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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23화 (23/122)
  • @23화

    그의 조소에 린느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지만, 교무실에 끌려온 학생처럼 어딘가 굳어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 기억을 잃었다 했지.”

    밀러는 만년필을 톡 내려놓더니, 린느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맹수처럼 날래면서도 작열하는 태양처럼 우직했으니. 그런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건, 꽤 버거운 일이었다.

    ‘치사하게도 잘생겼네.’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답지만, 압도적인 크기와 위력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태양처럼. 그 역시 태양과 닮아 있었다. 이래서 밀러가 제국의 제2의 태양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 린느는 밀러에게서 시선을 떼며 귓바퀴를 붉게 데웠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아무래도 그대의 혼처는 못 찾겠다. 그렇다 하여 섀르넌과의 만남 주선은 꿈도 꾸진 말고.”

    그런 중요한 일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뱉는다고? 누가 보면 오늘 저녁 식사에 필요한 식재료를 못 찾은 사람처럼 태연하네? 린느는 돌연 낯을 달리했다.

    “아니, 제가 열 명과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명인데. 그 한 명을 못 찾는다니 말이 되나요?”

    “그대의 말이 옳아. 말도 안 되지.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걸 가능하게 만든 건 그대가 아닌가?”

    “그, 그렇게 자꾸 과거 일을 자꾸 꺼내시면 거래는 없던 일로 하겠어요.”

    “기억은 잃었어도 여전히 뻔뻔하군.”

    그래서 원하는 게 이거야? 집무실까지 사람 불러다가 무안 주는 거?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잘게 저었다.

    “네네, 저 뻔뻔해요. 그리고 이제 혼처 찾을 필요 없어요.”

    “뭐?”

    린느는 밀러에게로 시선을 옮겨 보란 듯이 입 모양을 선명하게 보였다.

    “결혼 안 해도 된다구요.”

    “세르트 경의 억장이 무너지겠군. 애지중지 키운 영애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니. 하.”

    “저희 아버지도 허락하신 일이에요. 아시다시피, 제가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잘난 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으나, 린느는 그 보기 좋은 꼴을 그만 놓쳤다.

    그녀는 죄 없는 대리석 바닥을 보며 밀러 욕을 몰래 삼키기 바빴으니.

    밀러는 린느의 머리카락에 가지런히 엮인 붉은 띠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세르트 경이 허락을 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사실인가?”

    그의 물음에는 묘한 기운이 담겨 있었지만, 린느는 무심히 대답했다.

    “네,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여쭤보세요.”

    “그래서, 정말 혼처를 더는 찾지 않겠단 말인가?”

    “그렇다니까요? 물론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당장은 그래요.”

    방금까지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으나, 밀러는 금세 입매를 비뚜름하게 비틀어 웃었다. 마치, 대단한 계획이라도 떠오른 악당처럼 그의 미소는 끈덕지게도 색정적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론 자작저에서 피둥피둥 놀 일만 남았겠군?”

    “당분간은 아마도…….”

    “그래, 좋아.”

    묘하게 들뜬 목소리에 린느가 고개를 들어 밀러를 바라봤다.

    먹잇감을 코앞에 둔 맹수처럼 밀러의 눈빛이 영 위험했다.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뒤늦게 수습하고자 했지만, 밀러가 냉큼 린느의 말을 낚아챘다.

    “어차피 자작저에서 쉴 참이면, 대공저에 놀러 와라.”

    린느는 눈을 깜빡거리며 밀러를 빤히 바라봤다.

    잠시 멈칫하더니, 린느는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저 남자 지금 나보고 대공저에 놀러 오라 한 거야?’

    청록색 눈동자가 중심을 못 잡고 자꾸만 휘청거렸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만족스러운 건지. 밀러는 픽 웃었다.

    “왜, 감격에 겨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나?”

    잘 뻗은 콧대를 치켜들며 린느에게 거침없이 조소했다.

    “이럴 땐 각하께서 기회를 주시어 영광이라고 하면 된다.”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어요. 지금 제게 대공저에 ‘놀러’ 오라고 하신 거 맞아요?”

    “놀러든 일하러든. 아, 그대는 뭐든 좋으려나?”

    그는 말미에 오만한 미소도 잊지 않았다. 이에 린느 역시 조소로 맞받아쳤다.

    “대공 각하, 아직 오해가 덜 풀린 거 같은데요. 저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각하께 관심 없어요.”

    밀러는 다시 조소를 터트렸다. 마치, ‘그래, 그렇다 쳐 줄게’라는 식의 조소였다.

    “섀르넌 공작님이라면 몰라도.”

    밀러의 조소로 가득하던 집무실이 영하로 기온이 떨어진 듯 차게 식었다.

    “섀르넌이라 했나?”

    “아니요?”

    “난 말대꾸보다 거짓말을 더 싫어한다.”

    “맞아요…….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지만, 왠지 죄송하다고 해야만 할 거 같은 분위기가 아닌가.

    그는 헛웃음과 함께 의자 뒤로 몸을 기대었다. 왕좌에 올라앉은 폭군처럼 린느를 서늘하게 쏘아봤다. 그때마다 벌집을 건들어 성난 말벌들처럼, 밀러의 눈빛 하나하나가 린느의 여기저기를 쿡쿡 찔렀다. 린느는 숨죽여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섀르넌이랑 연결해 달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새삼스럽게.’

    밀러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심기가 불편한 듯 노기 어린 말로 물었다.

    “그대의 입에서 섀르넌의 이름은 그만 듣고 싶은데. 벌써 그만큼 친해지기라도 했나? 연서라도 나눴나 보군.”

    금빛 눈동자가 유능한 경관처럼 린느의 표정을 살폈고. 취조하는 그의 시선은 퍽 엄중하면서도 유연했다. 그러자 린느는 드레스 레이스를 가지고 놀던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틈이 있어야 하죠.”

    하루가 멀게 대공저로 불러들이는데 섀르넌과 연서 나눌 시간이 어디 있냐고! 이게 다 각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린느는 꾹 참았다.

    “틈…?”

    그사이 밀러는 린느의 말대꾸에 그대로 굳었다. 마치 덫을 발견한 군인처럼 동공이 확장된 채로. 그러거나 말거나, 린느는 몸을 배배 꼬며 배시시 웃었다.

    “저번 연회에서 공작님의 구두를 망치는 바람에 제가 고민이 많거든요. 그러니 각하께서 도와주시면……!”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배배 꼬는 모습에 밀러는 당혹감을 감추고 타박했다.

    “그래서 결론은 섀르넌과 자리를 마련해 주길 바란단 소리겠지.”

    “네!”

    “싫다.”

    “네? 아, 아니 그냥 물어라도 봐 주실 수 있잖아요.”

    “그러기 싫다.”

    “못 하시는 게 아니라, 안 하시는 거죠? 제 혼처도 이렇게 막으신 거 아니에요? 아니, 할 수 있으시면서 왜…!”

    “섀르넌 공작을 그대와 같은 집착병 말기 환자에게 떠밀 수 없지. 이제 막 공작이 된 청년을 벼랑에 내몰기 싫거든.”

    “……제가 벼랑이에요?”

    “아마도.”

    린느가 섀르넌 공작을 입에 올린 후로 밀러는 입꼬리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바싹 마른 호숫가처럼 메마른 얼굴로 린느에게 명령했다.

    “다시는 내 앞에서 그 입으로 섀르넌 올리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왜, 왜죠?”

    “모른다. 그냥 기분 더러워. 안 되겠군. 일주일에 2번으로 생각하려 했는데, 괘씸하니 3번. 아니, 4번. 알렉스에게 그대의 출근표를 만들어 두라 할 테니 잔머리 굴리지 마.”

    밀러의 기다란 검지가 린느 머리칼에 묶인 붉은 띠를 가리키자, 린느는 그의 검지 끝을 따라 청록색 눈동자를 위로 올려 도르르 굴렸다. 머리에 묶인 붉은 끈을 보며, 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죠. 제가 왜 이딴 머리끈이나 묶으며 대공저에 출근해야 하죠? 각하께선 제 혼처도 못 찾으셨으면서? 게다가 공작님과의 만남도 이렇게 싫어하실 건 또 뭐예요?!”

    섀르넌의 이름을 올리지 말라 했더니, ‘공작님’이란 호칭으로 냉큼 바꿔 말하다니. 린느의 얄미운 짓에 밀러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잠시, 돌연 웃음기를 걷어 내며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 그대의 혼처를 못 찾은 게 아니고, 안 찾은 거다. 이러면 대답이 되나? 저 볼일 끝났다고 냉큼 낯을 달리하는데, 누구 좋으라고 그대의 혼처를 찾아 주나?”

    “그래서 제 혼처를 안 찾으신 거예요?”

    린느는 구시렁대며 밀러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품은 계획을 린느에게 말할 때가 아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밀러는 무성의한 얼굴로 그녀의 물음을 무시했다. 그 모습에 린느는 미간을 좁혔다.

    ‘미리안 때문이겠지. 내가 연애라도 한다면, 미리안이 외로워질까 봐 혼처도 안 알아본 거였네.’

    이 남자는 어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미리안일까? 그에게 확답을 들은 건 아니지만, 린느는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다. 더불어 린느는 밀러보다 자신을 더 잘 따르는 미리안에게 의구심마저 들었다.

    “혼처를 안 찾아 준 게 그렇게 서운한가? 그대의 한숨 정도면 로비에 있는 벽난로 불도 끄겠군.”

    밀러의 말투엔 언짢음이 가득했으나, 린느는 그의 타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각하, 저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요. 미리안 님은 절 왜 좋아하는 거죠?”

    “그대가 홀려 놓고 내게 물어보나? 나도 궁금하군. 도대체 무슨 수작으로 미리안의 마음을 열어 놨는지.”

    “……수작이라뇨. 거참 표현도 과하시네요.”

    “과한 건 그대의 과거의 행태다.”

    “그건 인정.”

    밀러는 눈썹을 물결치며 린느를 바라보더니, 크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건 또 무슨 요망한 대답이냐며 따지려던 찰나를 린느가 날름 채갔다.

    “그러니까, 저는 잊은 과거지만 제가 과거에 막 대공저를 들쑤시고 그랬잖아요?”

    “고작 그뿐이라 생각하나?”

    “큼흠, 그러니까 그 꼴을 미리안 님이 아시고도 절 왜 좋아하시는 거죠? 들어보니 제가 막 미리안 님께도 이상한 편지 보냈다던데…….”

    “미리안은 그대가 저지른 과오를 모른다.”

    “모른다니요? 그럴 수가 있어요?”

    밀러는 테이블에 기대어,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더니 턱을 괴었다. 오만하게 반쯤 뜨인 금안이 샹들리에 빛에 반짝였다.

    “미리안은 대공저에 도착하자마자 석 달 정도 내외를 끊었어. 간혹 프레이 영애가 대공저에 들르긴 했다만, 그뿐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린느의 추태를 알지만 정작 당사자인 미리안은 모른다니.

    그렇다면 말이 달라진다. 아니, 상황도 달라질 테지.

    ‘그럼 미리안은 순수하게 날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내게 도망갈 거란 말도 미리 해 준 거고?’

    린느는 머리와 마음 모두 복잡해져 한숨만 들이쉬고 내쉬었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백금발 머리칼에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숨어든 붉은 띠. 동그란 이마에 애교머리가 사랑스럽게 정리되어 있었다. 옴폭 들어간 눈두덩이에 촘촘하게 자리한 속눈썹. 거기에 빛에 반사된 민트색 눈동자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밀러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잘난 얼굴이라 마음이 미운 건가?’

    아니, 마음도 미운 게 맞나? 이젠 모르겠다. 며칠 전 그녀가 대공저에 처음 방문한 그날 이후로 모든 게 틀어졌다.

    「한때나마 좋아했던 사람의 아픔을 이용할 생각 추호도 없어요. 차라리 쿨하게 차이는 게 나아요.」

    이전처럼 계속 못된 짓이나 할 것이지, 갑자기 노선을 바꿀 게 뭐냔 말이다.

    그녀가 뱉은 말과 진심 어린 청록색 눈동자가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밀러는 비스듬히 고개를 젖혀, 린느의 가느다란 손끝을 바라봤다.

    ‘궁금하군, 이 깜찍한 쥐새끼의 속이.’

    밀러는 한숨과 코웃음을 섞어 뱉었다.

    “말한 대로 대공저에 꼬박꼬박 들러. 협박이자 통보이니 알아서 처신하길.”

    그 말을 끝으로 밀러는 다시 서류에 손을 뻗었다. 린느는 그런 그를 멀뚱히 지켜봤다.

    “할 말 끝났으니 나가도 좋다.”

    “저는 안 끝났는데……. 그러니까 전 미리안님을 위한 선물이니, 앞으로 대공저로 꼬박꼬박 출근하란 거죠? 각하의 취향이 담긴 빨간 끈을 두른 채로?”

    저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밀러는 타박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실소를 뱉었다.

    “소유권을 묻는 건가? 뭐든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란 뜻이다. 또 질문 있나?”

    “저어… 질문은 아니구요. 제가 먼저 협박당했으니 저도 각하께 협박해도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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