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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4화 (14/122)
  • @14화

    린느는 벙찐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런 그녀를 밀러가 빤히 내려다보며 코웃음 쳤다.

    “그 검은 드레스에 길게 내린 머리칼까지. 불쌍해 보이기 위한 수작인가?”

    “그, 그럴 리가요? 아니, 그런데 인기척도 없이…….”

    “내 저택에서 인기척이 있든 말든 그대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듣고 보니 그건 그렇네.

    린느는 입술을 찡그리기만 할 뿐, 입을 다물었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오늘은 어제처럼 화낼 힘이 안 나나?”

    “화라니요? 제가 언제 화를 냈다구.”

    린느는 가장 화려한 싱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밀러는 조각상처럼 매끈한 미간을 좁혀 린느를 빤히 주시했다.

    린느는 그런 밀러를 뻔뻔하게 바라봤고.

    둘 사이에 정적이 이어질 때쯤, 메리가 호다닥 뛰어왔다.

    “아, 아가씨. 거긴 상석입니다. 각하께서 앉으셔야…….”

    “아!”

    린느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밀러는 그런 린느를 빤히 바라보며 간간이 실소를 터트렸다.

    “살다 살다 별……. 됐다.”

    린느는 밀러의 타박에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밀러는 그런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느릿하게 싱글 소파에 기대었다.

    고작 소파에 걸터앉는 것뿐인데도, 밀러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섬세하게도 우아했다.

    적막이 흐르자, 린느는 메리에게 눈짓해 내보냈다. 메리라도 이 상황에서 빠지는 게 나을 테니까.

    밀러는 그 말간 턱을 들어 올리며 쨍한 금빛 눈으로 린느를 깔아봤다.

    린느는 그런 밀러의 눈을 요리조리 피했다.

    “말하지?”

    “……무슨 말이요?”

    “어제.”

    “어, 어제?”

    린느는 상체를 옴츠린 채 밀러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무슨 대화를 했더라?

    만나자마자 구두 망가트리고, 테라스에서 관심 없다고 말한 게 다가 아니었나?

    린느는 청록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그러자, 참다못한 밀러가 입을 뗐다.

    “테라스에서.”

    “테라스에서… 각하께서 제 뒷담 까셨, 아니 험담하셨잖아요?”

    기고만장하던 밀러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딴 거 말고. 어제 나와 알렉스의 대화를 쥐새끼처럼 엿들은 거에 대해서 말하는 거다.”

    “쥐, 새끼요?”

    들릴 듯 말 듯, 린느는 이렇게 귀여운 쥐새끼가 어디 있느냐며 구시렁댔다.

    밀러는 쓸데없이 반듯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큰 쥐새끼는 귀엽지도 않아.”

    “아, 아니 뭐든 간에 쥐새끼는 귀엽지 않거든요?”

    “아무튼, 어제 어디까지 엿들었는지 말해. 쓸데없이 말꼬리 잡지 말고.”

    린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참자. 참아야 해.’

    망할 신분 사회를 3번 정도 외친 후에야 린느는 입꼬리를 올렸다.

    “저 어제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뻔뻔하기 그지없군.”

    “제 귀는 있어도 들리지 않고, 제 입은 뚫려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니까요.”

    “얼씨구.”

    “정말요…! 저처럼 말 잘 들어 주고 비밀 유지 잘하는 사람도 없거든요? 저 입 엄청 무거워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밀러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어금니를 물었다.

    “그거 아나?”

    “뭘요?”

    “대공저에서 일하는 사용인 절반은 말을 못 해.”

    “……허.”

    “왜 그런 줄 아나?”

    “혀, 혀를 잘랐어요?!”

    “그렇……. 아니! 그런 미개한 짓을 왜 하나?”

    “아니, 말을 못 한다길래요.”

    “아무튼, 그만큼이나 밖으로 말이 새는 꼴이 싫단 소리다.”

    “…저 그런데 정말 들은 게 없어요. 설령 들었어도 전 못 들은 거예요.”

    밀러는 실소를 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린느는 입 안을 깨물었다.

    ‘궁정물 보면 궁녀들이나 사용인들이 맨날 이렇게 말하던데. 왜 안 통하지?’

    린느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밀러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배부른 맹수처럼 태평하던 기세도 없이, 인내심이 바닥난 듯 린느를 바라봤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잘도 입을 놀리는군. 그깟 말로 내가 그대를 믿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요.”

    “아니면 장소를 옮길까? 세르트 자작저로.”

    더 이상 세르트 자작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된다. 그랬다가는, 그녀가 꿈꿔 온 금수저 삶이고 뭐고 모조리 물거품이 될 테니까.

    “그, 그냥 여기서 말할게요.”

    “그래,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망할 거짓말과 가면은 다 벗고. 어제 뭘 들었는지 말해.”

    밀러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그의 입매는 사이코 살인마처럼 기괴하게 호선을 그렸고, 눈빛은 한결 더 살벌해졌다.

    린느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제가 어제 연회에 참석한 이유가 대공 각하를 보기 위함이라는 알렉스 님의 이상한 추측…… 이요?”

    “그리고.”

    “끝인데요?”

    “내가 언제까지 화를 참아야 말을 할까 싶군.”

    “…그럼 약속해 주세요.”

    “뭘?”

    “보복하지 않으시겠다구요.”

    “후작가나 공작가도 아닌 고작, 자작가에게 보복할 만큼 옹졸하지 않다.”

    웃기고 있네.

    원작에서는 린느가 미리안 좀 갈궜다고 세르트 자작가를 멸문시켜 놓고선?

    린느는 할 말이 많지만, 모조리 삼켰다.

    “아무튼, 약속하시는 거죠?”

    밀러는 대답 대신, 어서 말이나 하란 듯 턱짓했다.

    “저 진짜 각하만 믿고 말하는 거예요. 정말요!”

    “언제부터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사이라고. 하, 아무튼 시간 끌지 말고 말하라.”

    “약…… 이요.”

    밀러의 미간이 눈에 띄도록 구겨졌다.

    “쥐새끼 같으니. 다 들어놓고 시치미를 떼?”

    “못 들은 척해 주려던 거뿐이에요.”

    “그대가? 다른 여인도 아니고 내 뒤만 따라다니는 그대가? 못 들은 척을 해 주려 했다? 그걸 지금 믿으란 건가?”

    “믿기 싫으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전 정말 그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거든요.”

    “이용하려 했겠지.”

    린느는 미간을 좁힌 채 밀러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길 바라십니까? 어째 그렇게 하길 바라시는 말투라서요.”

    밀러는 입매를 비틀어 조소를 뱉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한때나마 좋아했던 사람의 아픔을 이용할 생각 추호도 없어요. 차라리 쿨하게 차이는 게 낫지.”

    순간, 사납게 구겨져 있던 밀러의 미간이 단번에 풀렸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밀러의 놀란 눈이 스르륵 풀렸다.

    그는 한동안 정적을 지키더니, 말없이 시가 케이스를 꺼냈다.

    달그락거리는 케이스를 빤히 바라보더니, 린느를 보며 다시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정적.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만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주제넘은 소리는 붙이지 않을게요. 그럼 또 각하께서 화내실 테니까요.”

    “알아서 다행이군.”

    “…참지 마세요.”

    장작불을 바라보던 밀러의 눈동자가 린느에게로 옮겨졌다.

    “뭘?”

    “감기약이요. 아프면 약을 먹는 게 당연하잖아요?”

    밀러는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제넘은 소리 안 한다더니. 진즉 넘은 걸 모르나?”

    “그럼 넘는 김에 더 넘어도 될까요?”

    밀러는 말없이 린느를 째려봤다.

    선을 허들 넘듯이 넘나든 탓이었다.

    밀러는 반쯤 포기한 듯 린느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러자 린느는 냉큼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못 믿으시겠지만, 예전에 저도 그런 증상을 겪은 적 있어요.”

    “무슨 증상?”

    “가슴이 터질 듯이 팽창하는데 숨은 안 쉬어지고. 목소리도 안 나오고 앞은 노랗고. 그렇죠?”

    잠자던 맹수가 선잠 깬 듯,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린느를 향해 꽂혔다.

    하지만 린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러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누가 자리를 옮겨도 좋다 했지?”

    린느는 밀러의 타박에도 못 들은 척 바싹 붙어 앉았다.

    그럴수록 밀러는 린느와 거리를 두며 최대한 틈을 벌렸다.

    “각하, 대공저에 누수가 생기면 그걸 그대로 두세요?”

    “그런 자잘한 건 내 몫이 아니다. 집사가 알아서 처리할 테지.”

    “하지만, 각하의 저택인걸요?”

    “그럼 고치면 그만이고.”

    “하지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되겠어요?”

    밀러는 어금니를 물며, 린느를 빤히 주시했다.

    “내가 아이인 줄 아나? 지금 고치지 않으면 저택 지붕을 모두 갈아야 한다. 뭐 이깟 조언 하려고 하는 줄 모르고?”

    “그렇게 잘 아시면서 왜 안 고치셔요? 지붕을 모조리 갈아야 마음이 후련하시겠어요?”

    “오지랖 부리긴. 남 이사 지붕을 갈든 저택을 갈든 무슨 상관……. 아니, 내가 왜 그대와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하지?”

    “보다 심층적이고 생산성 있는 대화이지 않아요? 좋은뎁.”

    “……후우.”

    밀러는 가슴을 활짝 펼쳐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린느는 그런 밀러를 곁눈질하며 입매를 달싹였다.

    ‘이렇게 된 마당에 지금 그냥 확 질러? 과거 기억 안 난다고 말해?’

    린느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가며 입술을 짓씹었다가 입맛을 다시기를 반복했다.

    “수작 부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지금 하라. 그대가 이 공간에서 나서는 순간, 그대와 대화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말씀드릴게요.”

    할 말 해도 좋다고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밀러는 그만 헛웃음을 참지 못하고 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린느는 정무가 밀린 황태자처럼 신중한 낯으로 관자놀이에 검지와 중지를 대며 꾹꾹 눌렀다.

    “사실, 저도 좀 아픈 곳이 있어요. 아무도 모르는 병이에요.”

    “아프든가 말든가.”

    “아니, 들어 주신다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밀러가 그녀의 말대꾸에 진저리를 치며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린느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기억 상실증이라고 아시나요…?”

    “뭔지 모른다 쳐도 병명에 뜻이 다 나온 병이건만. 그걸 모르는 바보도 있나?”

    “아무튼요. 제가 그걸 앓고 있어서요.”

    “뭐?”

    밀러는 삐딱하게 앉아 린느를 빤히 내려다봤다.

    우아한 맹수처럼 틈 없이 거만한 자세였다.

    “그래요! 그런 반응들로 괴로울까 봐 그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구요!”

    “어물쩍 내 탓으로 돌릴 생각 말고. 정말, 기억상실증이란 소린가? 언제부터?”

    “열흘 정도 됐어요. 아니, 넘었나…….”

    밀러는 ‘열흘’이란 말에 눈을 얕게 뜨며 허공을 바라봤다.

    열흘이라. 열흘이라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그래서 그간 그대가 저지른 악행들이 기억이 안 난다 그 소리인가?”

    “네…….”

    “참 편한 병이군. 그간 저지른 일들이 기억에 없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린느의 주장과 밀러의 직감이 선명하게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열흘 전을 기점으로 무언가 크게 달라진 건 사실이라는 것.

    밀러는 어딘가 들뜬 낯으로 린느를 바라봤다.

    “그래서 그대는 내 용서를 바라나?”

    린느는 밀러의 물음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용서를 바라지 않는다? 밀러는 다시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타박하듯 린느를 바라봤다.

    “그럼 바라는 게 뭐지?”

    그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서로 아는 체하지 말자고 외치고 싶었지만, 린느는 꾸역꾸역 충동을 억눌렀다. 그의 약점을 알아차렸다는 걸 그에게 들킨 이상, 얌전히 왕래를 끊기는 틀려먹었고. 밀러가 직접 대공저로 초대까지 했으니, 유혈사태를 피하기도 더 어렵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가까이 둬야 해. 의심을 풀 때까지라도.’

    온갖 아르바이트를 섭렵하며 몸과 머리로 배운 본능적인 판단이다. 린느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로써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잖아요?”

    “쭉 말해 봐. 그 요망한 입으로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할 지경이군.”

    밀러는 화내듯 웃으며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자, 린느는 해맑게 밀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각하와 비밀 친구… 를 하고 싶어요! 아아, 오해는 마세요! 비밀 친구 별거 없어요! 평소엔 서로 없듯이 지내다가, 필요할 땐 서로의 아픔을 눈감아 주는 사이랄까?”

    린느는 ‘서로 없듯이 지내는 사이’라는 부분을 특히 강하게 말했다. 더불어 세상 무해한 표정도 곁들였다.

    하지만 밀러의 머리에 남은 건 ‘친구’라는 단어뿐이었는지 그는 그만 동상처럼 굳어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게다가 각하께선 제가 필요하신 거 같기도 했구…….”

    “내가, 내가 그대를? 그대를? 내가?”

    밀러는 돌연 낯을 달리하며 당황한 내색마저 비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린느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처럼 저택에서 쉬고 싶으실 땐, 스토커 후유증을 핑계로 쉬면 되지 않겠어요?”

    귀여운 미소까지 얹어 살포시 던졌지만, 밀러는 미간을 험악하게 구겼다.

    “앙큼한 쥐새끼 같으니. 못 들었다더니 알렉스와 나눈 대화를 낱낱이도 다 엿들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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