세르트 영애에게 관심이라도 있나?”
성인이 되자마자 막대한 유산과 함께 공작 작위를 이어받은 섀르넌이 뭐가 아쉬워서?
밀러는 삐딱하게 앉아 섀르넌을 밀어붙였다.
섀르넌은 답하기 곤란하거나 얼굴에 철판을 깔 때 사용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제 속을 알아주시는 건 각하뿐이십니다. 맞아요, 세르트 영애에게 자꾸 눈이 가네요.”
눈이 간다는 말에 밀러의 눈동자가 험악하게 뜨였다. 구역을 지키는 매처럼 사나워졌다.
“왜지?”
“공작이 된 후로 저와 처음 댄스를 춘 여인이니까요?”
섀르넌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찻잔을 비웠다.
밀러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이켜는 섀르넌을 살피며 코웃음을 쳤다.
“진심인가? 변명치고는 시답잖군. 게다가 그대와 어울리지 않아. 세르트 영애는 고작 자작가의 영애인걸.”
“에이, 그러기엔 대공 각하와 더 어울리지 않죠. 고작 자작가의 여인인걸요?”
밀러는 섀르넌의 귀여운 말대꾸에 헛웃음을 뱉었다.
동시에 그의 두 팔이 곁에 있던 소파를 모두 감쌀 만큼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는 퍽 여유로운 미소로 섀르넌을 바라봤다.
“공작이 된 후로 첫 댄스 상대가 세르트 영애라 눈이 간다? 뭐 백번 양보해 그럴 수도 있지.”
조각상처럼 잘 뻗은 콧대를 들어 금빛 눈동자를 내리뜨며 섀르넌을 바라봤다.
“그러는 난, 세르트 영애와 비밀 친구 사이인지라.”
밀러는 색정적인 흡혈귀처럼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