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드뷔르 의상실: 600 실버
카렌 오페라 극장 입장: 20 실버
카렌 오페라 극장(에이슐라 샴페인) 2병: 90 실버
스타바슈 살롱: 5 실버]
“이거! 당장 설명해 봐라.”
“네? 아, 그게.”
“왜, 네가 봐도 말이 안 나오느냐? 일주일 만에 700 실버 이상을 쓰다니!”
하긴 일주일에 715 실버는 과하긴 했어.
‘하지만 원래 빙의물에선 하루에 몇천은 우습지도 않게 쓰던데.’
린느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세르트 자작이 미간을 팍 구겼다.
“지금 이걸 보고도 억울할 게 있느냐? 엉?”
“아니요?!”
“린느, 후계자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이렇게 하면 되겠느냐?”
“아니요….”
기계처럼 ‘아니요’를 반복하며 대리석 문양을 세었다.
“린느?”
“예?”
“이걸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잖느냐.”
“글쎄,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린느가 속 좋게 배시시 웃으며 되묻자 세르트 자작은 허탈한 듯 하! 참나! 허! 를 외치며 썩 나가라며 명령했다.
화난 사람 속 긁어 봐야 좋을 게 없으니, 린느는 발소리도 안 날 정도로 조용히 걸어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세르트 자작의 한탄 소리가 방 밖까지 울렸다.
“으이그, 저 철딱서니 없는 것! 어이구! 아버지!”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부모님 억장 무너지는 소리는 다 비슷하구나.
린느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자작저 로비로 도망쳤다.
‘대공저에서 온 편지인 줄 알았더니 영수증일 줄이야.’
카드 명세서 같은 건가?
하긴 어딜 드나들고 살 때마다 직접 돈을 낸 적은 없었구나.
‘귀족이란 신분 자체가 신용카드 같네. 역시 금수저야.’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한숨 돌리자, 하녀가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 당분간 저택에서 조용히 지내시는 게 어떠세요?”
지금 뭐라는 거지? 조용히 지내라고?
“나 이미 조용히 지내고 있는데?”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이다.
끽해 봐야 새로 오픈한 의상실 한 번, 오페라 극장 한 번.
고작 두 번인데 이보다 더 조용히 지내라고? 하녀는 린느의 반응에 어정쩡하게 웃었다.
“아! 저택으로 영애들을 초대할까? 그럼 외출하지 않아도 놀 수 있잖아?”
“주인님께서 머리끝까지 화나셨는걸요?”
불난 집에 기름 붓고 굿할 거 아니면 손님들 부르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스마트폰도 없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냔 말이다.
“그래, 자숙해야지.”
화난 세르트 자작이 외출 금지라도 내리면 큰일이지 않겠는가.
린느에게 외출 금지란 물고기에게 물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다가오는 연회는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니까.
‘원래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야. 망할 밀러 말고 더 잘생긴 엑스트라를 찾을 거라고!’
연회에서 괜찮은 영식과 스캔들을 만들어 대공의 스토커라는 소문부터 지워야 한다.
이렇게 예쁜데 주변에 이렇다 할 영식조차 없단 게 말이나 돼?
아무리 매력적인 영애라도 어떤 멀쩡한 영식이 대공의 스토커에게 마음을 갖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이번 연회는 여러모로 중요한 자리다.
‘이렇게 얌전히 지내다가 연회장만 다녀오자. 그럼 소문도 조금은 잠잠해지겠지.’
린느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폭 누웠다.
“방에서 한 걸음도 안 나갈 테니 아버지에게도 닿게 소문내 줄래? 티 나지 않게,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네!”
“그리고 먹을 만한 디저트들이랑 아메리카노도 부탁해. 뭐 재미있는 책 같은 것도 있으면 가져와 줘.”
“네, 아가씨!”
자숙 맞지? 먹고 노는 거 같은데.
하녀는 아랫입술을 꾹 물며 웃음을 참았다.
‘귀여운 구석이 있으셨네. 요즘 같기만 하면 정말 좋을 텐데.’
복도로 나온 하녀가 부엌으로 달려가자, 멀찌감치에서 하녀장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 * *
자숙 2일째. 저녁도 아니고 아침.
린느는 세르트 자작이 심어 둔 자작나무 가지를 원한 있는 사람처럼 바라봤다. 나뭇잎 떨어질 일 없는 나무이건만, 눈으로 나무를 벨 기세였다.
달칵.
홍차를 가져온 하녀가 린느의 청승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하루 못 나갔다고 마치 유폐 당한 황녀처럼 저러고 있을 게 뭐냔 말이다.
아니지, 시한부 선고받은 영애 느낌인가?
“아가씨.”
“……어, 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자, 하녀는 안타깝단 듯이 린느와 시선을 맞췄다.
“이러지 마시고 외출하세요. 솔직히 의상실에서 지출이 컸던 것뿐이지 그 외에는 문제없었잖아요?”
“그, 그렇지…!”
“그러니까, 다녀오세요. ‘가볍게’요.”
하녀는 ‘가볍게’라는 단어에 힘을 줘 말했지만 린느는 오로지 ‘외출’이란 단어만 되뇌었다.
그제야 생기 없던 린느의 낯에 생기가 돌았고, 하녀도 따라 옅게 웃었다.
“영애들에게 연락 좀 해 줄래? 드레스는 내가 고를게.”
린느는 생기 어린 눈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옷장으로 향했다.
착착착.
옷걸이 넘기는 소리와 들뜬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지자, 하녀는 나직이 ‘저렇게 좋으실까?’라며 잘게 도리질했다.
“음, 이건 너무 과해. 이건 쓰읍….”
두어 번 옷걸이를 꺼내 턱 밑에 대 보고, 드레스와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꺼내어 비교도 해 보고.
어울리는 립 색상도 꼼꼼히 따져 드롭형 목걸이를 할지, 초커형 목걸이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똑똑.
드레스 고르느라 옷장 속에서 헤매던 린느가 고개만 빼꼼히 내뺐다.
“누구지? 일단 들어와요.”
달칵.
부드럽게 문이 열리자, 포멀한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하녀장이 고개를 숙여 린느에게 인사했다. 인사하는 폼부터가 다른 게 누가 봐도 ‘하녀장’이라고 쓰여 있는 모양새였으니. 린느 역시 어정쩡한 자세로 하녀장의 인사를 받아 줬다.
“아가씨, 잠시 저 아이 좀 데려가도 괜찮으신지요.”
대뜸 사용인들을 데려간다니? 린느는 여태 자신을 보필하던 어린 하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하녀는 방긋 웃으며 되레 린느를 안심시켰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렇다면야……. 뭐, 그러세요.”
의외의 반응인지, 하녀장은 눈썹을 추켜 올리며 눈을 크게 뜨기까지 했다. 떠돌던 소문이 사실인가? 정말, 철부지 아가씨가 철이 들었을까? 하녀장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하녀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그 와중에도 품격 높은 인사도 잊지 않았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하녀장의 표정이 더욱 사납게 바뀌었다. 눈치 빠른 하녀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레리 부인,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가씨께서 모처럼 마음잡고 후계자로서 발판을 다지시는데, 네가 그렇게 가운데서 초를 치면 되니?”
“죄송해요.”
“죄송하다 해서 끝날 문제야? 오늘도 그래. 주인님의 노기도 풀리지 않았는데, 외출 준비나 도와드리고 있는 게 말이나 되냔 말이야. 멍청하긴!”
쾅.
‘멍청하긴’이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린느의 방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어찌나 세게 열렸는지 문손잡이가 벽에 부딪혀 튕겨 나가 하녀장의 두 다리가 크게 휘청였다. 그런 그녀를 린느가 퍽 진중한 낯으로 바라봤다.
“오해예요.”
하녀장은 가슴팍을 질끈 누르며 린느에게 물었다.
“예? 무, 무엇이 오해인지.”
“외출 준비하던 게 아니라고요. 그냥, 그냥 드레스 좀 입어 본 거거든요?”
린느는 마음이 미어지게 아팠다. 이별도 이렇게 아프진 않을 테지.
하지만, 철없는 자신 때문에 죄 없는 어린 하녀가 혼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하녀장이 하는 말이 죄다 틀린 말도 아니니, 이번 외출은 반납하는 게 맞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린느는 아랫입술을 꼬집듯 깨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진중하고도 슬퍼 보였는지 하녀장 역시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네, 네 그럼요! 제가 오해를 했네요. 조심하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과거 그 철부지 아가씨일 리가 없지! 그래, 이 상황에 외출을 할 리가 없지! 하녀장은 눈치 없이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연신 사과했다. 그러자, 린느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오해할 수도 있죠, 뭐. 그럼 이만 사과해 줄래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아니, 저한테 말고.”
바닥에 어깨를 떨어트린 채로 잠자코 있던 하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어린 하녀가 놀라서 하녀장과 린느를 번갈아 봤다.
하녀장 역시 미간을 좁히고 눈에 힘을 실어 린느와 어린 하녀를 번갈아 봤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눈을 의심했지만, 저 어린 하녀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강경한 요구와 마주해야만 했다.
“완벽한 레리 부인의 성에 차진 않겠지만, 예뻐해 주세요. 아시다시피 제 성격이 좀 까다롭나요? 그 꼴을 이 애가 다 보고 있으니 조금만 상냥하게 대해 주시면 더 잘할 거예요! 그렇지?”
“네? 네네! 레리 부인께선 늘 제게 잘해 주시니 걱정 마세요, 아가씨.”
“하지만 사과받을 건 받아야 하는 거야. 그렇죠, 부인?”
그새 하녀장의 이름까지 알아내어 너스레 떨자, 하녀장은 고개만 느릿느릿 끄덕였다. 사과라니?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하녀에게 사과라니! 하지만, 린느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다. 하녀장은 최대한 태연한 척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오해를 했어. 미안해.”
독약을 마신 사람처럼 와락 사과하자, 린느가 환하게 웃었다.
“부인 고마워요! 덕분에 제 마음도 편해졌어요.”
린느는 다정하게 하녀장의 손을 꼭 잡아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하녀장도 그만 그녀의 웃음에 옮아 따라 웃었다.
* * *
린느는 다시 자숙상태로 돌입했다. 하지만 좀 전과는 다르게 차분하게 가라앉았으며 고요하기까지 했다.
린느가 잘못한 일에도 이 어린 하녀가 그녀 대신에 혼이 난다니. 부조리도 이런 부조리가 있을까?
‘여태 그냥 소설이라고만 생각했어. 이 사람들은 이곳이 인생인데.’
지금보다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 린느 자신을 위해서라도. 만약 이대로 여기에서 살게 될 수도 있으니 대비해야겠지.
‘그래, 이제 무작정 먹고 놀고 쓰기만 하지 말고 계획이란 것도 세우자.’
린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로 향해, 흰 종이를 빤히 바라봤다.
‘뭐부터 하지?’
린느는 종이를 째려보며 펜 끝부분을 톡톡 이마에 두드렸다.
일단은 세르트 자작저의 재산을 정당한 방법으로 물려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세르트 자작의 신경을 그만 건들고, 될 수 있으면 말 잘 듣는 후계자가 되어야겠지?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이 세계 사람들은 20살에 뭘 하지?
린느의 가지런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있잖아?”
“네, 말씀만 하세요!”
“내 또래의 영애들은 대부분 뭘 하고 지내더라?”
“…네?”
하녀는 바보처럼 눈과 입을 크게 뜬 채로 멈췄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계획적으로 살고 싶거든? 내가 뭘 하면 좋을까? 뭐를 좀 배울까? 아니면…….”
“아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의 대답에 린느는 다시 흰 종이를 노려봤다. 생각을 해 보자고.
‘일단 원작에서 언급된 것들이 뭐가 있었더라.’
가물가물했다. 아니, 기억이 안 날 수밖에!
초입부터 끝까지 미리안과 밀러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만 가득했는데 마법이 있었는지 어떻게 기억하냐고.
‘잠깐, 나 귀족이잖아? K-로판 귀족들은 아카데미도 다니고, 마법도 미리 배우고 그러지 않나?’
그럼, 원작 린느도 뭔가 배우지 않았을까?
알고 보니 마법 천재 자작가 영애라거나, 소드 마스터가 된 악녀라거나 이런 거면 진짜 좋을 텐데! 저 어린 하녀에게 원작 린느의 스펙을 물어봐야겠어.
‘원작 린느, 나 진짜 너 믿는다?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