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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21화 (21/122)

@21화

그는 바짝 다가와 린느의 머리에 예쁘게 묶인 빨간 리본을 가리켰다.

“미리안, 선물이다.”

“……서, 선물?”

미리안은 토끼 눈으로 린느를 바라보더니, 놀란 얼굴로 입을 가렸다.

그 모습에 린느는 우스운 표정으로 ‘선물이뒈’라며 소리 없이 비아냥댔다.

‘연애할 거면 둘이 하라고!’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현생에서도 커플들 상담만 밤낮없이 해 줬는데, 내가! 빙의해서! 여기에서까지! 해야겠냐고!’

당장 우아하게 잘 뻗은 밀러의 콧대를 뭉개 주고 싶었지만. 스테빈스 백작의 느글느글한 낯짝을 떠올리며 꾹 참았다.

‘그래, 참자. 어쨌든 밀러 덕분에 백작 할아버지도 내쫓았으니, 시녀 노릇 좀 해 주다가 돌아가서 놀면 되잖아?’

린느는 흰 뺨을 바르르 떨며 억지로 웃었다. 그런 린느를 향해 밀러는 가소롭단 듯 픽, 웃었다. 린느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미리안에게로 옮겨 갔다.

“마음에 드나?”

밀러의 물음에 미리안은 침묵을 지키며, 그만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러자 밀러는 그런 미리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나? 내내 세르트 영애의 이야기만 하더니 의외군.”

“그, 그게 아니라……!”

미리안은 기겁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린느는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가자미눈으로 밀러를 힐끔힐끔 노려봤다. 순해 빠진 미리안을 상대로 이게 무슨 짓이람?

“리, 린느님께 이건 예의가 아닌걸요. 선물이라니…….”

미리안의 대답에 밀러와 린느가 동시에 탄성을 뱉었다.

“세르트 영애가 그대의 상냥함을 배우면 좋을 텐데.”

“그러게요. 각하께서 미리안 님의 상냥함을 배우시면 좋을 텐데요.”

“…선물 주제에 말이 많아?”

“비싼 선물이라서요.”

청포도 주제에 기어오르긴. 밀러는 말없이 린느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졌다.

“미리안, 그대가 선택해라. 세르트 영애를 내쫓을지 말지.”

“갑자기요? 날 내쫓아요? 참나?”

“내, 내쫓다니요! 그런 건 싫어요!”

밀러는 장난꾸러기처럼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좀처럼 당황하거나 기죽는 꼴을 보인 적 없는 린느가 아닌가. 잠시나마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가려웠다.

“그럼 다행이군. 세르트 영애, 최선을 다해 미리안을 즐겁게 하라. 그대의 첫 임무다.”

‘내가 대공가의 1대 광대인가 보네. 어우, 저 진상.’

하긴, 현생에서 알바할 땐 더한 진상도 만났는데, 뭐. 게다가 미리안처럼 착한 영애라면 어려울 것도 없지.

‘잘생겼으니 봐준다.’

린느는 ‘뉘예뉘예’ 입매를 찡그리며 답하더니, 돌연 낯을 달리하며 미리안에게 팔짱을 꼈다.

“미리안 님, 우리 어서 올라가요.”

“네……!”

미리안은 린느에게 이끌려 계단으로 향했다. 여느 때보다 세상 행복한 얼굴이었으니. 밀러는 그런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밀러 자신이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방해꾼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상황과 자신의 꼴에 실소가 올라왔다.

“웬만한 기사보다도 배짱이 두둑하군. 섀르넌의 말대로 황궁 기사감이야.”

“세르트 영애 말씀이십니까?”

“그대도 보지 않았나? 저 잘난 속 좀 긁으려고 선물 띠를 둘러 놨더니, 보란 듯이 치장까지 해?”

“치… 장까지는 아닐 겁니다.”

“보기 좋으면 치장이지. 붉은색과 퍽 어울리기까지 하던데.”

밀러는 신경질적으로 코트를 휘날리며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무슨 선물이냐, 물건 취급 말라! 라며 그 작은 입으로 따질 거라 예상했건만. 린느는 오늘도 그의 예상을 여유롭게 비켜 갔다. 그것도 룰루랄라 하며 미리안과 함께!

‘기억 하나 잃었다고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던 사람에 대한 관심이 한순간에 식을 수 있는 건가? 종잡을 수가 없군.’

그래, 종잡을 수 있다면 세르트 영애가 아니지. 밀러는 린느의 머리칼에 둘린 빨간 리본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며 어금니를 물었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왜, 세르트 자작저에서 스테빈스 백작이라도 봤나?”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스테빈스 백작이 언제는 내 말을 단번에 들어 먹은 적이 있던가? 자존심이랍시고 그러는 거니 신경 쓰지 마.”

“하나,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엄연히 예법이 있고, 신분의 차이가 있는걸요.”

밀러는 진득한 조소를 뱉었다.

“내 조부님께선 달력을 뜯듯 귀족을 다뤄야 한다 가르치셨지.”

“달력…….”

“달력을 뜯을 때, 끝을 잘 잡아 단번에 뜯어야 깔끔해. 얌전히 굴다가 단호할 때 한 번에 뜯으란 뜻이지.”

“아…!”

“스테빈스는 겁이 많은 자이니, 더는 세르트 자작가를 건들지 않을 테고. 문제는…….”

밀러는 날카로운 미소와 함께 2층을 향해 턱을 들었다.

“세르트 영애다. 잘 주시해.”

* * *

대공저는 대공저구나.

린느는 미리안의 방을 둘러보느라 자리에서 두어 번이나 빙그르르 돌았다.

넓어도 이렇게 넓을 수가 있나?

그것도 시녀 방이?

‘미리안 바보. 일개 시녀한테 이런 방을 턱턱 내주는 귀족이 어딨냐고.’

린느는 오페라 극장에서 미리안이 한 말이 떠올라 기가 찼다.

넓은 방 안에는 온갖 비싼 가구가 즐비하고 작은 촛대 하나조차 번쩍번쩍 광이 날 정도로 관리되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폭신폭신하여 움직일 때마다 푸석푸석 듣기 좋은 소리까지 뽐내기 바쁜데, 일개 시녀라고? 린느는 확신에 찬 얼굴로 잘게 끄덕였다.

“이 방을 미리안 님 혼자 쓰신다 하셨죠?”

“네……! 아무래도 너무 크죠?”

“제 방의 두 배는 되는 거 같은데요?”

린느는 그 커다란 눈망울로 방 안을 둘러봤다.

대공저 특유의 차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방이지만, 문제라면 너무 어두운 점이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이 방 안을 환하게 비추긴 했지만, 해가 저물고 나면 작은 초 몇 개로는 어둠을 밝힐 수는 없는 크기였다.

“이 방에서 혼자 주무시려면 무섭겠어요. 너무 넓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고.”

“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마도….”

괜찮기는, 무서운 거 맞구만.

린느는 안타까운 듯 미리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각하께 방이 너무 넓어서 무섭다고 말씀드려 보세요. 그럼, 좀 더 편한 방으로 옮겨 주지 않겠어요?”

“하, 하지만 각하께서 이미 제 편의를 이렇게나 봐주시는걸요?”

“받는 사람이 편해야 편의죠. 미리안 님은 이 방이 너무 넓어서 불편한 거 아니에요?”

미리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미리안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으니. 린느는 미리안과 시선을 맞추며 다정하게 말했다.

“봐요, 미리안 님. 각하께 오라버니가 보고 싶다 했더니 어떻게 됐나요?”

“……각하께서 친히 휴가를 주셨죠.”

“그렇죠?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말을 해야 알아요. 대화가 부족해지면 서로 오해하기 십상이구요.”

그리고 그 오해 때문에 이 소설의 원작은 새드 엔딩으로 끝났지.

린느는 제 사전에 새드 엔딩은 없다는 다짐과 함께 미리안의 어깨를 다독였다.

“미리안 님, 앞으로 상대가 누가 됐건 필요한 말은 꼭 하세요. 그게 관계의 시작이니까요. 알았죠?”

미리안은 나직이 ‘관계의 시작’을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린느 님께는 꼭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차근차근 하면 되죠. 파이팅!”

두 사람 모두 결연한 얼굴로 허공에 두 주먹을 흔들었으며, 린느는 밝게 웃는 미리안에게 기합을 넣듯 ‘파이팅’을 연발했다.

‘이러다가 장르 바뀌는 거 아니야? 성장드라마 느낌으로다가….’

린느의 속도 모르고 미리안은 웃을 뿐이었다.

똑똑.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어린 하녀가 트레이를 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간단한 디저트를 챙겨 왔습니다.”

“이, 이런 건 제가 해도 되는걸요.”

“각하께서 직접 하명하신 일이라서요.”

부드럽게 밀리는 트레이 위로 은빛 접시들이 늘어서 있었으니.

‘대박, 대공저 음식은 얼마나 맛있을지 궁금한데?’

린느는 목을 쭉 빼고선 접시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어린 하녀는 능숙하게 접시들을 테이블 위로 옮기더니, 은빛의 접시 덮개를 들어 올렸다.

“와, 대박.”

투박해라.

뭐야, 혹시 쉐프가 밀러인 거 아니야?

린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간헐적으로 손뼉을 치며 어수선하게 웃었다.

“와하하……. 엄청 맛있어 보이네요. 하하…!”

접시를 옮기던 하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저희 대공저의 셰프께선 역대 황실 전속 셰프셨답니다.”

“황실 전속 셰프님이요? 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얼굴을 마주하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지네요.”

“별말씀을요. 제가 셰프님께 꼭 그 말씀 전해 드릴게요. 무척 좋아하실 거예요.”

“네네……!”

“그럼.”

하녀는 단정하게 목례를 한 후 텅 빈 트레이를 밀며 방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달칵 닫히자마자 린느는 어색한 웃음을 삼켰다.

“린느님, 어서 먼저 드셔 보세요…! 엄청 맛있어요.”

미리안은 접시를 끌어다 린느 앞으로 두며 헤실헤실 웃었으니. 거절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이에, 린느는 미리안을 따라 웃으며 쿠키를 집었다. 황실 전속 쉐프의 쿠키는, 마치 50년 전통 제과점의 앙금 쿠키처럼 투박한 모양새였다.

린느는 앙금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뻐근하게 웃으며 한입에 쿠키를 앙 베어 물었다.

“어때요?”

미리안은 꽃받침 한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린느는 오물거리며, 한 입 베어 문 쿠키를 빤히 바라봤다.

투박한 모양새에 뻔한 재료.

‘그런데…… 존맛탱.’

청록색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단 듯이 도르르 굴렀다.

세상에, 이게 바로 황실 전속 셰프의 손맛인가?

‘생긴 거만 빼면 우리 자작저 셰프보다 쩔잖아?’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두 손으로 쿠키를 들고 있었다.

“겉바속촉. 와.”

린느는 우유에 쿠키를 살짝 적셔 입으로 가져갔다.

까슬까슬한 표면이 치아에 닿아 뭉개질 때마다 파삭거리는 소리를 냈고.

쿠키가 머금은 앙금은 조그마한 티끌도 없이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미쳤어. 당장 팔아도 대박 나겠는데?’

린느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접시를 비워 갔다.

그러자 미리안은 헤실헤실 웃으며 린느를 바라보기 바빴다.

“아……! 미리안 님도 드세요!”

황홀한 쿠키 맛에 그만 미리안도 잊고 접시를 모조리 비울 뻔했다.

린느는 입을 가리며 오물거렸다.

“괜찮아요. 린느 님 다 드세요. 보기만 해도 좋은걸요….”

미리안은 양손을 가슴께에 둔 채 엄마 미소로 린느를 바라봤고. 린느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있던 부스러기를 탈탈 털었다.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잘 뵙고 왔어요?”

“네! 여전히 잘 지내시더라구요.”

‘다행이다. 역시 소설 초반이 맞았어! 그럼 둘 사이에서 나만 빠지면 되겠네? 난 행복한 금수저의 삶을 살고!’

이제야 제대로 누리면서 살겠구나!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잇새로 흘렀다.

그때였다.

“린느 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고백하는 사람처럼 미리안의 표정은 진중했으니.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미리안이 입을 뗐다.

“도망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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