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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9화 (9/122)

@9화

“앞으로 다가오는 연회마다 참석하거라. 그래서 다른 영식들에게 관심이 있단 걸 널리 퍼트리란 소리다. 응?”

“아, 넵.”

대단한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구나.

“안 그래도 이번 주 연회에 참석하겠다 했어요. 때마침 대공 각하께서도 참석하시거든요.”

“그래! 그거야! 하하하! 20년 만에 마음에 드는구나!”

세르트 자작은 환히 웃으며 손뼉을 쳤다.

린느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스무 살인데 20년 만에 마음에 든다는 건 욕 아니야?’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세르트 자작은 돌연 낯을 달리하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이대로만 한다면 매달 의상실 마담을 데려올 테니, 너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거라!”

세상에, 의상실 마담을 데려온다고? 어머, 이건 해야 해!

“예! 저만 믿으세요, 아버지!”

린느는 미간과 눈에 힘을 주며 두 주먹을 허공에 흔들었고, 그걸 지켜보던 세르트 자작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쥐었다.

“린느…… 너만 믿는다. 진짜 믿는다!”

부녀의 처절한 파이팅이었다.

* * *

말은 그렇게 했는데…….

린느는 잘 차려입은 드레스를 살랑살랑 흔들며 연회장 외관을 바라봤다.

‘생각한 거보다 규모가 큰데…?’

하긴 제국에 하나뿐인 밀러 대공마저 참석하는 연회장이니 규모가 클 법도 하지.

린느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눈에 힘을 줬다.

‘할 수 있다!’

당찬 걸음을 떼며 연회장으로 유연히 들어서자 화려한 장식품들이 입구부터 즐비했다.

새벽에 스마트폰 화면 밝기에 눈뽕당한 거처럼 눈이 아릴 정도로 연회장 내부는 밝았으니. 어둑한 하늘마저 밝게 만들 만큼이었다.

‘어우, 눈 아파.’

린느는 눈을 얕게 뜬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높은 아치 아래 10명이 넘는 귀족들이 줄을 서 있었다. 린느가 줄을 서자, 그녀 뒤로 또 다른 귀족들이 초대장으로 보이는 카드를 들고서 줄을 섰다.

린느 역시 핸드백에서 초대장을 꺼내, 여유로운 척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화려한 곳인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배우고 올걸.

린느는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례를 기다렸다.

가드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콩닥대는 심장 소리가 더욱 커졌다.

‘으, 미치겠다.’

린느는 까치발로 연회장 내부를 조각조각 살폈다.

“어서 오시지요, 레오날드 경.”

가드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울리자, 린느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쿵쾅거렸다.

가드의 목소리가 가까워진 만큼 연회장 내부가 가까워지고 있단 뜻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결국 가드의 시선이 린느에게 닿았다. 그러자, 린느는 작은 탄식과 함께 서둘러 초대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드는 초대장과 린느를 번갈아 보더니, 뻣뻣하게 웃었다.

“어, 어서 오시지요, 세르트 영애.”

린느는 가드에게 눈인사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천천히 연회장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헐.”

으리으리한 연회장 입구는 시작일 뿐이었다.

연회장 중앙에는 쌍을 이룬 커플들이 서로의 손과 허리를 감싸 음악에 맞춰 움직이기 바빴다.

가장자리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과일과 디저트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테이블 근처로 옹기종기 모인 귀여운 커플들이 잔을 나누며 담소를 나눴으며, 분위기에 어울리는 달달한 음악 소리까지 완벽했다.

‘미쳤어. 여긴 천국이야. 대박.’

빙의되자마자 연회장부터 와 볼걸! 린느는 방방 떠들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눌렀다.

어서 영애들이 도착해서 연회장 바닥에 구멍 뚫릴 때까지 빙그르르 돌며 춤추고 싶은 생각뿐!

린느는 청록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레이디, 샴페인 하시겠습니까?”

린느는 우아하게 쟁반 위로 늘어선 샴페인 잔 하나를 집고서, 낮게 둥둥 울리는 콘트라베이스 리듬에 맞춰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클럽의 비트보다는 자극적이지 않지만, 낮지만 퉁퉁 울리는 콘트라베이스 소리는 꽤 섹시했다. 풍성한 드레스 안으로 화려한 구두가 열심히 움직였다.

‘미치겠다. 음악은 작가 취향인가?’

재지한 힙합처럼 끈적하면서도 세련된 음악이었다.

로판에서 나올 법한 음악이 아니었지만, 휘날리는 레이디들의 드레스와 퍽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그때, 색소폰이 고음에서 기교를 부리자, 린느는 샴페인을 쥐고서 여유로이 박자를 쪼갰다.

기교에 맞춰 딱딱 떨어지는 움직임에 색소폰을 불던 연주자가 린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펙이었다.

‘크흐, 아저씨 최고!’

린느의 스텝은 점점 대범해졌다.

주말마다 학원까지 다니며 배워 둔 춤 실력이 언뜻 비칠 때쯤.

뚝.

린느의 구두 굽 아래로 무언가가 콱 밟혔다.

“어머!”

린느는 다급히 발을 떼며 몸을 틀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열심히 사과해도 상대는 대답조차 없었다.

린느는 죄 없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느릿하게 흰 턱을 들었다.

뒷목이 뻐근해질 만큼 턱을 올린 후에야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우아함을 넘어 건방진 말간 얼굴에 심기 불편한 표정까지.

“대, 대공 각하…. 하하. 또 뵙…… 네요?”

“…….”

밀러는 어금니를 악문 채로 린느를 빤히 바라보더니, 꾹 밟힌 자신의 구두코를 빤히 바라봤다.

린느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시선을 따라 콱 밟힌 그의 구두를 바라봤다.

어찌나 세게 밟았는지 구두 앞코가 보기 좋게 찌그러져 있었다.

린느는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바로 어제 세르트 자작이 한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만약, 손끝이라도 스쳤다면 우리 가문은 멸문당했겠지.」

망할.

손끝이 스쳐서 멸문이라면, 발등을 콱 밟았을 땐 뭐 어떻게 된다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걸?

“죄송해요!”

밀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린느를 깔아봤다. 그래, 그간 조용하다 싶었지. 드뷔르 의상실에서, 오페라 극장에서 마주친 이후로 처음 마주한 거니 꽤 오랜만인 셈이다.

평소 그라면 린느가 눈에 띄지 않는 게 기쁘기까지 했겠지만, 오페라 극장에서 돌아온 그날 미리안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속이 조금 불편했다.

「약자를 깔아뭉개는 게 세르트 자작가의 특징인가?」

그가 뱉은 말이 내내 그를 불편하게 만든 탓이다. 그래, 그래서겠지. 이 청록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과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기분이 예전처럼 나쁘지 않은 이유 말이다. 밀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겁에 질린 린느를 바라봤다.

“세르트 영애.”

“예…?”

“홀로 춤을 출 거면 저쪽에서 추지.”

“네!”

린느는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단번에 비우더니, 지나가던 웨이터 쟁반에 능숙하게 올렸다.

그 꼴을 보며 밀러는 어이가 없단 듯 실소를 뱉었다.

“그, 그럼 재미있게 즐기세요!”

린느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서 도망치듯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밀러는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보며 뭐 저런 영애가 다 있냐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살다 살다 뒤로 목을 젖혀 샴페인 잔을 비우는 영애는 처음이군.’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랜 친구이자 사촌지간인 황태자조차도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원샷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뿐이랴? 희대의 술꾼이자 난봉꾼인 선대 대공마저도 위스키 잔을 저렇게 비운 적이 없단 말이다. 밀러는 멀찌감치 도망간 린느를 유유히 바라보며 실소를 뱉었다.

‘그럼 그렇지. 그대가 스토킹을 포기했을 리가 없지.’

밀러는 주최자인 공작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군말 없이 자리를 뜨자, 린느는 멀찌감치에서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과일을 입에 넣었다.

어찌나 노골적으로 째려보던지!

온몸에 한기가 들 지경이었다.

‘하긴, 구두가 망가질 정도였으니 화날 만해.’

하는 일마다 안 풀린다며 한숨을 내쉬면서도 달달한 딸기를 입에 넣어 오물거렸다.

그 사이 연회장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환하던 조명이 어둑해지더니, 블루스 느낌의 음악이 잔잔하게 울렸다.

아까는 힙한 느낌이라면, 지금은 누가 봐도 커플들의 시간이었다.

‘세상에, 로판인데 이런 게 있다고?’

작가 정말 배운 사람이잖아?

린느는 피식 웃으며 샴페인 잔을 아무렇지 않게 원샷 했다.

그때, 여러 명의 영애가 린느 근처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애들을 빤히 바라보더니 헤실헤실 웃으며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당연히 안녕하시죠.”

묘하게 까칠한 대답에 린느는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이런 영애들도 있었던가? 음…….’

린느는 웃으면서도 영애들의 머리칼 색과 눈동자 색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는 흔해도 너무 흔한걸….

린느는 반 포기한 상태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린느 님? 오늘은 린느 님 혼자 오셨어요?”

난데없이 불린 제 이름에 린느는 어깨를 슬쩍 떨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음, 당장은 그렇네요? 뭐, 조금 있으면 다른 영애들도 오겠죠?”

“그렇구나.”

영애들은 자연스레 린느의 주위를 에워싸며 실없이 웃었다.

‘왜들 이래?’

린느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영애들을 빤히 주시했다.

그때, 가장 삐딱하게 굴던 영애의 샴페인 잔이 반쯤 기울었다.

금방이라도 샴페인이 울컥 쏟아질 기세였다.

“잔 좀 똑바로…….”

린느가 반사적으로 몸을 휙 피했다.

그 탓에 곁에 서 있던 다른 영애의 드레스가 흠뻑 젖었다.

“어머!”

린느는 그 꼴을 보며 눈썹을 움찔거렸다.

‘뭐야, 설마 이거…… 실수인 척 드레스 망치는 그건가?’

로판에서 영애들끼리 기 싸움을 할 때마다 등장하던 장면이 아닌가!

‘무슨 전염병도 아니고 하나같이 손가락 힘이 없나? 못된 것들에겐 잔을 쥐여 주면 안 돼. 드레스나 망치니까.’

린느는 실소를 뱉으며 그 꼴을 비웃었다.

그러자, 영애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웃겨요?”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린느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린느는 입술을 톡 내밀며 중얼거렸다.

“아니, 뭐….”

“웃기냐구요!”

“안 웃길 건 없잖아요?”

“뭐, 뭐라고요?”

“실수는 그쪽이 했으면서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죠? 얼탱이가 없네. 저기요, 잔도 제대로 못 들 거면 이런 연회장엔 얼씬도 하지 말죠?”

영애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마, 말조심해요!”

“그러는 그쪽은 손 조심 좀 하세요. 그쪽이랑 같이 다니려면 여분 드레스를 챙겨 다녀야겠네요.”

영애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댔다.

린느는 영애들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보더니,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그럼 재미나게 놀다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린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남자가 잔을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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