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렇게 된 마당에 숨겨 뭐 하겠어요? 아까는 목이 댕강 떨어질까 봐 말 못 한 거죠….”
“왜. 지금은 그대의 목이 철이라도 됐나? 목이 날아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지?”
밀러는 조소를 곁들여 린느를 비웃었다.
하지만, 린느는 여전히 뻔뻔하게 밀러를 바라봤다.
“우린 이제 비밀 친구니까요?”
“망할 그 친구 단어 좀 그만 쓰지?”
“넵.”
사람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밀러는 간헐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가 정색하길 반복했다. 저 조그마한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궁금할 지경이다.
“아, 대공저 근처로는 발길조차 하지 않을 테니 그건 걱정 마시구요!”
“그래서, 그대는 내게서 뭘 얻지?”
밀러의 날카로운 물음에 린느는 눈썹을 움찔했다. 역시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니까? 린느는 바싹 탄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호, 혼처요?”
“혼처? 그대의 혼처를 내가 왜?”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저지른 과오들이 조금 있잖아요……? 이제 슬슬 혼처를 찾아야 하는데 혼처가 없어요.”
“없을 만도 하지. 그대 같으면 남 스토킹하는 영식과 결혼하겠는가?”
“그러니까 각하께서 도와주세요. 그저, 각하께선 자리만 마련해 주시면 돼요. 네?”
“자리?”
밀러는 팔짱을 끼며 가소롭단 듯 린느를 내리뜬 눈으로 바라봤다. 자리는 무슨 얼어 죽을 자리? 이제는 아주 거래를 하자 드네. 역시 할 말을 마치자마자 칼처럼 내보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더불어 그녀의 부탁마저 들어주게 생겼으니 이게 무슨 꼴인지!
“지난 연회장에서 알게 된 분이 계시거든요? 그분과 자리를 만들어 주시면…….”
“설마, 섀르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린느의 어깨가 눈에 띌 만큼 움찔거렸고, 이는 그 어떤 대답보다도 확실한 긍정이었다. 그 탓에 밀러는 미간을 좁힐 대로 좁힌 채로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섀르넌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안 돼.”
“예? 왜죠?”
이 여인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걸까? 안 될 이유야 차고도 넘치건만. 물론 그 안 될 이유를 나열해 가며 이 여인에게 설명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밀러는 평소 그답게 설명 대신에 침묵을 유지했다. 린느는 그가 건네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재촉했다.
“물론 공작님께서 초대에 응해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는 만들어 주실 수 있잖아요. 네? 네?”
린느가 그의 대답을 재촉할 때마다 밀러의 짙은 눈썹이 움찔했다. 몇 번이고 답을 재촉하자 참다못한 그가 타박하듯 입을 뗐다.
“말도 안 되는 꿈이니 접어. 공작가의 그 늙은 노공들부터가 반대할 텐데 자리는 무슨.”
“그래 봐야 노공인걸요? 무려 우리 제국의 검이신 각하께서 만든 자리인데 자기들이 어쩔 거예요? 참나.”
“검 같은 소리 하는군.”
이렇게 약해 빠진 검이 어디 있다고. 그는 자조를 서슴지 않았다.
“약하다니요! 제가 본 분 중에서 가장 막강하신데요? 솔직히 자리 만들어 주기 싫어서 이러시는 거잖아요.”
“틀린 말만 해 대는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벽난로를 향해 걸었다.
묵직한 구두 소리가 그의 커다란 덩치를 대변했다.
들고 있던 시가 끝을 장작불로 지지더니,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열린 창문 틈으로 시가 연기가 빨려 나갔다.
“그 입 한번 놀리면 잃을 게 산더미이건만, 그대의 눈엔 내가 정말 강해 보이나?”
그는 그 씁쓸한 눈으로 린느를 빤히 바라보더니,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퍽 초연한 분위기였다.
“그래…. 그대의 말이 옳아. 이건 감기와 다를 게 없는 병이지. 약 먹으면 일시적으로 괜찮아지니까.”
밀러는 시가 끝을 진득하게 빨았다.
그때마다 그의 뺨이 옴폭 패이며 음영이 짙어졌다.
“하지만 대공이란 그런 흔한 감기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자리다.”
“…….”
린느가 풀 죽은 얼굴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리자 그런 그녀를 보며 밀러는 나직이 웃었다.
“당장 간단한 감기에 걸려 앓아누워도, 그들은 내 목숨줄부터 쥐고자 할 테지. 이게 바로 그대가 높게 여기는 내 자리다.”
“못돼 먹었네요. 아픈 걸 아프다고 말도 못 하다니. 그러니까 병이 깊어지죠.”
무슨 홍길동이냐고. 아픈 걸 위로받진 못할망정 약점으로 여긴다고?
린느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주먹이 희게 질리도록 쥐었다.
“그런 것들은 앞에서 웃다가 뒤에서 훅 쳐 버려야 해요. 어떤 놈이 그러던가요? 제가 다음 연회 때 미친 척하고 샴페인 샤워시켜 줄게요.”
밀러는 린느를 빤히 바라보더니,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여느 때보다 밝은 웃음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올려 두더니, 린느를 다시 빤히 바라봤다.
“도통 그대의 속을 모르겠군.”
밀러는 그와 퍽 어울리는 점잖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린느 역시 그의 미소를 따라 입꼬리를 올려 따라 웃었고, 밀러는 돌연 웃음기를 지우며 린느의 시선을 피했다.
‘무안하게.’
그녀 역시 입술을 삐죽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선선한 바람이 응접실을 차게 식힐 무렵, 밀러가 시가를 잘라 내며 불을 껐다.
“공작과의 자리는 약속 못 한다. 하나, 혼처는 알아보도록 하지. 기대는 말고.‘
“아…… 넵. 감사해요.”
물론, 밀러가 섀르넌과의 자리를 마련해 주리라 기대는 하지 않았다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혼처도 알아봐 주긴 한다니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밀러는 잠시 린느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 밖으로 향했다.
잠깐! 돌연 자리를 떠나는 그를 향해 린느는 손을 뻗었다.
“저! 각하!?”
다급한 외침에 밀러는 인상을 구기며 몸을 틀어 린느를 바라봤다.
“혼… 처를 알아봐 주신다면서 이상형도 안 물어보세요?”
“이상형? 지금 그대가 찬물 더운물을 가릴 처지인가?”
밀러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구둣발 소리가 스산한 대공저를 울렸고, 그때마다 저택이 주인의 발소리를 섬기듯 울렸다.
‘뭔 발걸음 소리마저 섹시하냐.’
린느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톡톡 두드렸다.
밀러가 응접실에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괄 집사가 다가왔다.
“마차까지 안내해 드리지요.”
“네? 마차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택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시죠?”
“네, 각하께서 그리하셔도 좋다 하셨습니다.”
뭐야?
‘차 대접해 준다더니.’
적어도 홍차 한 잔은 대접해 줘도 좋잖아?
아니지, 독이 든 홍차보다야 맨입으로 나오는 게 나아.
게다가, 밀러가 부른 이유도 또렷하게 보이니 걱정할 것도 줄었다.
‘어제 무슨 말을 엿들었는지 확인하는 게 다였나 보네. 다행이다. 구두 뭉갠 건 말도 안 꺼냈네.’
린느는 고개를 살랑살랑 끄덕이며 집사의 뒤를 따라나섰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도 린느는 대공저 여기저기를 훑었다.
“…….”
밀러는 2층 난간에 기대어 린느를 내려다봤다.
웅장한 저택을 마치 자신의 망토처럼 두른 채, 밀러는 작디작은 그녀를 지켜봤다.
“기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살려 준 꼴이군.”
당당하게 대공저 밖으로 나서는 린느를 바라보며 실소를 뱉었다.
뱉는 실소에 비해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성탄절 선물을 미리 받은 아이처럼 천진했다.
린느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도 밀러는 숨죽여 그녀를 바라보더니, 돌연 미소를 지웠다.
“알렉스.”
“네, 각하.”
“어제 연회로 세르트 영애에게 날파리가 꼬일지도 모른다. 낱낱이 정리해서 내게 올려.”
“……예?”
그 조그마한 입에서 섀르넌이 나올 줄이야. 원인 모를 짜증이 그의 입꼬리를 굳혔다.
이에 알렉스는 믿을 수 없단 듯 밀러를 바라봤다.
‘애초에… 꼬이는 파리가 없으면 어째야 하나.’
알렉스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만 끄덕였다.
밀러는 자신에게 부탁하던 린느의 미소를 떠올리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눈도 낮아지나? 어이가 없군.’
게다가, 뭘 믿고 자신에게 혼처까지 맡기는 건지.
그는 먹잇감을 미리 잡아 둔 맹수처럼 태평하고도 평온했다.
불안 증세마저 잊을 만큼.
* * *
대공저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통이 트였다.
린느는 양팔을 드높이 든 채로 차가운 공기를 가득 마셨다.
“하, 살 거 같아.”
메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살 거 같다고?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은데?
메리는 린느의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가씨, 제발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는 조심하세요. 네?”
린느는 대답 대신에 해맑게 웃었다.
그 틈에 아까 그 마부가 쪼르르 뛰어와 마차 문을 달칵 열었다.
린느는 마부를 보며 밀러의 잔악한 말을 떠올렸다.
「대공저에서 일하는 사용인 절반은 말을 못 해.」
그런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다니!
린느는 진저리를 치며 마차로 올라탔다.
메리까지 올라타자 문이 얌전하게 닫혔다.
달칵.
문이 닫히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간 할 말을 참던 메리가 입을 뗐다.
“혹, 각하께 기억상실증에 대해 말씀하신 건 아니시죠?”
“말했는데? 아픈 게 뭐 흠이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
“그러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두 분께서 말씀을 오래 나누셔서 정말 놀랐어요.”
그야 오랜 알바 경력 중 하나랄까?
‘밀러 같은 스타일은 말꼬리를 잡아서 신경을 긁어야 말을 하는 타입이랄까.’
쉬운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쩌겠나.
‘엮일 수밖에 없는 사이라면, 이렇게라도 풀어 나가야지.’
그나마 일반적인 대화가 가능한 거에 감사할 뿐이다.
이 또한 미리안도 밀러도 흑화하기 전이라 가능한 거겠지.
본격적인 흑화 이후로는 간단한 대화도 불가능한 정도일 테니까.
그들이 소설 절정으로 치닫기 전에 어서 둘 사이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마음껏 빙의 라이프를 즐기지!
‘어서 연애하고 싶다……!’
린느는 로판 세계관에서 해 보고 싶었던 데이트를 상상하며 몸을 뒤로 기댔다.
메리는 태평한 린느를 보며 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러다가 일이라도 치시면 어쩌지? 아니야, 아가씨를 믿어야 해!’
마차가 목가적인 풍경을 뒤로하고 작은 상업지구에 진입하자 다양한 상가들이 즐비했다.
그 작은 상업지구를 지나쳐 웅장한 신전을 지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귀족들의 저택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메리가 주춤하며 입을 뗐다.
“아가씨, 저택으로 돌아가면 주인님께서 부르실지도 몰라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응, 걱정하지 마.”
마부는 유연히 자작가로 들어서며 속도를 늦췄고, 정차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부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메리가 재빨리 마차에서 내리더니 린느에게 손을 뻗었다.
“내리세요, 아가씨.”
린느는 유연히 마차에서 내리며, 자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마부를 바라봤다.
고작 하루였는데도 밀러의 매서운 눈동자와 잔악한 조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대공저의 마부라니.
‘하필이면 그 많은 귀족 중에서 밀러를 모실 게 뭐예요….’
성격 더러운 주인을 매일 마주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린느 역시 잘 아는 고충이었다.
린느는 안타까운 마음에 품에 지닌 비상금을 마부에게 쥐여 주자, 마부는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다.
“고마워서요. 덕분에 조심히 도착했으니 이 정도는 받아 줬으면 좋겠어요.”
린느는 다정하게도 마부의 노고를 위로했다. 이에 마부는 고개를 슬쩍 들며 사람 좋게 웃으며 두 손으로 공손히 은화를 받았다.
“아이구 별 말씀을유! 제가 더 감사하지유!”
“엥?”
메리와 린느는 멍한 얼굴로 마부를 바라봤고, 마부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더니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린느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마, 말을 할 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