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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8화 (8/122)
  • @8화

    그래, 기억상실이 좋겠어. 그간 봐온 빙의물을 토대로 뽑아낸 결과였다. 린느는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저기 있잖아?”

    “네, 아가씨.”

    또 무얼 시키려고 저런 진지한 표정일까, 하녀는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며 일단 미소 지었다.

    린느는 동그란 이마를 감싸 쥐며 한탄하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놀라지 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알았지?”

    하녀가 작전 회의를 마친 군인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린느는 보란 듯이 다친 아기 새처럼 어깨를 떨며 말했다.

    “나 기억이 안 나.”

    “…예? 기억이 안 나신다니요?”

    린느는 하녀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나직이 일렀다.

    “글쎄, 각하와 뭔가 엮인 게 있었던 거 같긴 한데 기억이 안 나.”

    “그럼, 대공저에 뒷마당에 텐트 치신 것도 미리안 님께 익명으로 행운의 편지 44장 보낸 것도 기억 안 나셔요?”

    행운의 편지도 보냈었어?

    선 넘었는걸……?

    린느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문드문 기억 안 나는 부분들이 많아. …아마도 사랑의 상처가 남긴 흉터가 아닐까?”

    찰나에, 하녀는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콧잔등을 찡긋했다.

    잠시 굳어 있던 하녀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래서 정말 각하께 관심을 놓으셨단 말씀이시죠?”

    “응! 당연하지!”

    하녀는 나직이 다행이라고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가지런히 무릎을 꿇어 린느를 올려다봤다.

    “아가씨, 이 사실은 당분간 우리 둘만 알고 있어요. 네?”

    “웅. 그러긴 할 거야. 그런데…….”

    린느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자, 하녀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린느를 바라봤다.

    뭐든, 물어보세요! 라는 듯한 응원도 담겨 있었다.

    린느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쪽 이름이 어떻게 되더라… 요?”

    어색한 분위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게, 빙의하자마자 이름부터 물어봤어야지!

    들뜬 마음에 이름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었다.

    ‘미치겠네, 이 어색함.’

    하녀는 린느의 속을 읽은 것처럼 방긋 웃으며 얌전하게 답했다.

    “메리예요.”

    “미안, 메리…….”

    “아가씨께서 제 이름을 궁금해해 주셔서 감사한걸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메리.”

    그간, 정신없는 통에 K-로판 빙의 제1 법칙을 잊고 있었다.

    빙의 후 처음 마주한 하녀가 곧, 심복이란 사실을 말이다.

    린느는 메리의 손을 다정스레 움켜쥐었다.

    “저 그래서 말인데, 혹시 말이야. 난 과거에 뭘 했니? 뭐 예를 들어, 검술을 배웠다거나…….”

    “검술은 손이 아파 못 하신다 하셔서…….”

    “그럼, 뭐 마… 법 같은 거?”

    메리는 눈을 얕게 뜨며 ‘뭔 법이요? 마, 마법이요?’라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한데, 마법은 동화책이나 소설에서나 나오는 거 아니에요?”

    망할 작가.

    씬만 쓰고 K-로판에서 마법을 빼?

    린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과거의 나는 도대체 무얼 했을까? 설마, 종일 대공님 뒤만 캔 건 아닐 거 아니야?”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가씨께서는 대공 각하를 흠모하는 것에만 집중하셔서…….”

    “설마 아카데미도 안 다녔어!?”

    “네….”

    뭐 이런 대책 없는 악녀가 다 있어?

    ‘세상에, 내 현생은 나름 책임감이 강한 삶이었구나. 린느 미쳤나 봐.’

    린느는 양손으로 입매를 가려 실소를 감췄다.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린느가 입을 뗐다.

    “나, 지금이라도 아카데미 입학할까?”

    “농담이시죠?”

    농담 아닌데. 린느는 뾰로통한 입술로 쫑긋대더니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이대로 대책 없이 살 순 없잖아.”

    메리는 철없는 손녀딸 보듯 린느의 등을 토닥였다.

    “대책이 없다니요? 아직 시간은 많아요, 아가씨.”

    “시간?”

    메리는 갈색 눈동자에 힘을 줘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께서 아가씨께 작위를 물려주실 텐데 무슨 걱정이 있으시다구요. 다만…… 그동안 아주 조금 깎인 신뢰를 회복하시면 좋겠죠?”

    “아주 조금 깎인 신뢰?”

    “예를 들자면, 일주일 만에 700 실버 이상 소비하신 거랄까요? 그리고 대공 각하의 심기를 건드신 거 정도…?”

    아주 조금 깎인 게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회복할 기회가 있는 게 어디인가!

    린느는 양손을 꼭 주먹 쥐며 밝게 웃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 잘 보이면 된단 소리지?”

    “네!”

    “오케이. 그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학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고, 폭군에게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딸이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건데 뭐가 어렵다구?

    ‘내가 또 6살부터 노인정을 휩쓸었지.’

    어릴 적부터 할머니 밑에서만 자란 덕에 요양원 방구석 K팝스타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재롱 피우는 것도 취미라면 취미였다.

    ‘게다가 자작 작위면 먹고 살 만하지? 이야, 탄탄대로가 따로 없네.’

    린느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린느는 얌전을 떨며 고상하게 답했다.

    “들어오세요.”

    퍽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문이 가볍게 열렸다.

    “저어, 아가씨? 주인님께서 찾으세요.”

    크흐, 이렇게 또 바로 기회가…….

    잠깐, 굳이 지금 찾는 이유가 뭐지?

    ‘설마 하녀장이 그새 무슨 말이라도 전했나?’

    린느는 앞니로 손톱을 뜯으며 세르트 자작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교무실로 끌려온 학생처럼 린느는 최대한 걸음을 늦춰 걸었다.

    빙의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두 번이나 집무실로 소환당하냐…….

    린느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린느더냐? 어서 들어오너라.”

    귀신같은 청력이네. 린느는 얌전히 문고리를 잡아틀며, 집무실 내부로 유연히 들어섰다.

    “부르셨다 하여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아버지.”

    바쁘게 움직이던 세르트 자작의 손가락과 눈이 멈칫했다.

    직접 듣고도 믿지 못하겠는지, 눈만 치켜 올려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뭐, 뭐라 했느냐?”

    “근래에 제가 아버지의 속을 쓰리게 한 듯하여, 반성하는 마음에 계획표를 작성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내팽개치고 한달음에 달려왔어요.”

    “…….”

    “…….”

    방금까지도 빨리 들어오라며 윽박지르던 그가 차분히 서류를 내려놓으며 린느를 빤히 바라봤다.

    이글이글하던 집무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차분해졌고, 세르트 자작은 테이블 위로 깍지낀 손을 다소곳이 올렸다.

    “어디 아프더냐?”

    “네? 아니요?”

    “하던 대로 하거라. 불편하게 원.”

    “제가 그간 너어무 오만방자했던 듯하여, 앞으론 조심하고자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라는 단어에 알레르기라도 있는 듯, 세르트 자작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세르트 자작은 동상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린느를 바라봤다.

    단전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며, 한숨 반 소리 반으로 말했다.

    “구두냐? 아니면 목걸이?”

    “예?”

    “드레스는 안 된다. 너무 비싸.”

    린느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

    “그럼? 말도 안 된다. 비싸.”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왜 자꾸 불편하게 말끝마다 아버지 아버지 붙여 가며 존댓말을 하느냐?”

    “예?”

    아버지한테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었어?

    거참, 동방예의지국의 예의를 모르네. 린느는 한탄하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저는 잊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너무 철이 없었어요.”

    “하… 무슨 말인진 알겠다만, 내게도 적응할 시간을 줘야지.”

    도대체 어떤 삶을 산 거냐, 원작 린느.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었길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렀다고, 아버지 입에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그녀는 가까운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럼 최대한 빨리 적응해 주세요.”

    세르트 자작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뗐다.

    “아무튼, 일단 그 문제는 그쯤 해 두고 널 부른 이유를 말하마.”

    “예, 아버지.”

    세르트 자작은 ‘아버지’에 흠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요즘은 대공저에 어슬렁거리지 않는다고?”

    “네! 절대요, 절대!”

    “그건 참 좋은 소식이긴 한데, 늦었다.”

    “……늦어요? 뭐가 늦었죠?”

    세르트 자작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네가 밤낮없이 대공저에 온갖 민폐를 다 끼치지 않았더냐? 그 탓에 혼처 알아보기가 하늘에서 별 따는 것보다 힘들어졌단 말이다.”

    하긴… 세상이 꼬리표 붙은 영애를 좋아할 리가 없지.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게 되긴? 어떻게든지 혼처를 알아내어 결혼해야지.”

    “어떻게든지요? 아니, 평생 같이 살 남자인데 그렇게 해도 돼요? 전 결혼 안 해도 좋은데.”

    “뭐? 결혼을 안 해? 그럼, 작위도 둘째에게 넘기마! 더불어, 내 재산도 몽땅 둘째에게 넘길 테니 그런 줄 알거라.”

    재산을 둘째에게 넘긴다고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린느가 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취소! 결혼 안 한단 소리 취소예요! 퉤퉤퉤.”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늙는다. 애초에 그런 소문만 엮이지 않았더라도 혼처야 넘치고도 찼을 텐데! 하…… 말을 말아야지.”

    “그런데 저 조오금 억울하네요…. 대공 각하의 손끝조차 스친 적 없는걸요?”

    “만약, 손끝이라도 스쳤다면 우리 가문은 멸문당했겠지.”

    “…….”

    “아무튼, 평범한 방법으로 혼처 찾기엔 물 건너갔으니 색다른 방법으로 하잔 말이다.”

    “색다른 방법이요?”

    세르트 자작은 기밀을 말하듯 말소리를 줄였다.

    “그 망할 소문들을 단번에 잠재울 방법은 이것뿐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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