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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22화 (22/122)
  • @22화

    린느는 동상처럼 굳어 미리안을 바라봤다. 꼭 해야 하는 말은 하라 했더니 이렇게 바로 도망친다는 말부터 한다고? 얼빠진 얼굴로 미리안을 응시했다. 조금은 우스꽝스럽고도 멍한 표정이었지만 표정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도, 도망이라 하셨어요?”

    “네. 오라버니께도 미리 말씀드렸어요.”

    “냉큼 도망 나오래요?”

    “아, 아니요.”

    린느는 미간을 좁힌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정말 어렵네. 아주 어려워. 이 고구마 도망여주 때문에…!’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걸. 어쩜 틈만 나면 도망을 가려 한담? 재주라면 재주겠네. 그래도 미리 말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린느는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미리안 님, 꼭 필요한 말은 해야 하는 게 맞지만. 도망간다는 협박은 제게 꼭 해야 할 말이었을까 싶은데요. 하…….”

    미리안은 사슴 같은 눈망울을 파르르 떨며 울상을 지었다. 지금 울고 싶은 게 누군데! 응, 안 통해. 린느는 검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음음, 우는 거 안 돼요. 지금 미리안 님의 눈물을 받아 줄 여유 없어요.”

    “하지만… 꼭 말씀해 달라 하셨잖아요. 게다가 저는 말씀드릴 분이…… 린느 님뿐인걸요….”

    미리안은 초연한 몰골로 젖은 눈을 닦아 냈으니. 마치, 사슴처럼 순진무구한 눈동자였다.

    “하지만, 내뱉은 말씀에는 책임을 지셔야죠.”

    “채, 책임질게요.”

    고작 책임진다는 미리안의 말 한마디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특히, 오늘처럼 함께 차까지 마셨는데, 도망을 간다고? 린느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여차하다간 내가 다 뒤집어쓰고 멸문 프리패스 당할지도 몰라. 아, 진짜!’

    린느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죽지 않으려면, 미리안의 도망을 막아야 한다.

    린느는 파르르 떨리는 뺨을 억지로 올려 가며 웃었다.

    “그러니까, 도망가려는 이유를 아주 낱낱이 말씀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린느는 다 식은 찻물을 원샷 하고 탁! 하며 내려놨다. 동시에 린느는 낡은 주점의 진상 단골처럼 사나운 눈으로 미리안을 바라봤다.

    “대공 각하께 일러 버릴 거예요.”

    그녀의 협박에 미리안의 입술은 퍼렇게 질렸으며, 눈 밑으론 다크서클마저 드리웠다.

    미리안에게 밀러란 이런 존재일까? 아니, 이런 존재일 수밖에 없나?

    ‘밀러가 그렇게 싫을까? 하지만 싫어할 이유가 아직은 없을 텐데.’

    그냥 도망 여주의 숙명 같은 걸까? 하긴, 이 원작 소설의 작가는 커플 혐오자라도 되는지, 두 사람 사이를 떼어 놓는 데에 진심이었다.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말이다. 그때, 미리안이 린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전 아버지의 불행을 원해요.”

    “…아?”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미리안이 그녀의 아버지를 이토록 증오했던가?

    아무리 눈을 도르르 굴려도, 기억나지 않자, 린느는 바싹 탄 입술을 축이며 미리안을 바라봤다. 미리안은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참아 내며 미간을 떨었다.

    “그런데 그간 각하께서 본가로…… 돈을 보내셨더라구요. 제 아버지는 그 돈으로 온갖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을 테고. 하아… 너무, 너무 수치스럽고 화나고…….”

    “각하께 말씀드려 봤어요? 본가로 돈을 보내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면 각하께서도 이해해 주시지 않으실까요?”

    미리안은 린느의 조언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대공저 전체가 불편하지만, 미리안 그녀가 가장 두려운 곳은 대공의 집무실이다. 대공과 시선을 맞추는 것조차 어려운데, 그가 일하는 공간이라니. 끔찍한 곳이지만 미리안은 절박한 심정으로 대공의 집무실을 찾아갔었다.

    「할 말이 있다고.」

    밀러는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테이블 위로 늘어선 서류들에 인장을 쿵쿵 찍거나 펜을 굴리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며 미리안은 입이 떼지지 않았다.

    「가, 각하께서…….」

    어렵사리 꺼낸 말에 밀러는 손을 멈추고 그 무서운 금안으로 미리안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미리안은 아래턱을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도, 돈을, 제 아버지께…… 보내신다 들었…….」

    적막한 고요함과 집무실. 아버지께 매를 맞던 본가에서의 집무실이 떠올라, 미리안은 두려움에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추궁하지 않고 침묵했다. 미리안의 울음이 잦아들 때쯤, 그는 미리안에게 금화를 쥐여 주고 방으로 돌려보냈다.

    “…각하께선 제게 돈을 더 얹어 주셨어요. 그 일에 대해선 더는 언급하지 말라는 뜻이겠죠.”

    각하께선 늘 ‘알아서’ 처리하는 사람이 아닌가. 미리안은 그의 배려가 불편해졌으며, 그의 모든 게 다 불편해졌다. 하지만, 저를 살려 준 은인을 마음껏 불편해할 수도 없는 그런 모든 상황이 겹쳐 미리안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분명 도망치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미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대공저에서 도망치면…… 아버지가 가장 불행할 테니, 도망만이 방법이에요.”

    미리안의 아버지라면, 딸의 실종보다 밀러가 보내는 돈을 더 걱정할 위인이긴 하지. 린느는 미리안의 주장에 더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미리안이 대공저에서 도망을 치면, 미리안은 그녀가 원하는 자유와 아버지의 불행 모두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미리안, 자신의 행복을 우선으로 두세요. 원수의 불행보다 자신의 행복을 먼저 두란 말이에요.”

    “행복…. 적어도 이 저택에서 제 행복은 찾지 못했어요.”

    미리안은 실소를 뱉었다. 그러자,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이 그녀의 뺨을 가로지르며 톡 떨어졌다.

    “제, 제가 있잖아요! 제가 대공저에 당분간 자주 올게요. 그러다 때가 되면 각하께 아버지께 돈을 보내지 말아 달라 말씀드려 보는 거예요. 저도 함께 있어 줄게요.”

    린느가 대공저에 자주 온다는 말에 미리안의 눈꺼풀이 크게 뜨였다. 선물이라도 받는 아이처럼 들뜬 웃음기도 미세하게 서려 있었다.

    “그, 그렇다면… 린느님과 함께라면 버텨 볼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는 각하께서 보내 주신 돈으로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겠지만.”

    미리안의 입매가 섬뜩하게 비틀려 올라가자, 린느는 그녀의 표정에 기겁하며 시선을 뗐다.

    ‘뭐, 뭐야. 악녀는 나인데 왜 미리안이 더 무섭게 생겼담.’

    린느는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 아무튼 미리안 님께서 마음을 조금만 여셨으면 좋겠어요. 아버지에 대한 복수는 나중에, 행복을 느낀 후에 해도 되니까요.”

    “정말 그럴까요? 그럼 돌아가신 제 어머니가 너무 불쌍한데…….”

    “어머님도 미리안 님의 행복을 더 원하실 거예요. 그런 못된 백작의 불행보다요.”

    린느는 미리안의 손을 꼭 잡아 주며 끝까지 위로해 줬다.

    “그러니, 제발 부디 도망간다는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미리안, 네가 도망가면 나부터 죽어…. 아마도 0순위로.’

    린느는 미리안의 손을 목숨줄처럼 꼭 쥐며 애원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미리안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 냈고, 린느는 의자에 급히 앉았다.

    “드, 들어오세요!”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문틈으로 하녀가 들어왔다. 자로 잰 듯 단정한 메이드복이 잘 어울리는 하녀였다.

    “아가씨, 각하께서 집무실로 오시랍니다.”

    “에이, 그럴 리가요. 미리안 님을 부르셨겠죠.”

    “각하께선 분명히 세르트 영애를 부르셨어요.”

    무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리안이 린느를 애달프게도 바라봤다. 그런 그녀에게 입 모양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두고 하녀의 단정한 걸음에 맞춰 뒤를 따랐다. 말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왜 자꾸 일이 꼬이냐……. 갈수록 태산이야.’

    린느는 깊은 한숨을 몇 번이고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했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 아니요?”

    “말씀 편히 하세요, 아가씨.”

    “괜찮아요…!”

    하녀는 린느의 대답에 짧게나마 놀랐다. 소문대로 과거 세르트 영애와는 아주 딴판이지 않은가. 어린 하녀는 잘게 고개를 갸우뚱대며 집무실까지 린느를 안내했다. 그 잠깐 사이에도 린느는 해맑게 웃으며 복장이 잘 어울린다는 둥 보조개가 너무 귀엽다는 둥 칭찬을 늘어놨다. 그 덕분에 가는 길이 짧게 느껴졌다.

    어느새 밀러의 집무실 문이 보였고. 흑갈색에 웅장하기까지 한 문은 멀리서도 집무실 문이라고 적혀 있는 듯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똑똑.

    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리자 린느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침묵의 늪과 같은 집무실에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은 후였다.

    “…….”

    밀러는 린느를 제 앞에 앉혀 놓고도 테이블 위로 늘어선 서류들을 검토하기 바빴다. 서류를 오가는 그의 손가락은 무척이나 커다랗고도 기다랬다.

    ‘일하는 것도 잘생겼네. 얼굴로 일하나?’

    린느는 그의 잘생긴 얼굴과 섬섬옥수를 마음껏 구경했다. 그때, 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세르트 영애.”

    “네?”

    “그대가 그토록 원했던 내 집무실에 입성한 소감은?”

    밀러는 그 잘난 입꼬리를 올려 웃었고, 그의 미소는 화날 만큼 그와 어울리게 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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