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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1화 (11/122)
  • @11화

    남자는 우아하게 웃으며 가볍게 묵례했다.

    “다시 인사드리죠. 전 하미르 폰 섀르넌입니다. 이 저택의 주인이자 오늘 파티의 주최자입니다.”

    “헐.”

    “레이디께서 오늘 연회가 재미있으시다니 저 또한 마음이 놓입니다.”

    린느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토끼 눈으로 섀르넌을 바라봤다.

    섀르넌, 그래! 하미르 폰 섀르넌을 모를 리가 없지!

    ‘세상에… 소설에서 묘사된 모습보다 만 배는 더 잘생겼는데?’

    섀르넌은 밀러가 유일하게 마음을 연 오랜 친우였다.

    원작에선 밀러의 불안증세가 심각해지는 동시에 미리안을 향한 집착 증세도 함께 심해졌다.

    그의 병세가 악화할수록 미리안은 밀러를 혐오했고.

    결국, 끝까지 밀러 곁에 남은 건 섀르넌뿐이었다.

    ‘잘생겼는데 의리남……! 중간에 배신하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전혀 아니고 끝까지 밀러 곁을 지킨 잘생긴 의리남!!’

    그러다 미리안이 밀러를 죽였단 소식에 섀르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리안을 잡기 위해 사병까지 파견했었다.

    미리안을 죽이고 밀러의 복수를 위해서.

    ‘그래, 그렇게 섀르넌이 짱 멋지긴 했는데…….’

    문제는, 그런 섀르넌이 미리안의 서브남이었다는 사실이었다.

    [ 설정오류발작버튼 : 작가님, 섀르넌 섭남인 거 잊으셨죠? 이 소설 BL이었나요? 섀르넌이 밀러의 섭남이죠? 미리안의 섭남이 아니라? 더는 못 참겠네요; ]

    [ └ 222 ]

    [ └ 333333 ]

    하린이 역시 그 댓글을 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미리안과도 엮이지 않은 남자면서도 끝내주게 멋진 남자니까!

    ‘하, 고민할 거 없이 섀르넌이다. 밀러는 치우고, 서브남 내 거 해!’

    린느는 보조개를 접어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멋진 연회에 초대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다음 연회에도 꼭 불러 주세요!”

    “그럼요. 레이디처럼 연회를 진정 즐길 줄 아는 분이라면 늘 환영이지요.”

    섀르넌 역시 다정하게 눈매를 접어 웃었다.

    어두워진 조명 아래로 느릿한 음악이 이어졌다.

    린느의 심장박동보다 느린 음악이 두 사람 사이를 달궜다.

    섀르넌은 커다란 손가락으로 넉넉하게 와인 잔을 들어 찰랑 흔들었다.

    “편히 하세요, 레이디.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도 좋고요.”

    섀르넌은 그 말간 얼굴로 능숙하게 질문을 던졌다.

    마치 어부가 낚싯대를 던지듯 가벼웠지만 노련했다.

    질문을 던진 와중에도 섀르넌의 연푸른색 눈동자가 린느를 내려다보며 눈매를 휘었다.

    ‘설마 이 여인이 세르트 영애일 줄이야. 생긴 건 멀쩡한데 스토커라니…….’

    얼마 전 밀러의 한탄이 떠올랐다.

    「가, 각하께서 스토킹을 당하신다고요?」

    「그렇게 됐다.」

    「그래서 외출을 더 자제하시는 겁니까? 그러다가 증세가 악화하기라도 하면…….」

    「그 정도는 아니고.」

    거짓말.

    밀러는 이미 약을 늘린 게 틀림없었다.

    이 쪼그마한 스토커 때문에.

    섀르넌은 먹잇감을 던져 둔 사냥꾼처럼 린느의 물음을 기다렸다.

    그리고 린느는 그의 속도 모른 채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물었다.

    “그럼 사양 않고 여쭤볼게요. 오늘 온 악단은 공작가 전속 악단인가요?”

    섀르넌은 미세하게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밀러에 대한 질문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무슨 악단?

    그의 손에서 찰랑찰랑 놀아나던 와인 잔마저 멈칫했다.

    “네? 악…… 단이요?”

    악당이 아니라, 악단?

    섀르넌의 물음에 린느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오늘 연회는 저 연주자들이 찢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까 음악 들으셨어요? 색소폰 연주자 오늘 월급날인 줄 알았다니까요?”

    린느는 신난 아이처럼 들떠서 이야기를 이었지만, 섀르넌은 뻐근한 미소만 지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악단 이야기를 할 줄이야.

    그저 영지에서 제일 잘나가는 악단을 데려왔을 뿐인데…….

    “저 그래서 그러는데, 혹시 가능하다면 저 연주자분하고 인사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오늘 연주 끝내줬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요! 제발요….”

    “어려울 거 없지요. 하하.”

    섀르넌은 와인 잔을 기울이며 당황한 기색을 감췄다.

    “감사해요! 진짜 오늘 저 악단을 데려오신 건 공작님의 타고난 선택이었어요. 진짜 멋져요.”

    린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린느를 보며 섀르넌은 실소를 삼켰다.

    ‘이런 유쾌한 여인이 스토커라니……. 각하께서 오해하신 게 아닐까?’

    아무리 살펴도 린느에게선 악의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호기심 많은 레이디로 보일 뿐이지.

    섀르넌은 린느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듯 응시했다.

    직전에 밀러가 눈을 가리켜 ‘청포도’라 한 이유를 깨달은 탓이었다.

    ‘보기 드문 눈동자야. 차가운 물에 갓 씻은 청포도같이.’

    섀르넌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린느를 바라봤다.

    린느는 체리 바구니를 들고서 체리를 입에 넣고 오물쪼물 씹었다.

    체리를 다 먹고 나자, 린느가 입을 뗐다.

    “그나저나, 연회는 몇 시쯤 끝날까요?”

    섀르넌은 다정하게 웃더니, 부드럽게 되물었다.

    “지루하십니까?”

    린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주최자 앞에서 연회가 언제 끝나냐 묻다니!

    ‘멍청아! 아오, 생각 좀 하고 말하자.’

    린느는 팝콘 상자처럼 껴안고 있던 체리 바구니를 얌전히 내려놨다.

    “오, 오해예요. 연회가 지루하면 제가 이렇게 재미있게 놀겠어요?”

    “농담입니다. 아, 노래가 바뀌었군요.”

    섀르넌은 다정스레 웃으며 린느에게 손을 뻗었다.

    “저와 춤 한번 춰 주시겠어요? 세르트 영애.”

    린느는 양손으로 입매를 가렸다.

    ‘오 세상에. 대박, 춤 한번 춰 주시겠어요, 라니. 아, 진짜 이거 인증 샷 남겨야 하는데!’

    입꼬리가 움찔거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웹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의 주인공이 되다니!

    그냥 영식도 아니고 세상에, 연회 주최자와의 댄스라니!

    린느는 콩닥거리는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섀르넌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손을 얹자, 섀르넌의 손이 넉넉하게 린느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 큰 남자 내 이상형이자너!’

    린느는 아랫입술을 꾹 눌러 빙구웃음을 방지했다.

    “레이디, 그거 아세요?”

    린느는 고개를 들어 섀르넌을 올려다봤다.

    섀르넌은 커다란 샹들리에 빛 아래에서 나른하게 웃었다.

    “공작이 된 이후로 그대가 제 첫 댄스 파트너랍니다.”

    ‘……뭔 말을 해도 잘생겼네.’

    만약, 전남친이 이런 대사를 쳤다면 코웃음 치며 타박했겠지만.

    섀르넌은 그 어떤 오글거리는 말을 뱉어도 우아했다.

    린느는 마른침을 삼키며 느슨하게 웃었다.

    “너무너무 영광입니다… 만, 저 춤을 잘 못 춰서요.”

    주말마다 댄스 학원에 다니며 걸스힙합을 배우긴 했다만…….

    이런 귀족들의 춤은 눈으로 본 것조차 오늘이 처음이었다.

    ‘섀르넌 구두도 밀러 구두처럼 망치는 거 아니야?’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때, 섀르넌이 린느의 귓가에 속삭였다.

    “각하께서 신는 구두보다 더 튼튼한 구두이니 마음껏 밟으세요, 레이디.”

    린느는 토끼 눈으로 섀르넌을 올려다봤다.

    ‘망할 밀러, 그사이에 일러바쳤냐? 일름보네, 진짜.’

    뻐근한 미소로 화를 덮어 감췄다.

    그때, 악단의 음악이 느릿하게 시작됐다.

    섀르넌의 커다란 손이 린느의 허리를 받쳐 천천히 움직였다.

    폭넓은 드레스 덕분에 엉망진창 스텝은 가릴 수 있었지만.

    섀르넌의 미간이 2초에 한 번씩 움찔거렸다.

    “죄, 죄송해요.”

    “괜찮, 습…! 니다.”

    사과하는 와중에도 섀르넌의 발등은 린느의 구두에 꾹꾹 밟혔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드레스에 가려져 보고 피할 수도 없었다.

    아차! 했을 땐 이미 콱 밟은 후였으니까.

    ‘미치겠네. 으, 또 밟았어. 어떡해!’

    이쯤 되니 악단의 음악이 끊기는 게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 멀쩡한 구두가 얼마나 엉망으로 되었을지 눈으로 보기 두려운 탓이었다.

    ‘연회장에 참석할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배워 놨어야지. 으이구, 과거의 나 진짜!’

    연회장 구경에만 진심이었지, 기본 중의 기본인 춤 배울 생각을 잊고 있었다니.

    자조에 자조를 얹어 한숨을 삼켰다.

    그때, 허리에 둘려있던 섀르넌의 손이 천천히 풀어졌다.

    잔잔하게 흐르던 노래가 천천히 마무리되며 귀족들의 박수 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본 건 있어, 린느는 허리를 숙여 드레스 자락을 활짝 펼쳤다.

    섀르넌은 그런 린느를 보며 픽 웃었다.

    “최고의 춤이었습니다, 레이디.”

    “…죄송해요.”

    섀르넌은 별일 아니란 듯 린느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손등부터 린느의 얇은 피부를 타고 척추까지 전율을 일으켰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안면 근육이 얼얼할 만큼 행복했다.

    린느는 섀르넌을 바라보며 웃었고, 섀르넌은 그런 린느를 보며 웃었다.

    ‘이러다 여주, 남주 바뀌는 거 아니야?’

    린느는 섀르넌의 손을 잡고 천천히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 잠깐 사이에도 린느와 눈이 마주친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치, 고장 난 인형들처럼 귀족들은 린느와 섀르넌을 빤히 바라봤다.

    영애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퉁퉁 붉히며 죄 없는 드레스 자락만 콱 쥐었다.

    “레이디, 그럼 남은 연회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섀르넌은 그대로 린느의 손을 놓고 인파들 사이로 사라졌다.

    린느는 그런 섀르넌의 뒷모습을 보며 입매만 뻥긋거렸다.

    ‘응? 이렇게 간다고? 연주자랑 대화하게 해 주는 거 아니었어? 아, 아니야. 춤췄으니까 됐어.’

    섀르넌과 맞잡았던 손에서 우디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와, 손 안 씻을 거야. 절대.’

    린느는 양손을 가슴께에 모아 뒤로 돌았다.

    그때, 여러 명의 남자가 린느에게 손을 뻗었다.

    “레이디, 저와 춤 한번 추시겠습니까?”

    “레이디, 저와도 추시지요.”

    여러 명의 남자가 서로 어깨를 부딪쳐 가며 린느에게 댄스 신청을 해 댔다.

    그러자, 린느는 보물 숨기듯 제 손을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피곤해서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함께 춰요!”

    린느는 할 말만 던지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 * *

    섀르넌은 엉망이 된 구두를 바라보며 실소를 뱉었다.

    아무리 춤 실력이 엉망이라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공작님, 새로운 구두를 가져올까요?”

    “응. 아무래도 이건 버려야겠어.”

    섀르넌은 구두를 벗으며 곁으로 툭 쳤다.

    사용인이 구두를 집으려던 찰나에, 섀르넌이 다급하게 입을 뗐다.

    “잠깐, 버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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