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어찌나 신나게 몸을 틀었는지 린느의 치맛자락이 그녀의 몸에 촥 감겼으니.
린느는 두 손을 가슴께에 올려 두고선 홍조를 띤 채 미리안을 바라봤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럼요! 아주 좋아요! 내일 의상실에 함께 갈까요?”
촘촘하게 자란 속눈썹을 깜빡이자, 미리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내일요! 헤헤….”
“그럼 내일 봬요, 나의 미리안 님!”
린느는 밀러의 눈초리를 피해 후다닥 마차에 올라탔다.
말꼬리에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린느를 태운 마차가 쌩하니 대공저 밖으로 향하자, 밀러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는 마차를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두꺼운 코트를 벗으면서도 간간이 실소를 뱉었으며, 이미 떠난 마차 자리를 바라보길 여러 번. 밀러는 미간을 좁혀 미리안을 바라봤다.
“미리안.”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리자, 미리안은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세르트 영애에게 의상실을 가고 싶다고 그대가 말했나?”
밀러는 태연하게 코트를 벗어 하녀장에서 건넸다.
하녀장은 초조한 낯으로 미리안을 바라보다 어깨를 들썩이며 뒤늦게 코트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코트 역시 묵직했으니. 두껍고 질 좋은 캐시미어 블랙 코트. 그와 퍽 어울리는 코트였다.
미리안이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밀러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상하군.”
밀러는 두 여인의 앙큼한 비행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 외출을 한다라. 그랬다간, 미리안의 아비가 보낸 이들이 미리안은 물론이고, 린느까지 노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미리안에게 그들의 존재를 알릴까 고민하던 중,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이는 미리안의 작품이 아니다.
‘건방진 청포도 같으니.’
외출이라면 고문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싫어하던 미리안이 아니던가. 그런 미리안이 의상실을 가고 싶다고? 천만에! 린느의 작품이겠지.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다 나는군.’
다른 곳도 아닌 무려 대공저에서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면전에 대고 약을 올려?
배시시 웃는 린느의 웃음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말간 얼굴에서 건방진 미소를 지울 수 있을까?
스테빈스 백작을 들먹이며 협박해도 안 먹혀.
붉은 띠를 선물해 선물 취급을 해도 안 먹혀.
잔말 말고 대공저로 출근하라니까 기어코 잔머리를 굴려?
게다가, 그뿐일까?
혼처를 찾아 달라며 알랑거릴 때는 언제고, 이젠 필요가 없어졌으니 제멋대로 하겠다?
「네네, 저도 별로예요. 그리고 저도 이제 혼처 안 찾아요. 필요 없어졌거든요.」
「각하께 관심 없거든요?」
게다가 섀르넌까지 언급해 신경을 긁어 대기 일쑤이고.
얌전히 대공저로 출근하랬더니 감히 명령을 어겨? 순간, 밀러는 돌연 미소를 지었다.
‘빌미를 알아서 내게 바치는군.’
린느의 발칙한 명령 불복종 덕분에, 기회를 거저 쥐었다. 린느를 대공가의 가신 삼을 기회 말이다. 밀러는 지루한 업무에 투덜댈 린느를 상상하며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부터 그 잘난 얼굴로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이로써,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며, 밀러는 만족스레 웃었다.
지금 이 상황도 그렇듯, 미리안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은 린느뿐이다. 그러니, 린느에게 미리안을 맡기면 일이 편해질 테지. 어디 그뿐일까? 무엇보다도 린느가 대공가의 가신이 돼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그건, 비밀 유지였다.
지난 연회장 테라스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그녀에게 불안 증세를 들켰던가. 물론 그녀에게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이를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후환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여, 그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린느에게 죄를 묻는 대신에 대공가의 가신이란 책임을 물게 하는 거였다.
그럼 놀고먹을 궁리나 하던 그녀의 깜찍한 꿈도 앗아 갈 수 있으며, 밀러 자신의 비밀도 영원히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겉으로 보기엔 대공이 손해 보는 장사였으나, 밀러 본인에게는 더없이 이득인 거래다.
“각하, 말씀하신 서류를 추려서 집무실 테이블에 뒀습니다.”
알렉스가 보고를 마치자, 밀러는 하녀장에게 미리안을 부탁하며 자리를 떠났다. 지금쯤이면 자작저에서 쾌재를 부르고 있을 린느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며, 그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집무실로 향했다.
얼마나 당황할까? 그 맑은 청록색 눈동자에 이상한 말대꾸를 늘어놓는 작은 입술이 벙찐 표정을 짓겠지. 밀러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죄책감에 절여져, 죽지 못해 살던 그에게 유일한 웃음을 주는 존재. 그 깜찍한 쥐새끼를 대공저에 두고 후계자 공부를 시킬 상상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 * *
자작저로 돌아오자마자 린느는 현란한 투스텝을 밟으며 자축했다.
“크흐, 아까 대공 각하 표정 봤어?”
“어쩌시려고 자꾸 각하의 신경을 긁으세요? 네?”
메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타박하기 바빴지만, 린느는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신경 긁을 게 뭐 있어? 어차피 각하께선 미리안 님의 말이라면 다 들어 주시는데. 난 그걸 이용한 거뿐이야.”
“……그런데도 괜찮으세요?”
“웅? 뭐가?”
“아, 아니에요.”
메리는 다급히 말끝을 흐렸지만, 린느는 걸음을 뚝 멈췄다.
“메리, 이건 똑똑히 알아 둬. 난 각하와 미리안 님이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이야. 알았어?”
“…하지만, 저희도 적응할 시간을 주세요. 몇 주 전만 해도 아가씨께서는 각하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는 노래까지 만드셨잖아요.”
드립이 조금 과한데? 노래를 만들긴 무슨!
“그런 적 없, 없거든?”
린느는 웃음기를 쏙 빼며 콧대를 추어올렸다. 그러자, 메리는 보복성 짙은 말투로 일러뒀다.
“네 번째 책장에 두 번째 서랍, 왼편을 잘 찾아보세요. 악보도 있다구요.”
“아, 아무튼 그때의 린느는 없어. 난 이제 각하와 미리안 님을 응원할 거야.”
당당하게 걸음을 뻗어 계단으로 올랐다.
‘어서 둘 사이가 발전되면 좋겠다. 그래야 두 사람이 모두 내게 신경을 끌 테니까.’
그럼 그때부터는 아무도 못 말린다 이거야. 아주 그냥 제국을 떠들썩하게 달구는 사교계의 여신이 되어 줄 테니까! 린느는 발랄한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는?”
“주인님께선 먼저 주무신다고 하셔서요.”
“……벌써? 뭐 또 백작 할아버지가 무슨 말이라도 한 거 아니야?”
“아, 아니에요. 스테빈스 백작님께선 그 이후로 서신조차 보내지 않으셨는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린느는 멈칫하더니 정말 궁금하단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도대체 언제쯤 집에 오셔?”
“글쎄요. 원체 자유로우신 분이라서요.”
빙의된 후로 자작 부인은 얼굴조차 보지도 못했으니, 궁금할 수밖에.
때 되면 알아서 만나겠지 싶어 린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메리, 자기 전에 아버지 어디 불편한 곳 없는지 확인 좀 하라 해 줄래?”
“네, 아가씨!”
액세서리를 풀던 린느의 시선이 거울 너머 비친 붉은 끈에 닿았다.
‘대공저에 올 때마다 붉은 띠를 하라니. 하여튼 이상해….’
잘게 혀를 차며 머리끈을 풀었다. 탐스러운 머리칼이 가느다란 어깨와 등을 가리며 간질였다.
‘내일은 이 망할 붉은 띠 안 해도 되려나? 아, 좋아!’
린느는 자리에 앉아서 머리칼을 이리 틀고 저리 틀며 가지각색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아침 햇살을 만끽하던 세르트 자작이 린느를 보고선 유령을 본 사람처럼 기함했다.
“린느! 웬일로 이 시간에 다 깨어 있더냐?! 아니지, 설마 이제 들어온 게야?”
세르트 자작을 발견한 린느가 헤헤 웃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에이, 무슨 소리예요. 어제 완전 꿀잠 잤는데. 왜요? 화장 이상해요? 피곤해 보여요?”
“아, 아니. 네가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났나 싶어서 물었다.”
세르트 자작은 모닝커피를 마시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저에서 초대장이 도착해도 오후 정찬 시간이 다 되어서야 마지못해 마차에 올라타던 린느가 아니던가?
오늘은 무슨 일로 아침 일찍부터 치장까지 마쳤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린느는 손사래를 치며 호호 웃었다.
“아휴, 아버지도 참. 보세요. 저도 세르트 자작가의 어엿한 후계자가 아니겠어요?”
“그렇긴 하지?”
“그러니, 미리미리 줄을 잘 잡아 두려는 계획인 거죠. 원래 사람은 줄을 잘 타야 하잖아요?”
“설마, 그 줄이 대공 각하를 두고 하는 말이더냐?”
“예! 그러니, 앞으로는 좀 더 일찍 일어나려고요. 일찍 일어난 새가 그, 먼저 잡아먹힌다고 했던가요?”
“……먹이를 먼저 잡아먹는다겠지.”
“아무튼요! 아무튼, 아버지 식사도 잘 챙겨 드시고 조깅도 좀 하시구요. 네?”
“허참! 내가 너한테 잔소리를 다 듣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아, 그리고 아버지.”
톡톡 튀던 린느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세르트 자작은 미세하게 미간을 좁힌 채 린느를 바라봤다.
“스테빈스 백작님께서 이상한 소리 하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대공 각하께서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셨거든요.”
“각, 각하께서?”
“네!”
“오늘따라 요상한 말을 잘도 하는구나. 도대체 각하께서 네가 뭐가 예쁘다고 자꾸 도와주시는지….”
제 눈에야 예쁜 딸이지, 밀러에게는 지독한 스토커가 아닌가. 그런데도 밀러가 자꾸 린느를 곁에 두고 있으니 불안했다. 때문에 세르트 경은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차마 대공저에 다녀온 딸을 잡아 두고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대공저로 찾아갈 수도 없는 처지에 속앓이만 했다. 린느는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하게 웃었다.
“제가 조금 대책 없어 보이긴 해도 다 대책을 세워 두고 놀거든요. 아무튼, 아버지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알았죠?”
“걱정 마라. 아직 내 울타리는 내가 건사할 수 있다.”
세르트 자작은 인자하게 웃으며 린느의 어깨를 톡톡 토닥였다.
그때, 대공저에서 마차가 도착하여 로비 앞에 유연히 멈춰 섰다.
“그래, 오늘도 잘 다녀오너라. 말썽부리지 말고.”
“다녀올게요, 아버지!”
린느는 배시시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세르트 자작은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모닝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도 세르트 자작은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덜컹덜컹.
마차 바퀴가 빠질 만큼 속도에 불이 붙었다.
덜컹.
내실 창문 밖을 바라보던 린느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이렇게 급해? 마부 아저씨 화장실 급한 거 아니야?”
“모, 모르겠어요.”
메리 역시 당황한 얼굴로 반대편 창문을 살폈고, 창문 밖으로는 목가적인 분위기의 밭들이 늘어서 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평온한 분위기였다.
“잠깐, 왜…… 대공저 쪽으로 가는 거지? 의상실에서 미리안 님과 만나기로 했는데?”
당장 마부에게 따져 묻기 위해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창문을 메리가 열어젖혔다.
달칵달칵.
“아, 안 열리는데요!?”
메리는 희게 질린 얼굴로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달각달각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보다 못한 린느가 자리를 옮겨 작은 문을 퉁퉁 두들겼지만, 돌아온 건 말의 포효였다.
그리고 말의 포효가 잦아들 때쯤, 우뚝 솟은 대공저 지붕이 보였다.
‘망했다. 이거 뭔가 잘못됐어. 미친, 도망쳐? 마차 문 열고?’
메리는 희게 질린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고, 린느는 입술을 깨물며 눈동자를 바삐 움직였다. 상대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 집착남주 밀러가 아닌가. 겁날 수밖에.
덜컥.
마차가 정차하자마자 마차 문이 힘없이 열렸다. 문 뒤로 맹수처럼 날카로운 금빛 눈동자가 훤히 보였다.
“내리지?”
밀러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눈치 빠른 메리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고, 린느 역시 천천히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린느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미, 미리안이 없어.’
대공저에 놀러 올 때마다 해맑게 웃으며 1층에서 기다려 주던 미리안이 없다.
그 대신, 마차 문이 부서져라 닫는 밀러뿐.
“미리안을 찾나?”
밀러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린느를 빤히 내려다봤다.
금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볼 때보다 훨씬 밝게 빛나고 있었다. 분노한 태양처럼.
“시내로 갈 마차가 대공저로 왔으니 퍽 불안하겠지. 왜, 이제야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나?”
당연하다마다. 린느는 바보처럼 밀러를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벌집을 건드려도 이보단 나을 테지.
“내 명령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지.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