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협박? 그대가 날?”
“협박에 위아래가 어디 있겠어요? 협박이라기보단 소소한 제안이랄까요?”
린느는 어깨를 잘게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각하의 말씀대로 미리안 님의 선물 할게요. 각하께 그간 끼친 피해를 보상한다는 마음으로요. 단, 조건이 있어요.”
밀러는 우아하게 턱짓하며 날카롭게 미소 지었다.
“들어나 보지. 건방지긴.”
조별 과제 발표하는 학생처럼 린느는 마지못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뗐다.
“대공저로 출근하는 대신에 미리안님과 시내 구경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인생 최대 난제에 봉착한 사람처럼 밀러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누가 보면 함께 유학이라도 가겠다는 줄 알겠네!
린느는 두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당돌하게 말했다.
“글쎄 저만 믿으세요! 저 노는 데에 진심인 사람이에요. 매일 나가겠단 것도 아니고요. 네?”
그래, 그게 걱정스럽단 거다. 미리안의 아비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돼 있건만. 이대로 두 사람이 외출이라도 했다간, 사정을 모르는 린느 역시 미리안과 함께 공격당할지도 모른다. 사고란 순식간에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밀러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위험해.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상의하지. 당분간은 얌전히 대공저에 오도록.”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밀러는 린느에게 한마디만 더 꺼내면 섀르넌을 다신 못 보게 하겠다며 협박도 곁들였다.
* * *
일주일에 4번이라며!
언제부턴가 아침마다 린느를 반긴 건, 메리도 아니고 대공저에서 도착한 초대장이었다.
이로써 백작 할아버지와 마주칠 일이 사라졌기에 아주 좋지만…….
‘밀러, 내 핑계 대면서 귀족들과 사교모임 빠지려던 거 아니었어? 그런데 나한테 이렇게 초대장을 보낸다고?’
이렇게 되면, 밀러는 더는 린느의 스토킹을 핑계로 대공저에서 머물 명분을 잃는다.
그렇게 좋은 명분을 제 손으로 가져다 버린다고?
‘아, 이렇게라도 날 대공저로 불러들여서 미리안을 웃게 하고 싶다? 햐, 눈물 나는 집착남주구만.’
린느는 아침부터 거하게 착각한 채로 마차에서 내렸다.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목을 꺾어 가며 웅장한 대공저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현생에서 못한 취뽀를 이렇게 하네.’
이 정도면 대공저에 ‘놀러’ 오는 게 아니라 ‘출근’이니까, 취뽀라면 취뽀겠지!
어쨌든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패인 밀러를 제 편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거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린느 님!”
“미리안 님? 여태 1층에서 기다리신 거예요?”
“네!”
미리안은 린느의 팔을 끌며 배시시 웃었다.
“린느 님, 식사는 하셨어요?”
“미리안 님은요?”
“저는 아직…….”
“그럼 같이할래요?”
“네!”
신문지가 촥 하며 펼쳐지더니 두 사람의 평화로운 대화를 사정없이 끊었다.
그리고 그 신문지 위로 금빛 눈동자가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아이 깜짝야. 하하, 각하도 계셨군요?”
“나도 함께하지, 식사.”
밀러는 신문지를 접고선, 몸을 일으켰다.
“가, 같이요? 굳이?”
밀러는 린느의 물음에 대답 대신 정찬실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어서 가요……!”
미리안은 린느의 속도 모르고 팔을 잡고 끌었다. 그녀의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 탓에 거절하지 못했다.
‘…불편한데.’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도 곧잘 하지만, 밀러와의 식사는 불편할 수밖에!
린느는 마른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밀러와는 대화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세상에 함께 식사를 한다니.
‘식사 끝나고 손을 따야 할지도 몰라.’
린느는 미리안의 손에 질질 끌려가 정찬실 자리에 떡하니 앉았다.
천진한 미리안은 린느 곁에 찰싹 붙어 방긋방긋 웃기 바빴다.
린느를 중심으로 왼편으로는 미리안이 붉은 눈을 깜빡거리며 웃기 바쁘고. 오른편엔 식전주를 마시는 밀러가 차지했다. 린느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식전주를 삼킬 때마다 잘빠진 그의 울대가 울컥하고 색스럽게 움직인 탓이다.
‘맥주 광고 모델도 부럽지 않네.’
린느는 밀러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도 잠시, 밀러는 타박하듯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뭘 보나?”
“예?”
“뭘 보냐고 물었어.”
“아, 그…….”
네 울대를 봤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하지. 린느는 태연한 척 말했다.
“제겐 왜 식전주를 안 주시나 해서요. 저도 술이라면 자신 있거든요.”
밀러는 들고 있던 자신의 빈 잔과 린느를 번갈아 봤다. 식전주를 마시겠다고? 이 대낮에 대공저에서? 린느가 고개를 잘게 끄덕이며 잔을 달라 손짓하자, 밀러는 어이가 없는지 픽 웃었다.
“내 저택에서 술을 달라는 여인은 또 처음이군. 그것도 정오 정찬에 말이지?”
“프레쉬하고 좋죠? 저도 주세요, 그 술.”
린느는 검지로 밀러의 빈 잔을 콕 짚으며 입매를 올려 웃었다.
장난기 어린 그녀의 미소에 밀러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러든가.”
밀러가 곁에 있던 사용인에게 턱짓하자, 군기가 바짝 든 하인이 술잔과 술병을 가져와 따랐다. 적갈색의 와인이 투명한 빈 잔을 채우며 붉게 물들였고, 린느는 와인 잔을 보는 척하며 밀러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는 그새 다시 완벽한 얼굴로 우아하게 식전주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턱짓과 손짓을 보자면 유능한 지휘자와 같다. 그의 손짓, 턱짓 하나에 수십 명의 사용인이 기꺼워하며 움직이니까. 아니지, 그의 턱짓에 고작 사용인들만 움직이던가?
귀족이며 뒷선으로 물러난 황족도 그의 턱짓에 움직이니, 그의 오만함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그렇게 세상이 제 발밑에 있는 신처럼, 그는 명령과 무척 어울리는 남자다. 그런 대단한 남자가 원작에선 허무하게도 미리안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미리안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뜻이겠지. 대단한 사랑 나셨어.’
린느는 잘게 고개를 내저으며 나직이 혀를 찼다.
“레이디, 더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감사해요!”
하인은 가볍게 묵례를 하더니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린느는 술잔에 손을 걸쳐 대충 허공에서 두어 번 흔들었다. 그 커다란 눈망울엔 호기심이 잔뜩 어려 있어, 와인 잔을 요리조리 살피기 바빴다. 자그마한 코를 가져다 대어 와인 향을 맡더니 그만 꼴깍 삼켰다.
‘으, 소주가 그립다.’
쓴맛에 콧잔등을 찌푸리더니, 빈 잔을 테이블에 툭 내려놨다. 그러자 밀러는 빈잔과 린느를 번갈아 보더니 간헐적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원래 늘 그렇게 술을 단숨에 마시나?”
“네…? 뭐, 그런 편이죠?”
“하, 하하……. 돌아 버리겠군.”
밀러는 돌연 웃음기를 지우며 린느를 신기한 물건 보듯 고개를 갸우뚱대며 바라봤다.
“린느 님, 와인 맛있어요?”
“맛…… 은 모르겠는데요?”
“저도 먹어 볼래요…!”
“안 돼요. 미리안 님은 이런 독한 거 못 마셔요. 미리안 님은 이따가 따듯한 코코아나 마셔요. 알았죠?”
“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미리안은 린느를 보며 쉴 틈 없이 웃기 바빴다.
* * *
우려와 달리 밀러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음식 맛이 일품이었다.
‘하, 오늘부터 대공저 셰프님의 팬이 되겠어요…….’
린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찻잔을 기울였다.
“오늘처럼 매일 매일 린느 님과 함께 식사하고 싶어요…!”
“저두요!”
미리안은 어제의 근심 따위 잊은 듯이 천진한 표정으로 코코아 잔을 기울였다.
린느는 꼭 닫힌 문을 다시 확인하며 미리안에게 속삭였다.
“미리안 님, 어제 화내서 미안해요.”
“미, 미안하시다니요! 제가 더 죄송하죠. 어제 린느 님 가신 후에 혼자 고민해 봤는데 제가 너무…… 대책 없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조금 그러긴 했어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알았죠?”
“…네. 린느 님께서 대공저에 자주 놀러 와 주시면 저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거참 듣던 중에 아주아주 반가운 소식이네요.”
린느는 헤헤 웃으며 뜨거운 찻물을 홀짝였다.
“저 일주일에 4번은 대공저에 들를 거에요. 그러니까, 부디 도망이란 말씀은 입에 올리지도 말아 주세요. 알았죠? 약속!”
미리안은 평소처럼 환히 웃으며 손가락까지 걸어 약속했다.
“그런데 미리안 님, 근처 시내로 놀러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반달로 휘었다.
“전 린느 님만 계시면 대공저 안에서도 웃을 수 있어요.”
“그래도 매일 대공저에서만 놀기엔 좀 그렇지 않아요? 하하…. 맛있는 디저트 가게도 놀러 가고 싶지 않아요?”
“움, 쉐프님의 쿠키도 훌륭한걸요?”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매번 같은 디저트보단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디저트도 먹구. 아, 살롱도 가 보고 의상실도 가 보고. 좋지 않아요?”
“전…….”
미리안은 초조한 낯빛으로 조심스레 입을 뗐다.
“무서워요.”
“왜, 왜요?”
“프레이 님께서 그랬어요……. 그런 곳에는 무서운 영애들이 많다구요.”
“아이고, 그 무서운 영애들 프레이 님 혼자서도 다 이겨요! 게다가 미리안 님 곁엔 저도 있잖아요!”
“저, 정말 그럴까요? 저번 의상실에서도… 무서웠단 말이에요.”
“저랑 마주친 그날요?”
“네. 아, 리, 린느 님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바깥이 무서워서요…….”
이는 미리안이 어릴 적부터 구박만 받으며 살아온 탓이다.
밀러를 만나기 전에는 모진 아버지 때문에 백작저에 갇혀 살다시피 했으니, 모든 게 다 무서울 수밖에.
“미리안 님, 별거 없어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걸요? 게다가, 제가 옆에 있을 테니 너무 겁먹지 마세요.”
미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코코아 잔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찻잔을 모두 비우고도 쫄랑쫄랑 대화를 나눴으니. 대화 내용은 시답잖은 이야기부터 함께 놀러 다니는 영애들 이야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화창하던 대공저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쯤에야 두 사람은 대공저 로비로 내려왔다.
대공저로 막 들어서던 밀러가 린느와 미리안을 빤히 바라봤다.
“미리안 님, 그럼 또 놀러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지내세요. 알았죠?”
“네…!”
린느는 평소와 달리 얌전빼며 밀러에게 인사했고, 밀러는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안 하던 짓을 한다며 타박하려 했으나 밀러는 그만 잔소리를 꾹 삼켰다. 그러자 린느는 숫자를 세며 느릿하게 마차로 향했다.
‘3.’
린느의 드레스가 마차에 닿았다.
‘2.’
미리안은 오페라 배우처럼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밀러는 그런 미리안을 의심하듯 바라봤다.
‘1.’
“린느 님! 다, 다음엔 의상실에 같이 가 보실래요?”
미리안의 외침에 린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참기 바빴으나. 밀러는 돌연 사나운 얼굴로 린느와 미리안을 번갈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