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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3화 (13/122)

@13화

밀러는 말대꾸하는 린느를 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싸늘한 적막한 밤공기가 맴돌자, 린느는 청록색 눈동자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자, 밀러가 건방진 눈으로 린느를 깔아봤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거지? 내 일정을 어떻게 알아냈냐고 묻는 거다.”

“고작 자작가의 영애인 제가 어떻게 그런 걸 알아내요? 다 우연이에요.”

“우연이라……. 세르트 영애, 일주일 전 드뷔르 살롱에서 나와 마주쳤지. 기억하나?”

“네.”

“4일 전, 오페라 극장에서도.”

“네.”

“그리고, 오늘 우연히 참석한 연회장에 그대가 또 있는데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그의 물음에 린느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받아들이길 뭘 어떻게 받아들여?’

그냥 외출한 거뿐인데, 그게 죄가 되나?

‘어이가 없네. 자기가 뭐 내 엄마야? 내 발로 외출하겠다는데 자기랑 무슨 상관이래? 설마 내가 아직도 자길 쫓아다니며 좋아한다고 생각하나?’

린느는 미간을 좁혀 밀러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밀러는 기다렸단 듯이 말했다.

“그대가 아직도 내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밀러는 오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작은 손짓 하나도 퍽 거만했다. 마치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사람처럼.

“린느 뷔 세르트.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내 관심을 얻고자 한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냔 소리다.”

“…대박.”

어떻게 저런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린느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토끼 눈을 떴다.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말라. 거슬리기 짝이 없어.”

밀러는 제 할 말만 던지고 린느를 스쳐 지나쳤다. 그때, 린느가 몸을 틀며 드레스가 차르륵 펼쳐졌다.

“아니, 각하께서 여성복 가게에 온 게 더 이상한 거 같은데요? 안 어울리게.”

린느의 까랑까랑한 말대꾸 끝에 밀러의 걸음이 뚝 멈췄다.

“말대꾸하는 건가?”

“네니요? 그리고, 각하께 관심 없거든요?”

그의 날랜 금빛 눈동자가 크게 멈칫했다.

“저, 각하께 관심 0.1도 없다구요. 그냥 외출을 좋아하는 것뿐이니, 오해는 말아 주실래요? 참나.”

린느는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자리를 떴다.

‘잘생기면 다인가? 어이가 없네. 다쉰 눼 눈 아풰 띠지 마라. 웃기고 있어.’

린느는 입매를 자유자재로 놀리며, 소리 없이 밀러 말투를 따라 했다.

유치한 짓이지만 꽤 통쾌한 복수였다.

그리고 밀러는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보며, 실소만 뱉을 뿐이었다.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난다더니, 딱 그 모습이었다.

“뭐, 저런…… 못 배워먹은…….”

그리고 그의 실소는 점차 조소로 바뀌었다.

관심이 없어지셨다? 웃기고 있군. 그래, 말은 쉽지. 당장 도망가려는 수작으로 저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놨다는 걸 모를까 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엿들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전까지는 못 본 척 그녀를 외면하는 게 다였으나, 린느가 방금의 대화를 엿들은 이상 이대로 둘 수 없지.

“세르트 영애에게 초대장을 보내 놔. 마차도 보내. 저 영리한 머리를 굴려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예?!”

밀러는 몇 수 앞을 내다본 자신의 혜안에 당황에 찬 린느의 낯을 상상하며 조소했다. 그의 시원스러운 입매가 수평을 맞춰 말려 올라갔다.

* * *

밀러의 예상은 아주 약간은 들어맞았다.

다음 날 아침, 세르트 자작저로 도착한 ‘초대장’에 린느는 침대에서 그대로 굴러떨어졌으니까.

초대장은 금박으로 뒤덮여 있었고, 중앙에는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 이거 뜯어 봐야 해? 꼭? 메리, 제발.”

“어쩔 수 없어요……. 아가씨께서 기억을 잃으셨단 걸 대공 각하께 알리면 또 모를까.”

“…그걸 믿어 줄까?”

메리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긴, 어제 그렇게 쏘아댔는데 이제 와서 갑작스레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변명한다면 화를 더 돋울지도.

린느는 손끝을 떨며 밀랍 인장을 천천히 뜯었다.

도독 하며 인장이 뜯어지자, 초대 카드가 보였다.

“하, 미치겠다.”

첫 티켓팅도 이렇게 떨진 않았던 거 같은데.

아, 아니지.

이건 죽으러 가는 티켓이라 더 떨린 걸지도…….

린느는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 천천히 읽어 내렸다.

그러자, 메리는 숨도 쉬지 않고 린느의 눈치만 살폈다.

“뭐, 뭐라셔요? 네?”

“…함께 차를 마시자는데?”

“차요? 와, 대공 각하와 단둘이 티 파티를 하시는 거예요!?”

린느는 카드를 봉투에 넣어 두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메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한숨을 쉬셔요? 함께 차를 마시자는 건 좋은 거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어…….”

어제 밀러에게 따박따박 말대꾸해 댔는데 갑자기 차를 마시자고?

‘이거 암살이야…. 차에 독을 타서 먹이려는 걸지도 모른다고.’

린느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냥 아프다 하고 안 가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어차피 한 번은 가셔야 해요. 각하께 초대받으셨으니까요.”

“아니, 초대받으면 무조건 가야 해? 뭐 쫌 내키지 않으면 안 갈 수도 있지!”

“무조건 가셔야 해요. 무려 대공 각하께서 보낸 초대장이니까요.”

망할 신분 사회!

“이러지 마시고 어서 준비하세요! 대공저 마차까지 도착했단 말이에요.”

“마, 마차까지?”

도망도 못 가게 만든다 이거야?

린느는 등줄기가 서늘했다.

하지만 메리는 그것도 모르고 화사한 드레스를 가져와 린느에게 내밀었다.

“아가씨, 이 드레스는 어떨까요? 이번 기회에 대공 각하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좋잖아요!”

“…….”

린느는 화려한 드레스를 보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검은색 드레스로 가져와…….”

어차피 장례식이나 다름없을 텐데, 뭐….

* * *

달그락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장송곡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린느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 아가씨 저기 좀 보셔요!”

메리가 가리키는 곳은 하늘을 찌를 기세로 높이 솟은 대공저였다.

‘블랙 드레스랑 잘 어울리는 저택이네.’

멀리서 바라본 대공저는 소설에서 묘사된 그대로였다.

[성채처럼 우뚝 솟은 수도 대공저엔 까마귀 소리만 울렸다.]

어쩐지 아까부터 어디선가 까마귀 소리가 나는 거 같더니만.

린느는 또다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사이 마차는 대공저로 진입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와…….”

메리는 갈색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길 따라 늘어선 메타세쿼이아를 올려다봤다.

세르트 가문이 자작가 중에서도 가장 득세한 가문이라지만, 역시 대공저와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메리는 연신 탄성을 뱉으며 창문 밖을 즐겼다.

“메리, 우리 앞날이 대공저처럼 어두컴컴하거든? 그러니 그만 웃을래?”

“에이,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셔요! 각하께서 어제 연회장에서 아가씨의 진면목을 보셨나 보죠!”

“진면목…?”

그래서 결국 죽이려 하나?

또다시 린느가 한숨을 내쉬자, 동시에 마차가 서서히 정차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부가 손수 문을 열어젖혔다.

메리는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 린느에게 손을 건넸다.

“아가씨, 제 손을 잡으셔요.”

린느는 메리의 도움으로 마차에서 고상하게 내렸다.

내내 마차 문을 잡고 있던 마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그리곤, 린느가 그에게 고맙단 말을 채 전하기도 전에 마부는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과묵해……! 망할, 마부도 과묵하다고! 이거 낌새가 아주 안 좋아.’

본래 마부들은 인싸 재질 아닌가?

너스레 떨며 복선 하나씩 던져 주는 감초 같은 역할 아니었냐고!

‘아니지. 그건 보통의 마부고, 저 사람은 대공저의 마부잖아….’

린느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대공저 로비로 들어섰다.

그러자, 칼처럼 각을 세운 제복 차림에 반듯하게 올린 포마드 스타일로 넘긴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세르트 영애, 어서 오십시오.”

대공저 총괄 집사였다.

밀러의 심복이자, 대대로 대공저를 지켜온 수문장.

‘이쯤 되니 알렉스가 그리울 지경이네.’

밀러의 보좌관인 알렉스는 린느와 구면이기도 하지만 총괄 집사처럼 엄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 알렉스가 원작 린느를 단칼에 내쫓지 못하고 내내 말려들었겠지.

린느는 총괄 집사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반가워요. 린느 뷔 세르트입니다.”

총괄 집사는 린느의 격식 차린 인사에 멈칫하더니, 가볍게 묵례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를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르트 영애, 이만 따라오시지요.”

린느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섞여 넓디넓은 대공저를 울렸다.

딛는 걸음마다 바닥은 거울처럼 청결해, 잘 닦인 대리석 바닥이 대공저 하녀장의 성격마저 대변했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용인들은 가볍게 고개를 숙일 뿐, 그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도 크게 못 쉬겠어.’

린느는 양팔을 감싸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오시는 길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는지요?”

“전혀요. 아주 편했어요.”

“다행입니다.”

다시 정적, 린느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처럼 구석구석 살피기 바빴다.

‘어디 구석진 곳 잘 찾아보면 시체 2-3구 정도 나올지도 몰라.’

뱀파이어의 성도 아니고 이게 무슨…….

린느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싸한 기운에 양팔을 다시 문질렀다.

‘검은 드레스 입길 잘했어. 이런 분위기에 노란 드레스라도 입었다고 생각해 봐. 어우.’

린느는 잘게 도리질했다.

그때, 앞장서던 집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잠시 편한 곳에 앉아 계십시오.”

아치형 기둥 너머로 늘어선 소파들이 언뜻 보였다.

응접실이었다.

“고마워요.”

집사는 미소와 함께 묵례를 한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의 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쯤에야, 린느는 천천히 응접실로 들어섰다.

“후우…….”

린느는 장엄한 벽난로를 멍하니 바라봤다.

타닥타닥 불꽃에 타들어 가는 장작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메리, 저거 내 꼴 같지 않아?”

“무슨요?”

“장작 말이야. 내 속이 이렇게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거 같다고.”

“…….”

“메리, 혹여라도 내가 함께 돌아가지 못한다면, 저번 주에 산 드레스는 너 가져….”

“아주 눈물겨운 유언이군.”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목소리에 린느는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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