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세르트’라는 이름에 남자의 손끝이 움찔했다.
찰나의 정적 끝에 남자가 입을 뗐다.
“……세, 세르트 영애이시군요.”
지하 끝까지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 목소리였다.
그간 살롱에서 마주친 영식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비슷했다.
어색한 웃음 → 도망
당황한 웃음 → 도망
이 법칙을 깬 건 오로지 섀르넌 공작뿐이었다. 그러면 뭐 하나. 그 이후로 섀르넌과 만날 수도 없었는걸….
‘이 남자도 도망가겠지.’
린느는 말없이 느슨하게 웃었다.
도망갈 거라면 지금 도망가라는 무언의 배려였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세르트 영애.”
린느의 예상대로 남자는 엉덩이에 불붙은 사람처럼 인사를 마치자마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남기고 간 어색한 기류에도 린느는 떨떠름한 얼굴을 애써 감췄다.
‘아무리 겪고 또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네.’
속이 답답했다.
제일 잘나가는 살롱 메인 자리를 차지하면 뭐 하나.
‘세르트’라는 이름 하나에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남자들이 도망을 치는데!
‘아, 아니야! 포기하지 마! 백작 할아버지랑 결혼할 거야? 절대 아니지. 절대!’
린느는 태연하게 다시 미소 지었다.
* * *
자작저로 터덜터덜 들어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서늘했다.
린느는 구두를 질질 끌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피곤해.”
“종아리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아냐, 메리도 피곤할 텐데.”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구요. 업어 드릴까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구.”
린느는 메리의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멀찍이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세르트 자작이 픽, 웃었다.
“종일 쏘다니다 이제 들어오느냐?”
린느는 단번에 몸을 틀어 세르트 자작을 바라봤다.
“아버지, 지금 이거 오해인 거 아시죠? 네?”
“오해는 무슨?”
“저 지금 뒤꿈치 다 까졌거든요? 종일 살롱에 있었단 말이에요.”
세르트 자작은 미간을 구기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살롱에 금이라도 발라 뒀느냐? 그러게 적당히 놀고 들어왔어야지.”
“…….”
백작 할아버지랑 결혼하기 싫다고 외쳐 봤자겠지.
린느가 대답을 피하자, 세르트 자작은 그녀의 발을 빤히 바라봤다.
“오늘도 늙는구먼.”
세르트 자작은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숙였다.
그러자, 계단 난간을 닦던 사용인들이 토끼 눈을 뜨며 입을 가렸다.
“업혀라.”
“……네?”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말고 업혀라. 응?”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할 말도 있으니, 업히라면 업혀라. 왜, 업어다가 이 짐짝 가져다 던질까 무섭드냐?”
“아, 아니요?”
린느는 쭈뼛거리며 등에 업혔다.
“식사는 챙기면서 노는 건지. 하긴, 그렇게 쏘다니니 살이 찔 턱이 있나.”
세르트 자작은 혀를 내두르며 단번에 린느를 업었다.
그리고는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편한 슬리퍼 하나 가져오너라.”
“네, 주인님!”
하녀가 호다닥 뛰어나가자, 세르트 자작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두 번 업어 본 솜씨가 아니었다. 퍽 안정적이었다.
계단을 오르고 긴 복도를 거닐어도 끄떡없이 단단했다.
집무실에 거의 다다를 때쯤에야, 메리가 슬리퍼를 들고 뛰어왔다.
“아가씨, 여기 슬리퍼 가져왔어요.”
세르트 자작은 헛기침하며 천천히 린느를 내려줬다.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세르트 자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 안으로 쌩 들어가 문을 잡았다.
“천천히 들어와라.”
린느는 메리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세르트 자작은 푹신한 싱글 소파를 린느의 허리에 받쳐 줬다.
척하면 척. 세르트 자작은 투덜대면서도 린느가 필요로 하는 걸 귀신같이 찾아다 줬다.
바람이 차다며 담요를 건네며 문을 달칵 닫았다.
‘뭐, 뭐야. 왜 이렇게 친절해?’
린느는 담요를 만지작대며 세르트 자작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세르트 자작 정도면 좋은 아버지는 맞지만, 워낙 잔소리가 많은 편이지 않던가?
아, 지금도 잔소리는 하고 있구나.
린느는 피식 웃었다.
세르트 자작은 그런 린느를 바라봤다.
“살롱에 종일 죽치고 있으면, 없던 약혼자가 생기겠느냐?”
“예? 아, 뭐, 가만히 있는 거보다 낫지 않을까 해서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발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했냔 말이다.”
“이건 구두가 새것이라 그래요.”
“……또 샀느냐?”
린느는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세르트 자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내가 저택을 비우면 얼마나 더 제멋대로일지 안 봐도 뻔하구만!”
“아, 아니에요! 이거 예전에 사 놓고 안 신은 구두예요!”
“거짓말!”
“…티 나요?”
“으이그! 이 철딱서니!”
“헤헤.”
세르트 자작은 헛웃음을 뱉더니, 사뭇 진중한 낯으로 린느를 바라봤다.
린느 역시 웃음기를 쏙 뺀 채 세르트 자작을 바라봤다.
“……린느. 후우…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린느는 자세를 고쳐 앉아 세르트 자작을 바라봤다.
평소에도 원래가 험악한 인상이긴 하지만.
‘어째 오늘은 더 험악해 보이는데.’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기에 저렇게까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지?
린느는 저도 모르게 담요를 꽉 쥐었다.
“지난 며칠간 계속 고민했다.”
“고민이요……?”
세르트 자작은 엄중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깍지를 꼈다.
그런 험악한 얼굴로 뜸까지 들이니, 린느는 초조해져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설마… 고민했다는 게 스테빈스 백작가와의 혼담 때문은 아니겠지? 제발, 제발.’
정적이 선사한 긴장감은 린느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정적 끝으로 세르트 자작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지나치게 사치 부리는 것과 대공저에 얼씬거리는 거 빼고. 원래 하던 대로 하거라.”
“네? 하던 대로요?”
“그래. 하던 대로.”
“혼처는요? 헐, 설마 재산이고 뭐고 다 동생에게 주시려는 거예요?”
“네가 자꾸 철없이 굴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처럼만 굴면 그럴 이유는 없어.”
“그럼 저 그 백작 할아버지랑 결혼 안 해도 돼요?!”
순간, 세르트 자작의 미간이 푹 패일 만큼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망할 노친네는 빼라! 세르트 자작가를 뭐로 보고!”
린느는 자식 일에 발 벗고 나선 아버지를 두고, 충격에 멈췄다. 온갖 감정들이 그녀를 관통했으며, 린느는 텀을 두고 그의 손을 잡았다.
“왜, 왜 이러느냐?”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저 다시는 아버지 속 안 썩이고 효도할게요.”
“그냥 지금처럼만 지내거라. 요즘…… 웃는 얼굴이 보기 좋더구나.”
부녀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귀족이 혼인을 포기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딸의 미소 때문에 그 막중한 일을 예삿일로 치부했다.
린느는 쌓인 눈물을 꾹 삼켰다. 이 기분을 눈물로 망치고 싶지 않은 탓이다.
세르트 자작은 잠시 침묵하더니 피곤한 듯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린느, 넌 이 아비가 그 노망난 백작에게 널 팔 거라 생각했느냐?”
“아, 아니요!? 그래도 백작이나 되니까요. 막 저택 열 채씩 주면서 절 달라고 하면 어떡해요.”
린느는 배시시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참나, 저택 열 채씩이나 주고 널 데려갈 이유는 없으니 걱정은 접어 둬라! 하하!”
흥, 말이 그렇단 거지.
린느는 퉁퉁 부은 입술을 쫑긋거렸다.
그때, 세르트 자작이 아연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린느…… 내가 쫓기는 사람처럼 돈만 보고 달리는 이유를 아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린느의 입이 딱 다물렸다.
감히 입을 뗄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였다.
한참 뜸 들이던 그가 입을 뗐다.
“내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내 울타리를 부수려고 들어온 놈이 돈 좀 쥐여 준다고 그게 달갑겠느냐? 되레 죽이고 싶지.”
“…….”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네 하던 대로 하거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세르트 자작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린느는 숨죽여 세르트 자작을 바라보며 코끝이 찡했다. 정말 울지 않으려 했는데.
‘정말…. 눈물 나게….’
린느는 입술을 악물며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삼켰다.
“그럼 이만 나가 보……. 우, 우느냐?”
세르트 자작은 기겁하며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눈썹이 파도처럼 굽이를 치더니, 헛웃음을 뱉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구만! 우느냐? 천하의 린느가 이깟 일로 울다니! 아하하하!”
“아, 안 울거든요!?”
“눈물이나 닦고 거짓말하거라! 아하하!”
뭐가 그렇게 웃긴지!
세르트 자작은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 린느의 얼굴을 보며 하하 웃었다.
그 때문에 울컥 올라온 울음이 쏙 들어갔다.
린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폭신한 슬리퍼를 끌며 집무실 문으로 향했다.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네가 우는 모습을 보고 나니 안녕히 잘 주무실 거 같다. 하하하!”
“……아, 넵. 편한 밤 보내세요. 참내.”
세르트 자작은 세상 만족스럽게 허허 웃었다.
* * *
세르트 자작은 화창한 하늘을 벗 삼아, 팔과 목을 쭉쭉 늘리며 스트레칭했다.
“린느는 아직도 자느냐?”
“…네, 주인님. 아가씨 일어나시라 할까요?”
“둬라. 그간 내내 마음고생 했을 테니 늦잠 자면서 쉬라고.”
세르트 자작은 혀를 쯧 차며 자작저 로비로 향했다.
“날씨도 좋구만. 오늘 하루는 환기 좀 제대로 해 두게.”
“네, 주인님.”
세르트 자작은 두 팔을 넓게 펼쳐 온몸을 쭈욱 늘렸다.
그것도 잠시, 멀찍이서 엉덩이에 불붙은 사람처럼 달려오는 하인을 보며 그는 미간을 좁혔다.
“주, 주인님! 손님이 오십니다! 손님이요!”
세르트 자작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님은 무슨 손님!’이라며 타박했다.
그때, 뛰어오는 하인의 뒤로 여러 대의 마차가 들어섰다.
선두에 선 마차의 마부가 능숙하게 속도를 줄여 자작저 로비에 세우자, 세르트 자작은 사납게 하인을 노려봤다.
“허락도 없이 누구 마음대로 문을 열었느냐?”
“그, 그게 안 된다 말씀드렸는데도 무작정 오시는 바람에…….”
세르트 자작은 혀를 차며 마차로 다가갔다.
새하얀 마차 위로 스테빈스 백작가를 알리는 문양이 손수 새겨져 있었다.
달칵.
마부가 마차 문을 열자마자, 스테빈스 백작이 뒤뚱거리며 느릿하게 내렸다.
“스테빈스 공, 오셨습니까? 어째 기별도 없이 오셨는지…….”
“우리 사이에 기별하고 오가야 하나?”
스테빈스는 뱀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세르트 자작을 빤히 치훑었다.
그러자, 세르트 자작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고, 스테빈스 백작은 기다렸단 듯이 그의 등을 퍽퍽 두들겼다.
“그래, 난 또 그대가 인사법조차 까먹은 줄 알았네. 허허.”
스테빈스 백작은 제집 드나들 듯 자작저로 유유히 들어섰다.
동시에 백작저 사용인들이 서둘러 마차 안에서 짐을 꺼내어 옮기기 시작했다.
“어서 안으로 옮겨라!”
사용인들이 서둘러 짐을 자작저로 옮기려 들자, 세르트 자작이 사납게 그들을 노려봤다.
“잠깐, 그게 뭔데 감히 내 저택으로 옮기라 마라 하는가?”
“내가! 내가 옮기라 했네! 내 자네를 위해 친히 선물을 들고 왔는데, 어째 똥이라도 씹은 얼굴이구만?”
이미 로비로 들어선 스테빈스 백작이 고함을 치며 윽박질렀다.
그러자, 짐을 옮기던 백작저 사용인들마저 세르트 자작을 향해 여과 없이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저택에서 이런 치욕을 당했건만, 달리 방법은 없었다.
스테빈스 백작은 위치를 상기시키려는 듯 거만하게 콧대를 들며, 세르트 자작을 깔아봤다.
“자, 그래서 세르트 영애는 어디 있나? 손님이 왔으면 대접을 해야지?”
세르트 자작은 주먹을 희게 말아 쥐며 스테빈스 백작을 노려봤으나 스테빈스 백작은 양팔을 펼쳐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웃었다.
그때 돌연, 한 남자가 헛기침하며 자작저 로비로 들어섰다.
“세르트 경, 마침 나와 계셨군요?”
입씨름 중이던 두 남자가 낯선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