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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0화 (10/122)
  • @10화

    귀족들에게 억지로 웃어 주면서도 내내 밀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번들거리는 구두에 콕 찍힌 구두 자국이 거슬린 탓이었다.

    어디 이깟 구두 자국만 거슬릴까? 이 자국을 남긴 린느도 거슬렸다.

    치가 떨리고 화가 나야 하는데, 신경이 쓰였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각하!”

    반가움에 적당히 들뜬 목소리 끝에 묵직한 무게감.

    밀러는 느릿하게 몸을 틀어, 섀르넌 공작을 마주했다.

    누가 봐도 연회장에서 즐기다 온 모습이었다.

    “오랜만이군, 섀르넌 공.”

    인사와 함께 악수를 건네자, 섀르넌은 빤히 밀러의 손을 바라봤다.

    고급 가죽 장갑을 낀 손.

    섀르넌은 그의 악수를 받는 대신에, 가벼운 포옹을 했다.

    두껍고 묵직한 등을 두어 번 쓸어 토닥거리자, 밀러는 두드러기 난 사람처럼 어정쩡하게 포옹을 받았다.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무려 15년입니다, 15년이요. 한데 악수라니 저 서운해지려 합니다.”

    섀르넌 공작은 초승달처럼 눈매를 휘며 천진하게도 웃었다.

    밀러와는 영 딴판인 인상에 소년처럼 풋풋한 느낌마저 느껴지는 청년이었다.

    밀러는 입매를 얕게 올리며 섀르넌과 눈을 마주했다.

    “그대야말로 대단해. 15년간 악수를 건넸다면 한 번쯤 이 악수를 받아 줄 법도 한데.”

    밀러는 자신의 손을 보며 피식 웃었다.

    섀르넌은 웃음에 박한 밀러의 입매를 호선으로 만들 줄 아는 남자였다.

    섀르넌이 장난스레 헤헤 웃자, 밀러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후계를 이은 후로 처음 여는 연회가 아닌가? 한데, 연회장에 주최자가 부재하면 되겠나.”

    “아, 연회장에 있었는데…… 못 보셨나 봅니다!”

    섀르넌은 밀러의 걸음을 유연하게 연회장으로 돌렸다.

    밀러는 섀르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에도 웃음이 많은 공작이긴 하다만, 평소보다 더 헤실거리는 탓이었다.

    섀르넌 공작은 밀러의 시선에 나직이 탄성을 뱉으며 입을 뗐다.

    “미친놈처럼 웃는 게 이상하죠? 사실 연회장에서 재미있는 여인을 봐서요.”

    “재미? 공작이 여인을 보고 웃는 날도 있나? 그것도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웃긴 여인이라니.”

    밀러는 말끝에 헛웃음도 곁들였다.

    두 남자의 우아한 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에, 섀르넌은 밀러의 구두를 빤히 바라봤다.

    샹들리에 불빛에 번들거리는 구두 끝이 뭉개져 있던 탓이었다.

    그것도 누가 봐도 여인의 구두 자국이 아닌가!

    섀르넌 공작은 미간을 좁혀 밀러의 구두 끝을 보더니, 믿을 수 없단 듯 걸음을 뚝 멈췄다.

    “세상에….”

    갑작스러운 감탄사에 밀러의 시선이 섀르넌에게 꽂혔다.

    연회 준비하며 피로가 쌓였나?

    밀러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섀르넌 공작을 바라봤다.

    “왜 그러나?”

    밀러의 목소리에선 걱정마저 담겨 있었다.

    섀르넌은 세상 진중한 표정으로 밀러와 밀러의 구두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각하, 여인과 춤을 추셨습니까?”

    섀르넌의 목소리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울렸다.

    복도를 웅웅 울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밀러는 섀르넌의 물음에 돌연 표정을 굳혔다.

    걱정하던 안색은 온데간데없이 피곤함과 짜증을 실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에이, 증거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구두코가 그렇게 망가졌는걸요.”

    섀르넌은 해맑게 웃으며 밀러의 구두코를 가리켰다.

    밀러는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입매를 굳혔다.

    “모르면 말을 말게.”

    “아, 설마. 새로 시녀로 들이셨다던 영애의 작품입니까?”

    “아니래도.”

    “그럼…… 도대체 어떤 깜찍한 영애길래요?”

    연회장으로 내려오자마자 밀러의 금빛 눈동자가 한 여인을 빤히 응시했다.

    린느였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보다도 눈에 띄는 춤사위에 여유로운 표정까지.

    남의 구두를 콱 밟아 놓고, 저렇게까지 신나게 드레스를 흩날리고 있다니!

    밀러는 미간을 좁힌 채 어금니를 물었다.

    ‘도대체 세르트 경은 저 여자를 무얼 먹여 키웠길래 저렇게 자유분방할까.’

    밀러는 맹수처럼 진중한 얼굴로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섀르넌 역시 미간을 좁히며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무대를 장악하고 있는 탓에 린느의 얼굴까지 살피기는 무리였다.

    “설마… 저기 저 여인입니까? 저기 저, 무대에서 진귀한 춤을 추는 저 여인이요?”

    밀러는 대답도 하기 싫은지 고개만 끄덕였다.

    “세상에.”

    섀르넌 공작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천진한 미소와 퍽 어울리는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섀르넌은 한참을 웃은 후에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제가 봤다던 그 여인이 저 여인입니다. 하, 너무 매력 있지 않습니까?”

    “매력? 청포도 닮은 게 매력이라면, 매력이려나.”

    “예? 청포도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웬 청포도……?”

    밀러는 기다란 검지로 눈을 가리킬 뿐.

    섀르넌은 밀러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댔다.

    그러자, 밀러는 그 커다란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도 저었다.

    “기분 좋은 날에 쓸데없이, 저 여인에 대해선 그만 말하지.”

    “이런 게 바로! 연회장과 가장 어울리는 대화죠. 매력적인 여인에 대한 대화요.”

    “그대는 여전히 낭만적이군. 모든 걸 다 나눠도 아쉬울 게 없는 사이라지만, 난 그런 꼴사나운 짓에 관심 없다.”

    “사랑이 꼴사나운 거라니, 여전하시군요.”

    밀러는 나직이 코웃음을 치며 ‘사랑 놀음은 사치’라는 말도 내뱉었다. 섀르넌은 이미 적응된 듯이 말을 돌렸다.

    “아까 저 여인 홀로 5명의 영애를 상대하던걸요? 대단해요.”

    “하, 그래. 저 여인은 50명이 와도 이길 테지.”

    “50명이요? …그 정도면 황궁 기사가 돼도 괜찮겠네요.”

    “섀르넌, 진심으로 충고하건대 호기심에라도 저 영애에게 접근하지 마. 난 분명 말했다.”

    밀러는 진심을 담아 섀르넌에게 조언했지만, 섀르넌은 눈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두 남자는 말 없이 무대 위를 누비는 린느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던 밀러와 섀르넌은 각기 다른 표정을 담고 있었다.

    밀러는 린느를 향해 조소를 뱉었다.

    ‘저런 춤도 춤이랍시고 내 구두를 망쳤나? 춤도 청포도 떨어지듯 추네.’

    밀러는 린느의 팝핀 댄스를 보며 근본 없는 댄스라며 비아냥댔다.

    그때, 연회장을 울리던 음악의 장르와 색이 달라졌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이어졌고, 그 끝으로 린느는 입술을 쭈뼛거리며 무대에서 내려갔다.

    다음 곡은 느릿한 블루스였다.

    차분하고 고요한 노래로 바뀌자, 뒤늦게 밀러를 발견한 귀족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각하! 각하를 뵙습니다!”

    “도대체 얼마 만인지요! 각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호들갑 떨며 다가오는 귀족들을 보며 밀러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린느는 손부채질을 하는 동시에 샴페인 잔을 단번에 비웠다.

    진귀한 구경거리를 보듯, 린느에게 붙잡힌 사용인이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레, 레이디? 벌써 4잔째입니다만…….”

    린느는 술 빨리 마시기 대회에 참가한 사람처럼, 쟁반 위로 늘어선 샴페인 잔을 착실히 비웠다.

    다섯 잔, 여섯 잔, 일곱 잔.

    “너무 더워서. 어우.”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에 사람들 사이에서 춤까지 추려니 곤욕이었다.

    여덟 잔, 아홉 잔, 열 잔.

    쭉쭉 열 잔을 내리 마신 뒤에야 린느는 캬 하는 탄성과 함께 잔을 내려놨다.

    사용인은 쟁반 위로 늘어선 빈 잔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린느는 그런 사용인을 보며 찡긋 웃었다.

    그것도 잠시, 린느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자리를 옮겼다.

    ‘목도 축였으니 어디 잘생긴 영식 없나 한번 볼까?’

    린느는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린느의 청록색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이왕이면 밀러랑 딴판인 남자면 좋겠는데. 괜히 비슷한 남자면 내가 밀러를 못 잊어서 그렇네 어쩌네 하면 화날 거 같거든.’

    린느는 입술을 톡톡 건들며, 삼삼오오 모여 있는 영식들의 얼굴을 살폈다.

    ‘아, 뭔가 팍 땡기는 사람이 없는데.’

    린느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체리를 팝콘 먹듯 입에 머금으며 영식들의 얼굴을 살폈다.

    ‘저 남자는 전남친 닮아서 탈락.’

    입술이 체리에 붉게 물들어 가는 와중에도 말 한마디 건넬 남자 하나 고르지 못했다.

    그때, 린느와 밀러의 시선이 맞닿았다.

    두 사람 모두 못 볼 걸 본 사람들처럼 미간을 좁히며 학을 뗐다.

    ‘아이씨.’

    린느는 턱을 아래로 밀어 넣어 인상을 썼다.

    ‘아까보다 얼굴이 더 희게 질렸네. 어서 집에 가세요, 집돌이 씨.’

    잠깐.

    ‘그런데 미리안은 어디에다 두고 혼자 다녀?’

    오페라 극장 이후로 미리안을 본 적이 없다.

    ‘미리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자가 어떻게 혼자 다니는 거지?’

    원작에서 밀러는 미리안의 행복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남자였다.

    ‘그 이유는,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자신의 어머니와 미리안이 닮아서였지.’

    밀러의 어머니는 평생 남편 때문에 강박증과 불안증세를 앓았다.

    선대 대공은 밀러의 어머니의 아픔마저 이용하던 악질이었으니.

    그녀의 병은 갈수록 깊어졌고, 결국 참담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고 보면 밀러도 불쌍해. 불안증세 생긴 이유가 다 선대 대공놈 때문이니까.’

    밀러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어머니에게 병적인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제게 힘이 있었더라면,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지켰을 것이라며.

    그리고 그 죄책감이 그의 불안증세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리안도 없이 혼자 다니지? 설마 원작 파괴야?’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린느는 도리질을 하며 혀를 찼다.

    “레이디?”

    부드러운 목소리에 린느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밀러만큼이나 커다란 키였기에 고개를 쭉 빼고 바라봤다.

    “네?”

    “혼자 오셨습니까?”

    “아, 네.”

    린느는 뒤늦게 입매를 올려 웃었다.

    ‘미친, 대존잘. 대박.’

    백금발 머리칼에 연푸른 벽안이라니!

    소름 돋을 만큼 청량한 외모의 남자였다.

    그 청량한 남자가 순수하기 그지없는 눈웃음을 지으며 린느를 다정스레 바라봤다.

    “연회는 재미있게 즐기고 계신가요?”

    “그럼요! 저 오늘 설레서 잠도 못 잘 거 같아요.”

    “마음에 드신다니 퍽 다행입니다.”

    남자는 우아하게 잔을 기울여 입을 축였다.

    분명 같은 샴페인인데도 남자가 들이켜는 샴페인은 보석으로 만든 샴페인인 것처럼 우아했다.

    꿀꺽꿀꺽 샴페인을 삼키는 남자의 흰 울대를 보며 린느가 입맛을 다셨다.

    ‘뉘 집 자식이길래…. 어머님 아버님께서 무척 잘 키우셨구나.’

    린느는 양손을 고이 모아 가슴께에 얹어, 싱긋 웃었다.

    그러자 남자는 린느의 혼을 뺄 것처럼 더욱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린느는 드레스 자락을 단정하게 펼치며 묵례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전, 린느 뷔 세르트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아아. 세르트 영애였군요! 반갑습니다.”

    남자는 그 유려한 미소를 유지한 채 린느를 다정스레 바라봤다.

    ‘집착병 말기 환자’라는 소문을 아는 듯했지만, 남자의 미소는 변함없이 유려했다.

    ‘도망…… 안 가? 헐, 도망을 안 간다고? 헐!’

    가슴께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빙의된 이후로 밀러를 제외하고서 이렇게 멋진 남자를 마주한 것도 행운이지만.

    ‘세르트’라는 말에도 남자가 도망가지 않은 덕이었다.

    ‘손녀 이름은 꼭 내가 지어 줄 거야. 우리 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넣을까? 아니, 잠깐. 이름부터 물어봐야겠구나? 헤헤….’

    린느는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저어,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오……?”

    “아, 제 소개를 안 해드렸군요?”

    린느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남자의 붉은 입술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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