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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20화 (20/122)

@20화

알렉스는 자신에게 시선을 꽂은 스테빈스 백작과 세르트 자작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곤 갑작스러운 주목에 당황한 듯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눈치 빠른 세르트 자작이 로비가 울릴 만큼 호탕하게 웃었다.

“애커먼 경! 오랜만이군요! 우리 대공 각하께선 잘 지내시는지요!”

세르트 자작은 유연하게 오른손을 뻗어 알렉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알렉스는 세르트 자작과 악수하며, 노련하게 스테빈스 백작의 표정을 살폈다.

스테빈스 낯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게, 진즉 세르트 자작가에 손 떼라니까. 하여튼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아니지.

밀러는 스테빈스 백작이 세르트 자작저에 찾아올 걸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각하께서 날 자작저로 보내신 건가? 이럴까 봐?’

알렉스는 자신의 주인을 향해 숨죽여 탄성을 뱉었다.

도대체, 선대 대공비는 무얼 먹고 대공을 낳았길래 이런 신통한 혜안을 가진 건지!

알렉스는 들뜬 목소리를 가다듬어 차분히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대공 각하께서 세르트 영애를 초대하셨습니다. 하여, 제가 직접 모시러 왔고요.”

스테빈스 백작의 입매가 초파리가 들어갈 만큼 과하게 떡 벌어졌다.

세르트 자작은 그 꼴을 힐끔거리며 조소를 뱉었다.

“그럼요! 애커먼 경, 제가 당장 준비하라 일러둘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세르트 자작은 기다란 다리를 쭉쭉 뽐내며 스테빈스 백작을 휙 지나쳤다.

“당장 올라가서 아가씨를 모셔오너라. 어서!”

세르트 자작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리자, 하녀들이 황급히 중앙 계단을 올랐다.

그때, 중앙 계단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

“절 부르셨나요? 아버지?”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청록색 눈동자가 세 남자를 내려다봤으니. 목소리의 주인은 린느였다.

흰색 고급 새틴 장갑에 가려진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하늘 높이 세워진 채, 계단 손잡이를 부드럽게 쥐었다. 콧대는 높이 세우고, 걸음걸이는 과할 만큼 우아하게.

‘대박, 지금 나 너무 멋있는데? 이거 완전 여주 등장 씬 아니냐고.’

스테빈스 백작의 면전에 백덤블링 하며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린느는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는 거로 만족했다.

‘햐, 2:0. 내가 이겼어요, 영감탱!’

린느는 넋 나간 스테빈스 백작 앞을 스치며 가볍게 묵례만 했다.

“알렉스 님, 여기까지 직접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알렉스 님께 차라도 대접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 아! 그렇지! 당장 3잔! 아니, 4잔 준비해 두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각하께서 영애를 기다리고 계시기에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밀러가 기다린다는 말에 스테빈스 백작의 눈썹이 크게 움직였다.

세르트 자작은 백작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풉 하며 웃었다.

“이런 이런. 그렇다면 오늘은 이만해 두고 다음을 기약해야겠군요.”

알렉스는 부담스러운 두 부녀 사이에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마차에 타시지요,세르트 영애.”

린느는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드레스를 보란 듯이 촤르륵 펼쳤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그래그래! 어서 다녀오거라!”

그때, 넋이 반쯤 나가 있던 스테빈스 백작이 표독스럽게 앞장섰다.

“그럼 나, 나도 다음에 다시 방문하…….”

‘다음에 다시 방문’이란 말에 알렉스가 경고하듯 스테빈스 백작을 사납게 흘깃거리자, 스테빈스 백작은 어깨를 들썩였다.

“다시… 방문을 하든가 말든가 생각 좀 해 보고 결정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뭐래. 온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도망치듯 떠나는 백작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스테빈스 백작은 따로 인사도 받지 않고, 발바닥에 불붙은 사람처럼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와 함께 온 사용인들이 난색을 보이며 허둥지둥했다.

“뭐 하나? 주인이 떠났으면 그대들도 떠나야지?”

세르트 자작이 무안을 주자, 사용인들은 시뻘게진 얼굴로 짐을 들어 다시 마차로 날랐다.

급하게 옮기는 통에 깨지고 떨어트리는 소리가 간간이 울렸다.

“그렇게 던져서 박살 나겠어? 좀 더 높은 곳에서 놓쳐야 박살 나지!”

린느표 잔소리까지 얹어 주자, 백작저 사용인들은 더욱 두서없이 움직였다.

우당탕쿵탕 야단법석인 소란을 뒤로하고, 린느는 대공가의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킬 때까지 창문을 보며 세르트 자작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마부가 말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하아, 웃음 참느라 뺨에 경련 날 뻔했네.”

린느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어깨도 간간이 돌렸다.

“어우, 요즘 너무 집에서만 지냈나 봐. 어깨랑 팔이 무슨 종이 같아.”

“에이, 집에만 계시다니요. 어제도 살롱에 다녀오셨으면서.”

“아, 맞다. 그렇지?”

뒤늦게 린느는 헤헤 웃으며 알렉스의 눈치를 살폈다.

알렉스는 품에 들고 있던 수첩을 뒤적거리느라 정신없었다.

아니, 뒤적이는 척하며 귀를 쫑긋거렸다.

‘세르트 영애는 예측 불허구나.’

뭐, 세르트 영애의 기를 죽인다고 했던가?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저번에 뵈었을 때보다 더 기가 피신 거 같은데…….’

알렉스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남몰래 입 안을 깨물었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린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알렉스 님? 각하께서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미 물어봤잖…….

알렉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미리안 님 아시지요? 미리안 님께서 약 일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어제 대공저로 돌아오셨거든요.”

일주일씩이나? 집착남주가 도망여주한테 휴가를 줬단 말이야? 이게 말이나 되나? 린느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뜬 채로 잘게 고개를 저었다.

“미리안 님께서 린느 님을 꼭 뵙고 싶다 하셨었습니다. 풀어야 할 오해가 있다며 부탁하셨습니다.”

아아, 오해? 오페라 극장에서 생긴 그 오해를 말하는 거겠지? 그래, 착한 미리안이 오해도 풀지 않고 뒀을 리가 없지! 린느는 그제야 방긋 웃었다. 물론, 밀러가 미리안을 휴가 보내 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어…… 그래서 말입니다, 세르트 영애.”

“네? 네네, 말씀하세요.”

“각하께서 영애께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요.”

“부탁이요?”

무슨 부탁인지 감조차 잡기 힘들었다.

애초에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일개 자작가 영애에게 부탁할 일이 뭐 있다고?

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렉스를 기다렸다.

알렉스는 품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어 린느에게 건넸다.

“열어 보십시오.”

린느는 자그마한 액세서리 상자를 빤히 바라봤다.

‘아니 이게 뭔데? 잠깐… 이거 사이즈가 딱 반지 상자인걸?’

잠깐, 반지? 반지라고? 갑자기 무슨 반지?

린느는 알렉스와 그가 건넨 상자를 번갈아 보며 입매를 떨었다.

‘뭐, 뭐야! 갑자기 이걸 왜 줘? 어떡하지? 어떡하지?!’

가슴께가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하는 짓이 밉상에다가 집착남주인 건 좀 거슬리긴 하다만 밀러는 원래 린느의 최애였다.

‘솔직히 너무 잘생겼잖아……. 작가 양반, 듣고 있소? 밀러랑 섀르넌만 너무 잘생겼다고!’

린느는 어금니를 깨물며 괜스레 창문 밖 하늘을 노려봤다.

작가가 여기선 신이겠지? 신은 하늘에 있겠고.

“저어, 영애? 좀 받아 주시겠어요?”

“아아…! 네!”

린느는 두 손으로 자그마한 케이스를 정갈하게 건네받았다.

빤히 케이스를 바라봤다.

‘미리안의 말대로 밀러랑은 아무 사이도 아닌 건가?’

그렇다면…….

‘아, 아니지. 아무리 잘생겼다지만 그 성격 파탄자랑 어떻게 연애를 해? …어떻게 하긴, 잘하면 되지! 나도 어딘가 파탄 난 구석이 있을 거야!’

린느는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케이스를 단번에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작은 상자엔 붉은색 끈이 고이 접혀 있었다.

“이게 뭐, 뭐예요?”

“실크로 만든 붉은 띠입니다.”

“아니, 그건 저도 아는데…….”

누가 그걸 몰라?!

린느는 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 한번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가 흠칫 놀라며 나직이 말했다.

“그걸 머리에 리본 모양으로 묶고 들어오시라는 명령인지라…….”

린느는 눈을 얕게 뜨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이걸, 머리에요? …각하의 취향입니까?”

알렉스는 말없이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대공저로 향하는 내내 집요하게 물었지만, 알렉스는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끝까지 말해 주지 않았다. 밀러의 보좌관다웠다.

‘쓸데없이 입 무겁긴.’

린느는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천천히 내렸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에 맞춰 린느의 머리에 묶인 붉은 리본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녀는 앞장선 알렉스를 따라 대공저 분수대를 지나쳤다.

자작저 앞마당에도 분수대가 있긴 하다만, 그 분수와 비할 바가 못 됐으니. 커다란 분수대에선 물줄기가 황궁 악단의 나팔처럼 뿜어 댔다.

‘잘 꾸미면 대공저도 엄청 아름다울 텐데.’

린느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계단을 올랐다.

낮은 계단을 도도도 오르자, 대공저 로비가 언뜻 보였고, 익숙한 얼굴들도 함께 보였다.

“리, 린느 님?! 린느 님!”

현관에 서 있던 미리안이 치맛자락을 바짝 올려 쥔 채 뛰어왔다.

‘미리안이 뛰기도 하는구나?’

린느는 저를 향해 달려오는 미리안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 이게 얼마 만인지요! 정말…….”

미리안은 린느의 두 손을 잡고 활짝 웃었다.

그 여느 때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휴가를 다녀오셨다며요?”

“네! 린느님 덕분이에요!”

“제 덕이요?”

미리안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린느님 조언대로 각하께 말씀드렸었거든요……. 오라버니를 만나고 싶다구….”

“그래서 본가에 다녀오신 거예요?”

“아뇨. 사정 때문에 본가에는 가지 못했지만, 여행지에서 오라버니를 만났어요.”

미리안은 과실처럼 단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린느 역시 입매가 간지러웠다.

“다행이에요! 자, 봐요. 뭐든 말을 해야 상대방도 미리안 님의 속을 알 수 있다니까요? 괜한 오해를 쌓기보단 대화로 푸셔야 해요.”

미리안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천천히 린느의 손을 끌었다.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각하께서 린느님을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두 사람이 사이좋게 대공저로 들어서자, 밀러가 거만하게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언제봐도 참 거만하게 잘생겼네.’

린느는 입을 삐죽거리며 드레스를 활짝 펼쳐 인사했다.

“왔군. 그 끈과 함께.”

밀러는 날카로운 미소와 함께 린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성큼 다가오는 밀러를 보며 린느는 뒷걸음질 쳤다.

‘왜,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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