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마침 집무실로 향하던 세르트 자작이 환히 웃으며 들뜬 걸음으로 린느에게 다가왔다.
“그래그래, 잘 다녀왔더냐? 각하께서 뭐라시든?”
잘 다녀온 건 맞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편하려나?
린느는 청록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대답을 미뤘다.
“음…….”
린느가 선뜻 답하지 못하자 세르트 자작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내려왔다.
세르트 자작은 심장께를 부여잡으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왜, 왜 그러느냐? 또 사고 친 건 아니지? 도대체가 하루라도 마음 졸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 원!”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마도.”
“아, 아마도?”
세르트 자작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다, 당장 내 집무실로 따라오너라.”
그 말을 끝으로 린느는 입매를 삐죽거리며 세르트 자작의 뒤를 따랐다.
세르트 자작은 뒷짐을 지더니, 일하는 사용인들 사이를 가로질러 이동했다.
상체는 고정한 채로 그의 다리만 바삐 움직이자, 어느새 집무실로 오르는 계단에 도착했다.
자작저 구석구석 청소하던 사용인들도 보이지 않고 고요했으니…….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집무실로 연결된 통로를 울렸다.
덜컥.
세르트 자작이 집무실 문을 열어젖히자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자작은 냉큼 달려가 환기 때문에 열어둔 창문을 여몄다. 그리고 린느는 자연스레 <혼처>라는 서류 더미에 시선을 꽂았다.
‘혼처? 내 혼처를 알아보셨나?’
창문과 한참 사투를 벌이는 세르트 자작의 뒷모습을 한번 확인해주고, <혼처>라고 쓰여 있는 서류를 뒤로 넘겨 확인했다. 종이를 넘길수록 린느의 안색이 희게 질려갔다.
‘스테빈스 백작? 헐, 74세? 미친’
그녀의 눈동자가 경악을 머금고서 힘없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말썽을 부리던 창문이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린느? 맙소사!”
세르트 자작은 몸을 던져 그녀가 읽고 있던 서류 더미를 뺏어 들었다. 마치, 세 살배기 아기가 물고 있던 구슬을 뺏듯이, 세르트 자작의 얼굴엔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허락도 없이 왜 이걸 보고 있느냐 응?!”
“아, 아니. 무슨 평균 연령이 60대예요? 말이나 돼요!? 제가 아무리 대공 각하를 귀찮게 굴긴 했다만 너무하잖아요.”
세르트 자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기대었다. 린느에게서 뺏은 <혼처> 서류 더미를 책상 위로 툭 던졌다.
“괜찮은 영식이 있으면 추천해 주고자 알아보긴 했다만, 린느 네가 봐서 알겠지만 조무래기뿐이다.”
세르트 자작은 머리칼을 거칠게 넘기며, 자기도 막막하다며 한탄했다. 린느는 잠자코 그의 한탄을 듣다가 못 참겠는지 말했다.
“하지만… 연회장에서 섀르넌 공작님과 춤도 췄는걸요?”
세르트 자작은 돌연 이맛살을 추켜올려 놀란 눈으로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곤 아이 달래듯 나긋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섀, 섀르넌 공이라 했느냐?”
“예!”
작위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공작이면 엄청 높은 거 아니야?
린느는 보란 듯이 가슴팍을 펼치며 당당하게 답했고, 세르트 자작은 그제야 한 꺼풀 누그러진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거 참 기쁜 소식이긴 하다만…….”
불안하게 말끝은 왜 흐린담!
“섀르넌 공께선 대공 각하와 둘도 없는 각별한 사이이니, 큰 기대는 접어 두거라.”
“각별한 사이요?”
“그래, 각별한 사이.”
뭐야, 뭐야?
‘원작에서도 둘이 뭔 사이 아니냐는 댓글들이 수두룩했는데. 정말 각별한 사이인가?’
린느의 입꼬리가 실룩거리자, 세르트 자작이 크게 헛기침했다.
“쓸데없는 망상은 접어라! 으이구, 혼처나 생각할 것이지!”
“아, 아니거든요? 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세르트 자작은 도리질하며 혀를 찼다.
“아무튼, 내 힘이 닿는 곳은 그게 다다.”
“정말 이게 다예요? 평생 함께 살 남편인데 이렇게 터무니없이 정해요? 저 이제 고작 20살인데…….”
“서류 잘 뒤져 보면 네 또래의 영식도 있긴 있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린느와 비슷한 또래의 영식이 있긴 했으니까.
하지만, 이 영식은…….
‘미리안보고 백작가 사생아라며 천박하다 비난해서 밀러에게 댕강 날 남자잖아.’
린느는 고개를 내저으며 서류를 테이블 위로 올려뒀다.
세르트 자작은 한숨을 폭 내쉬며 린느를 바라봤지만, 린느의 표정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느냐? 세상에,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아, 정말요!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여기 서류에 적힌 남자들보다 훠얼씬 나은 영식과 혼인할 수 있어요.”
그 말끝에 세르트 자작이 상체를 기울여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대공 각하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하신 게냐? 혼처라도 알아봐 주신다던?”
“어, 어니요? 하, 참나! 그럴 리가요! 하하”
“……맞구먼, 뭘!”
세르트 자작은 테이블을 콩 때리며 신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봐라. 네가 혼처를 잡아 결혼하게 되면 각하께서 제일 이득이 아니겠느냐? 귀찮은 혹을 떼는 거니 말이다!”
“듣는 혹 기분 나쁘거든요?”
세르트 자작은 목소리를 가다듬는 척 헛기침했다.
“아무튼 그래서 각하께서 나서 주신단 말이지?”
“뭐, 노력은 해 보신다 하셨으니까요. 그러니,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알았죠?”
“내가 너희 엄마처럼 입이 가벼운 줄 아느냐? 소문은 퍼트릴 게 있고 담고 있을 게 따로 있지.”
세르트 자작은 넉살 좋게 허허 웃었다.
어찌나 우렁차게 웃는지 집무실이 웅웅 울릴 지경이었다.
“아버지 웃는 건 또 처음 보네요.”
“자랑이구나, 이것아!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아느냐? 응?”
린느는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치맛자락을 펼쳐 인사했다.
“아버지 그럼 전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느냐? 저녁 정찬 시간이니 함께 내려가야지!”
세르트 자작도 린느의 뒤를 따라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그의 안색은 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웃는 거 보니 마음이 좀 이상하네.’
비록 세르트 자작과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20년 전 자신을 버리고 떠난 친아빠보단 더 정감 가는 걸 왤까.
그녀 역시 그의 미소를 보며 따라 웃었다.
방금과 달리 가벼운 걸음으로 두 부녀가 정찬실로 향했다. 정찬실에 가까워질수록 자작저를 가득 채운 음식 냄새가 일품이었다.
“우리 저택 셰프는 정말 요리를 잘하는 거 같아요. 그쵸?”
“다른 건 몰라도 셰프의 주급은 톡톡히 신경 쓰고 있지.”
구두쇠 아니랄까 봐. 린느는 귀엽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정찬실로 들어섰다.
“너희 엄마는 셰프의 주급을 줄여야 한다지만, 그건 아주 바보 같은 소리이다.”
“하긴, 어머니는 집에 잘 들어오시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셰프의 주급을 줄이라뇨?”
“그렇지! 그래, 이제야 우리 딸과 대화가 되는구나!”
세르트 자작은 넉살 좋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봐라. 이게 바로 음식이지!”
“맛있게 드세요, 아버지.”
세르트 자작의 청록색 눈동자가 의아한 듯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악의라곤 티끌도 없이 맑은 눈이었다.
그저 당황이 어려있을 뿐이었다.
“그, 그래. 린느, 너도 맛있게 먹거라.”
세르트 자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들었다.
기다란 포크로 샐러드를 쿡쿡 찔러 한입에 넣었다.
“하, 이 맛에 저녁은 꼭 집에서 먹는 거지! …뭐 하느냐? 안 먹고?”
“아버지께서 드신 후에 먹어야 예의지요.”
린느는 차분하게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접시에 덜었다.
세르트 자작은 눈썹을 굽이치며 린느를 바라봤다.
햐, 봐라! 이게 바로 동방예의지국의 K-예의다!
린느는 콧대를 높이 든 채로 샐러드를 접시에 담아 방울토마토부터 오독오독 씹었다.
“와, 이거 우리 저택에서 재배한 거예요?”
세르트 자작은 대답 대신 벙찐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가 샐러드를 즐겨 먹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샐러드 접시를 린느에게로 슬쩍 밀었다.
“부족하면 말하거라. 풀때기 말고 고기도 먹고.”
서툴지만 퍽 따듯한 배려였다.
* * *
며칠째 세르트 자작과 단둘이 저녁 정찬을 즐겼더니, 그의 잔소리가 눈에 띄게 줄었다.
더불어, 원작에서 볼 수 없었던 세르트 자작의 면모도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은근… 딸바보라는 점?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솔직히 둘째만 아니면 네 약혼을 서두를 필요 없다.”
“제가 언니라서요?”
세르트 자작은 소파에 기대어 고개만을 끄덕였다.
린느의 여동생인 헬렌은 11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영식이 있는데, 이미 두 가문 사이에선 왕래도 하는 약혼한 커플이었다. 그러다 보니 헬렌에게서 도착한 편지는 일정한 형태를 띠었는데, 편지 끝자락엔 매번 ‘로스텔 경에게도 저 역시 잘 지낸다고 전해 주실래요?’라고 적혀 있다. 그녀의 약혼자 안부를 세르트 자작에게 묻는 것만큼 노골적인 방법도 없을 테지.
“헬렌이 편지마다 결혼 노래를 불러 대니 나도 하릴없구나.”
“거참 급하기도 해라. 식장 들어갈 때까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건데, 그렇죠?”
“아주 욕을 하는구나? 헬렌이 들었으면 또 머리채 잡고 싸웠겠군.”
“그런데요. 헬렌은 어디에 있어요?”
“농담이지? 아카데미에 있잖느냐.”
“아아, 그렇죠! 하하. 그 시끄러운 게 없길래 그냥 막 던진 거예요.”
린느는 다급히 뜨거운 홍차를 들이켰다.
“커흣! 뜨! 아뜨!”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데인 혀를 붙잡고 호들갑을 떨자, 세르트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찬물! 어서 찬물을 가져와라!”
세르트 자작의 처절한 고함 끝으로 하녀가 찬물을 린느에게 건넸다.
린느는 데인 혀를 찬물에 담갔다.
“으이구! 칠칠치 못하긴!”
“헤헤…….”
찬물에 혀를 담그며 헤헤 웃는 사이, 사색이 된 하인이 뛰어와 허리가 접히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주,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세르트 자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인을 빤히 바라봤다.
“이 시간에 잡은 약속이 없건만. 누구라더냐?”
“스테빈스 백작저에서……!”
“스, 스테빈스?”
세르트 자작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지더니,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얘야, 절대 여기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말거라. 알았느냐?”
린느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만 끄덕였다.
입 안 가득 찬물을 머금은 채로.
세르트 자작은 느슨하게 풀어진 넥타이를 바짝 조이며 전장에 나서는 장군처럼, 써니룸을 빠져나갔다.
린느의 고개도 자연스레 세르트 자작을 향했다. 그리곤 입 안에 있던 물을 삼키며 메리에게 물었다.
“무, 무슨 일이야? 아버지 저렇게 정색하시는 거 처음 봐.”
“……글쎄요? 스테빈스 백작저와는 왕래가 없었는데.”
“왕래가 없었다고? 그런데 왜 갑자기…….”
린느는 며칠 전 혼처 리스트를 떠올리며 몸을 굳혔다.
“헐…. 설마, 74세 할아버지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