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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2화 (12/122)
  • @12화

    “그냥 내 집무실에 둬.”

    “예? 이, 이 구두를요?”

    “응.”

    섀르넌은 망가진 구두를 바라보며 실없이 웃었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섀르넌의 시야를 가렸다.

    섀르넌은 그림자의 주인을 직감한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각하, 줄곧 복도에만 계실 생각이세요?”

    거대한 그림자의 주인공은 귀족들을 피해 복도를 전전하던 밀러였다.

    밀러는 대답 대신 전쟁터에서 적군에서 짓밟힌 듯한 섀르넌의 구두를 빤히 바라봤다.

    “발등이든 발가락이든 부러졌겠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 이 정도라면 밟아 부러트렸을 수도 있어.”

    실없는 소리라며 섀르넌은 천진하게 웃었다.

    “그럼 의원이라도 불러야 할까요? 전 멀쩡한데.”

    “진심이다. 혹, 독을 발라 그대의 발등을 구겼을지도.”

    “신박한 암살법이군요.”

    섀르넌은 입매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러자, 밀러는 헛웃음을 곁들며 섀르넌을 바라봤다.

    “하, 시답잖은 농담은 그만두지.”

    섀르넌은 웃음기를 식히며 밀러의 안색을 살폈다.

    “각하, 많이 불편하십니까?”

    “괜찮다.”

    “이만 대공저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시겠…….”

    “안 그래도 열리는 연회마다 불참한 탓에 귀족들이 촉을 세우고 있어. 차라리 오늘 하루 고생하고 마는 게 낫지.”

    “부디, 무리하지 마세요.”

    밀러는 아까보다 희게 질린 낯으로 뻐근하게 웃었다.

    그것도 잠시, 돌연 입매를 단단히 굳힌 채로 물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르트 영애에게 춤을 신청했나?”

    “뭐, 호기심이죠. 각하 말씀대로 전 호기심 때문에 단명할 거예요.”

    섀르넌이 장난스레 콧잔등을 구기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밀러는 민망할 만큼 무표정하게 섀르넌을 바라봤다.

    섀르넌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거두며 각을 잡아 자세를 고치더니 목소리까지 다듬었다.

    “사실, 그 영애가 세르트 영애인지 몰랐어요.”

    알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을 테지만, 어쨌든 모르고 린느에게 접근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춤은… 저와 춤을 추고 나면 영식들의 시선이 세르트 영애에게 몰릴 테니까요. 그래서 그랬죠.”

    하지만.

    정작 린느와 대화를 하다 보니 그녀가 정말 대공저를 들쑤신 세르트 영애가 맞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한데 제가 상상하던 여인이 아닌지라 조금 놀랐어요.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라 했더니 뭘 물어봤는지 아십니까?”

    밀러는 가볍게 섀르넌을 향해 턱짓했다. 희고도 칼처럼 매끈한 턱이었다.

    섀르넌은 잠시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웃었다.

    “데려온 악단이 공작저 전속 악단인지 묻던데요? 저와 각하 사이가 각별하단 걸 세르트 영애가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한데, 제게 악단을 물어봤어요. 하, 오늘 연회에 참석한 귀족 중에서 제게 악단에 대해 질문한 귀족은 세르트 영애뿐입니다.”

    섀르넌의 웃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밀러는 그런 공작을 바라보며 이따금 미간을 움찔했다.

    하려던 말이 분명히 있지만, 확신이 없어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결국 그는 반쯤 포기한 듯 느슨하게 말을 던졌다.

    “그대가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니 나도 이젠 모르겠군.”

    밀러는 눈을 얕게 뜬 채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콧잔등을 찡그렸다.

    린느와 의상실과 오페라 극장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확신했었다.

    세르트 영애가 여전히 자신을 스토킹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면, 의상실에서부터 낌새가 수상했지. 평소 세르트 영애라면 몰래 내 마차에 숨어들고도 남았을 테니까.’

    하지만, 린느는 의상실에서 오늘 입은 그 드레스만 구매하고 떠났다.

    그래, 그게 이상하단 거다.

    섀르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한참이나 밀러를 바라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모르시겠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약 일주일 전부터 세르트 영애가 이상하다.”

    섀르넌은 따져 묻지도 않고 그저 밀러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밀러는 어깨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처럼 종종 영애와 마주치긴 했지만, 대공저에 오진 않았다. 혹 내 일정이 새어 나갔나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하죠. 대공저의 흙 한 줌조차 각하의 수족인걸요.”

    섀르넌의 확신만큼이나 대공저의 보안은 어느 가문보다 철저했다.

    이유야 뻔했다. 밀러의 불안 증세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래. 아무리 살펴도 내 일정을 그 영애가 알아낼 길이 없단 말이지?”

    “……심경의 변화일까요?”

    밀러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옅은 미소를 얹었다.

    아까보다 훨씬 창백해진 안색이 밀러의 사정을 대변했다.

    “…모르겠다. 머리가 아프군. 찬 바람 좀 쐬고 오지.”

    밀러는 초조한 얼굴로 1층 테라스를 향해 몸을 틀었다.

    길고 넓은 복도를 성큼성큼 거침없이 거닐며 밀러는 숨을 골랐다.

    ‘미리안과 함께 왔으면, 이 빌어먹을 통증이 덜 했으려나.’

    미리안이 휴가를 떠난 이후로 불안 증세가 더 심해졌다.

    그렇다고, 오라버니가 보고 싶다던 미리안을 무작정 가둬 둘 수도 없고.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만이라도 미리안이 대공저에서 얌전히 지내면 좋으련만.’

    탄식과 함께 밀러는 계단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에서 내려오며 저도 모르게 연회장을 훑어봤다.

    ‘…….’

    무대 위를 아무리 찾아봐도 붉은 드레스가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린느가 보이지 않았다.

    밀러는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오며 린느를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돌아간 건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린느를 찾는 꼴이라니!

    밀러는 헛웃음을 뱉으며 빠르게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각하! 어디 가셨는지 한참을 찾았습니다!”

    “어머, 각하!”

    숨 막힐 만큼 넘치는 인파가 단번에 밀러의 숨통을 잡아챘다.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이명처럼 갈라져 귓가를 울렸다.

    한계치를 넘긴 탓이었다.

    “잠시.”

    밀러는 곧장 야외로 걸음을 옮겼다. 덩그러니 남은 귀족들은 밀러를 멀찍이 바라볼 뿐이었다.

    “엥? 각하?”

    화재 대피하는 사람처럼 그의 발걸음은 다급했다.

    귀족들의 이목조차 뒤로하고 무작정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만큼 심장 박동도 점차 빨라졌다.

    덜컥.

    테라스 문을 단번에 열어젖히자 차가운 밤공기가 밀러의 머리를 차게 식혔다.

    “…….”

    야외 테라스로 나오자 막힌 숨통이 턱하고 풀렸다.

    “…….”

    테라스를 비추던 달빛이 밀러를 위로해 주듯 반겼다.

    거기에 서늘한 바람이 체리 향을 머금은 채 불어왔다.

    “후우…….”

    밀러는 숨죽여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때, 알렉스가 테라스 안으로 다급히 들어왔다. 알렉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각하.”

    밀러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펼쳐졌다.

    말을 붙이지 말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달칵.

    알렉스는 연회장으로 향하는 테라스 문을 가볍게 걸어 잠갔다.

    연회장 전체를 울리는 음악 소리와 대화 소리가 옅어지자 밀러의 심장 박동도 점차 느려졌다.

    가쁘게 몰아치던 숨도 원래 호흡으로 돌아갔다.

    “하아…….”

    밀러는 테라스 난간을 꼭 쥐었다.

    그의 손은 두꺼운 난간을 쥐고도 남을 만큼 큼지막했다.

    턱없이 커다랗고 두꺼운 손을 보고 있자니 우스웠다.

    ‘생긴 것만 멀쩡하지, 아직도 고작 이깟 거 하나 떨치지를 못하니.’

    승냥이들처럼 모여든 귀족들에게 이 꼴을 들켰다가는 우스운 꼴만 되겠지.

    밀러는 희게 질린 얼굴을 들어 옷을 매무시했다.

    “각하, 약 드시겠습니까?”

    “됐다. 곧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니 둬.”

    보좌관은 안타까운 듯 밀러의 안색을 살피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있다가 들어가지.”

    밀러는 희게 질린 안색을 숨기고자 태연한 척 꾸몄다. 하지만, 숨긴다 해서 숨겨질 병이 아니었다.

    때와 장소 없이 닥치는 불안 증세도 고통스럽지만, 그런데도 태연한 척 행동해야 하는 게 더 곤욕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대공저에서 나오지 않을 수도 없고.

    어쨌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고, 사교계에 신경도 써야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하…….”

    그의 짙은 한숨이 테라스 전체를 심해로 빠트릴 기세였다.

    밀러는 난간에서 손을 뗐다.

    “이럴 때 보면 세르트 영애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몰라.”

    “네?”

    “대공저에서 몇 주씩이나 틀어박혀 있어도 세르트 영애의 스토킹을 핑계로 대면 그만이니까.”

    희게 질려 있던 창백한 안색이 점차 생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세르트 영애께선 너무 과하십니다. 오늘 연회에도 참석하실 줄이야.”

    이번엔 알렉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동시에, 밀러와 알렉스의 시선이 난데없이 등장한 린느에게로 꽂혔다.

    린느는 유연히 팔짱을 끼며 헛웃음을 뱉었다.

    ‘지금 둘이서 내 뒷담 깐 거야? 어이가 없네.’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테라스에서 뒷담을 까?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린느는 입매를 비틀며 팔짱을 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지?”

    “줄곧 여기에 있었는데요?”

    건방진 린느의 대답에 밀러의 미간이 좁혀졌다.

    “줄곧?”

    “여기가 각하 전용 테라스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한데, 말투가 상당히 거슬리는군.”

    밀러가 당당하게 입매를 비틀며 조소를 뱉자, 린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니, 뒷담은 자기가 까 놓고서 지금 말투 지적하는 건가?

    린느는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뱉었다.

    “그럼 어떤 배알 없는 사람이 뒷말하는 사람에게도 말을 예쁘게 한답니까?”

    “뒷말이 나오도록 행동하지 않으면 될 텐데.”

    “무, 물론 그간 제가 각하께 민폐 끼친 건 알지만 더는 그러지 않으려 노력…….”

    “노력?”

    “그럼 이 이상 어떻게 하죠? 저도 당황스러워요. 가는 곳마다 각하께서 계시니까요.”

    “누가 들으면 내가 그대를 미행하는 줄 알겠군?”

    “뭐…… 그건 아니시겠죠. 아마도.”

    마구 몰아치던 밀러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아니, 그렇잖아요. 솔직히, 가는 곳마다 각하께서 꼭 계시니까 제가 오해할 법도 하죠.”

    “내가 그대를 오해해야 하거늘. 그대가 날 오해한다? 내가 그대를 미행하고 스토킹한다고?”

    밀러는 검지로 자신의 넓은 가슴팍을 콕 찌르며 사정없이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린느는 물러설 기색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대를 미행하나?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는 소리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야 많죠?”

    밀러는 고개를 쭉 내밀며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짙은 눈썹은 물결을 치듯 꿈틀거리기 바빴다.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말을 뱉을지 경이롭도록 궁금했다.

    밀러는 엄중한 지휘관처럼 린느에게 말해 보라며 턱짓했다.

    “바쁘신 각하께서 친히 시간을 내어 절 미행할 이유로 가장 유력한 건…….”

    “주춤거리지 말고 쭉 말하지?”

    “제가 그만큼… 미인이라서요? 뭐, 매력이 넘친다거나. 아니면 미운 정이라도 들었다거나?”

    밀러는 그대로 동상처럼 굳었다.

    달빛을 쐬던 밀러의 낯이 동상처럼 창백했다.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능청맞게 바라봤다.

    “그, 그 무슨. 하,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거로 보이나?”

    “예? 아니요? 완전 진지하신 거 같은데요?”

    “그런데 생각한 근거가 꼴랑 그거고?”

    ‘뭐래, 솔직히 이 정도면 미리안만큼 예쁜데?’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괜스레 드레스 리본을 매만졌다.

    “하… 더는 들어 볼 말도 없으니 사라져.”

    “제가 먼저 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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