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26화 (26/122)

@26화

린느는 밀러의 말뜻을 헤아리고자 했으나, 코앞에 뻗어진 그의 손에 머릿속이 희게 번졌다.

“손잡아.”

명령조에 협박이었지만, 마냥 듣기 거북한 협박은 아니었으니.

린느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커다란 손에 제 손을 얹었다. 그녀가 손끝을 떨자 밀러는 어이없단 듯이 픽 웃었다. 몰래 미리안을 꿰어 내어 의상실로 도망가려 했으면서, 떨긴 뭘 떠나? 파리지옥이 파리를 잡듯, 밀러의 손이 린느의 손을 넉넉하게 잡아챘다.

“이 손으로 쥐어서 놓친 거라곤 그 어떤 것도 없었어. 한데 그대는 마치 비누처럼 요리조리 피하는군.”

밀러는 자신의 손에 꼭 붙잡힌 린느의 손을 보며 승리한 기사처럼 건방지게 웃었다.

반면, 린느는 패잔병처럼 그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생기발랄하던 입술이 바싹 마르자, 그녀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조심스레 밀러를 올려다봤다.

“제 손을 잡고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보는 사람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다분할 거 같은… 데.”

“오해?”

그는 실소와 함께 린느의 손을 잡아끌었다. 잔잔한 호숫가의 물결이 이랑지는 것처럼 유연했으니. 그녀의 구두 굽이 섀르넌의 구두처럼 밀러의 구두에 흠집 낼 일도 없었다. 그는 지휘자처럼 린느의 걸음을 유연하게 이끌었으며 그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살랑살랑 움직였다.

“내가 그대에게 어제 뭐라 했는지 기억은 나나?”

“광대요? 아니, 장난감? 선물이었던가.”

“잔말 말고 당분간 대공저로 오라 했다. 그런데 그걸 못 참아서 그새 머리를 굴려?”

아, 망했다. 이럴까 봐 일부러 미리안의 입을 빌린 건데, 딱 들키다니!

“그, 그건 오해……!”

“게다가 내가 선물로 준 붉은 띠도 안 했고?”

린느는 다급히 머리칼을 만지며 멋쩍은 듯 웃었으나, 밀러는 웃음기 하나 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주 대공저엔 올 생각조차 없었나 보군.”

“그건 아니에요! 아마도…….”

“앞으로 대공저에서 지내라.”

이건 또 무슨 전개람…?

린느가 바보처럼 넋을 빼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보란 듯이 냉랭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대공저에 오래 머문 탓인지, 타고난 피부 결인지 밀러의 흰 피부 위엔 흔한 티끌도 없었다. 그 성역 한가운데엔 보조개가 자리했으며, 린느에게 조소를 뱉을 때마다 그의 보조개가 접혔다. 시원스럽게 잘 빠진 입매는 사람 피라도 삼켰는지 붉은색이 잘 입혀져, 묘하게 색스러웠다.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린느가 돌연 낯을 달리하며 어깨까지 들썩이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예? 아, 아니요. 완전 싫어요!”

“완전?”

그제야 여유롭던 그의 한쪽 눈썹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그럼 좋겠어요?”

“안 될 거 뭐 있다고?”

“참나.”

린느는 헛웃음을 뱉으며 밀러에게 잡힌 제 손을 쏙 뺐다. 그러자 그는 놓친 먹잇감 바라보듯이 그녀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린느는 유연히 팔짱을 끼며 밀러의 시선을 분산시키려 했으나, 밀러는 조소를 뱉으며 더욱 노골적으로 린느를 바라봤다.

그래, 분위기도 묘하게 바뀌었고 미리안도 1층에 나와 있지 않은 걸 보면 일이 있긴 한 게 분명하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작정 따를 수는 없지.

린느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자, 밀러는 장난스레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꺾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각하께서 미리안 님과 그런 사이인 거 제가 모를 줄 알아요?”

‘그런 사이’라는 표현에 밀러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굳이 따지자면 시녀와 주인,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 혹은 후원자와 수혜자 사이겠지. 그런 사이를 두고 굳이 ‘그런 사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밀러는 린느의 엉뚱함에 쯧, 혀를 찼다.

“전 그런 사이에 끼기 싫어요. 솔직히 불편해요.”

불편할 게 많기도 하군. 대공저에 고용된 사용인들도 모조리 불편해할 건가? 린느의 말에 밀러는 이해할 수 없단 듯 눈썹을 굽이쳤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하? 와…… 하!”

그래요, 위대하시고 잘난 대공 각하께선 알 바가 아니겠지만! 미리안은? 착하디착한 미리안은요?! 린느는 까칠하게 눈을 치켜떴다.

“그대가 대공저에서 지낸다면 미리안은 두 팔 벌려 환영할 테니 걱정 마.”

“아,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가 지금보다 더 자주 왕래할 테니……!”

“늦었어. 그 간단한 명령조차 어기고 미리안까지 꾀어내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는.”

왕래는 무슨 왕래, 편도겠지. 밀러는 나직이 실소를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게 엄중한 명령인 줄은 몰랐어요. 그냥 미리안 님과 바깥바람 쐬고 싶었던 건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 줄은 몰랐다구요.”

“그러니까, 명령을 어긴 책임을 지란 소리다. 직접 미리안 곁에서 24시간 붙어 지내며 재깍재깍 내게 보고하면 돼.”

도망 여주 감시를 하라고? 린느는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눈만 돌리면 도망갈 궁리나 하고 있는 미리안을 어떤 수로 잡아 두라고! 린느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다시는! 명령 어기지 않고 잘 지킬게요! 그러니까……!”

“싫다. 그대는 내가 원할 때 날 놔줬던가? 하던 대로 해. 내 명령도 어기고, 대공저 수칙도 마음껏 어겨. 그래야 그대를 마음껏 대공저에 둘 테지.”

보기 좋게 말문이 막히자, 밀러는 만족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사냥에 눈을 뜬 마수처럼 밀러의 눈동자엔 호기심이 어려 있었으니. 그의 그런 눈빛은 린느에게 생경한 불안감을 안겨 줬다. 린느는 저도 모르게 팔짱을 풀고서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대에게 기회는 넘칠 만큼 줬다 생각해. 아무리 그대가 과오를 잊었다 해도, 그대의 과오를 두고 책임을 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대를 믿고 대공저로 들였어. 한데, 그대는 어떻게 행동했지?”

원작 속 밀러였더라면, 진작에 린느의 목을 베고도 남았을 사건들이 주마등을 스치듯 지나쳤다.

의상실에서 미리안과 드레스를 두고 실랑이했을 때, 오페라 극장에서 미리안을 울린 것처럼 보였을 때. 연회장에서 의도치 않게 그의 치부를 듣게 됐을 때에도 밀러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진작에 린느 따위 거슬린다며 죽였을 수도 있었다.

‘저 더러운 성격에 꽤 참아 준 거 같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명령을 어기고 미리안과 쇼핑까지 가려 했으니, 밀러 눈에는 미리안의 도망을 도와주는 거로 보일 법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대공저에서 지내는 건 과하지 않은가. 린느는 뻔뻔하게 말했다.

“물론 각하께서 제 사정을 많이 봐주신 건 알겠지만요. 전 과거 일들이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데 과거 일까지 지금 혼나는 건 조금 억울하네요. 그리고…… 절 믿고 대공저로 부르셨단 말씀은 꽤 감동적인데… 믿는 김에 더 믿어 주시면 안 될까요? 대공저에서 지내는 건 정말 너무 가혹해요. 저도 제 삶을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린느가 울상을 지어 가며 토로하자, 밀러는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시간을 두고 밀러가 물었다.

“그대의 삶이라……. 뭐, 섀르넌 때문인가?”

“예? 네? 뭐 누구요?”

그가 갑자기 섀르넌을 왜 언급하는지 린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썹을 굽이치며 밀러를 바라봤지만, 그는 그런 꼴이 가증스럽단 듯 조소를 뱉었다.

“왜, 섀르넌이란 이름만 들어도 설레나?”

“아…? 아니, 갑자기 공작님이 왜 나오죠? 자, 잠깐만요.”

밀러는 팔짱을 빠듯하게 끼며 씩 웃었다. 두꺼운 옷차림에도 잘 다져진 그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이름만 들어도 말이 안 나오는 지경인가 보군.”

“오해 멈추세요! 갑자기 공작님이 언급돼서 당황한 거뿐이에요!”

“그 말이 그 뜻이지. 다를 게 뭐 있나?”

“다르죠? 당연히 다르죠! 아니. 각하, 혹시 질투하시는 거 아니죠?”

질투란 단어에 밀러의 하얀 미간이 잘게 쪼개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밀러 자신이 질투를 한다고?

“웃기는군. 어디 더 말해 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화내실 일이에요? 그리고 갑자기 공작님 이야기가 왜 나와요?”

툭하면 공작과 다리를 놔 달라 부탁하던 린느가 아닌가. 이젠 더는 제게 관심 없다며 매몰차게 구는 모양새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뭐만 하면 공작부터 찾는 게 더 탐탁지 않았다. 어쩜 그렇게 사람 마음이 쉬운지. 언제는 대공이 없으면 안 된다더니, 이젠 공작인가? 밀러는 그녀가 뻔뻔하다며 혀를 찼다.

“내가 공작을 언급했단 이유로, 그대가 이렇게 화들짝 놀라는 게 더 말이 안 돼.”

“그런데… 제가 공작님께 감정이 생겼다 해도, 각하 눈치 살필 일은 아니잖아요?”

돌연, 밀러의 눈매가 서늘하게 굳었다. 그녀가 명령을 어겼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서웠다.

“더 말해 봐.”

그가 뱉은 한마디가 대공저 로비를 살벌하게 울렸다. 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저 같은 자작가 영애가 어찌 공작님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겠어요? 하하….”

밀러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린느를 빤히 내려다봤다. 허리 뒤로 뒷짐 진 그의 두 손이 희게 질린 채로.

“가능하다면.”

“에?”

“가능하다면, 공작과 친히 지낼 건가?”

“아니, 공작님께서 절 별로 안 좋아하실…….”

“좋아한다면.”

단호하기 그지없는 그의 목소리 뒤로 칼처럼 각을 세운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밀러는 두어 걸음 린느에게 다가갔다.

“공작이 그대를 좋아한다면? 좋다고 홀랑 넘어갈 예정이고?”

‘애초에 멀쩡한 공작이 날 좋아할 일도 없을 텐데 왜 이런 대화를 해야 할까? 아니지, 어쩌다가 공작 이야기로 넘어왔지?’

의문이 부유물처럼 린느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보던 밀러가 협박하듯 말했다.

“공작은 집어치워. 그리고 그대가 대공저에서 지내야만 하는 이유 따위 널리고 널렸으니 시간 낭비도 그만두고.”

“시간 낭비해도 좋으니 말씀해 주세요. 그 이유를요.”

밀러는 어깨를 으쓱하며, 기다렸단 듯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와 비밀 친구라며?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대의 가문을 멸문할 수 있어. 다소 과한 방법이긴 해도 꺼릴 게 없거든. 감히 내 비밀을 알고 있으니, 그 정도 책임은 져야지?”

그는 오만한 얼굴로 어깨를 다시 으쓱했다. 원한다면 다른 이유도 말해 주겠노라 비아냥댔다.

“그대가 대공저에서 떠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내가 그대를 내쫓았을 때 혹은 내가 그대를 믿을 수 있을 때.”

린느가 그의 말에 대꾸조차 못 하자, 밀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알렉스.”

“예, 각하.”

“지낼 방으로 세르트 영애를 안내해. 미리안이 지내는 방과 가까운 곳으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