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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6화 (6/122)

@6화

미리안의 목소리가 원래 이렇게 컸던가?

미리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질색을 하며 고개까지 마구 내저었다.

“가, 각하께서 뭐가 부족하시다고 저 같은 사람하고…….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미리안의 희게 질린 얼굴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지만, 원작에선 이미 둘이 처음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분명히, 아주 소설 초입부터 뜨거운 사이였는데?

“에이, 무슨요. 각하께서 영애께 마음이 있으니 대공저로 부르셨겠죠. 네? 게다가, 이렇게 데이트도 하시구.”

어차피 원작을 크게 벗어나진 못할 게 아닌가?

린느는 미리안을 다독여 주고 어서 자리로 돌아가려 말을 꺼냈지만, 미리안은 단호하게 딱 잘랐다.

“전, 각하의 시녀일 뿐이에요. 절대, 그분과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에요.”

“네? 아니, 무슨…….”

“절대, 절대, 절대 그런 사이 아니에요……!”

린느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어떤 귀족이 시녀에게 저런 비싼 핸드백을 사 준답니까? 게다가, 오늘도 오페라 극장에 함께 참석하셨잖아요?”

“…저도 모르겠어요. 각하께서 제게 왜 그러시는지…….”

아니, 그게 연애라고!

하, 그래.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야 고구마 여주지.

숟가락에 밥과 밥도둑을 얹어 입에 넣어 줘도, 미리안은 씹지 않을 여자였다.

미리안은 그 와중에도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물을 스윽 닦아 냈다.

“그럼 미리안 님은 여태 여기에서 왜 우신 거예요?”

“저희 오라버니 소식이 너무 궁금해서……. 큽…….”

아….

그냥 향수병이었어?

린느는 헛웃음을 삼키며, 미리안의 등을 토닥였다.

“각하께 여쭤보세요. 서신이라도 나눌 수 있게 해 달라 말이에요.”

린느는 흐트러진 미리안의 머리칼을 다정스레 귀 뒤로 넘겨 줬다.

그리고, 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파우더룸 문이 활짝 열렸다.

닫혀 있던 파우더룸 문이 활짝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내부를 차게 식혔다.

놀란 린느와 미리안이 동시에 룸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문밖에는 그 두 사람보다 눈이 3배 정도 더 크게 뜨인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아가씨! 괘, 괜찮으셔요?”

중년의 하녀가 파우더룸으로 냉큼 뛰어 들어와 미리안의 상태를 살폈다.

이제야 눈물이 막 그치려던 찰나였는데, 미리안은 다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래. 서러운 거 다 털어내면 좋지, 좋아. 그런데 분위기가 좀 험악한데?

마치, 착한 영애 괴롭히다가 걸린 분위기랄까……?

린느의 눈치 빠른 손이 이미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뭔진 몰라도 일단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절대 아니라니까?

린느는 고개도 잘게 흔들며, 죽일 듯이 노려보는 금안을 마주했다.

“아, 아니 왜 그렇게 보시는 거죠? 설마 진짜 오해하신 거 아니죠? 하! 아니, 아니 진짜 정말 오해하신 거 아니죠? 네?”

미리안은 하녀 품에서 히끅 히끅 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린느는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밀러는 큰오빠가 막내 여동생을 챙기듯이 말없이 어깨에 둘린 코트를 벗어, 어깨에 둘러 줬다.

그리고, 그 다정한 눈이 돌연 낯을 달리하며 린느를 깔아 봤다.

지극히 사나운 눈이었다.

“약자를 깔아뭉개는 게 세르트 자작가의 특징인가?”

쫑알대던 린느의 입매가 일순 굳었다.

그래, 오해하고도 남을 짓인 거 아는데.

그래도 가족 건드는 건 선 세게 넘은 거 알지?

린느는 한쪽 눈썹을 추어올리며 실소를 뱉었다.

“앞뒤 상황 들어보지도 않으셨잖아요?”

“들을 필요도 없다. 내 눈앞에서 일어났거늘, 무슨 변명이 필요할까.”

“아뇨, 대공 각하께선 보지 못하셨어요.”

밀러의 짙은 눈썹이 멈칫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패악을 부리며 대공저를 쑤시고 다니던 여자가 아닌가?

사탕 뺏긴 아이처럼 떼만 쓸 줄 아는 여인인 줄 알았건만.

지금의 린느의 눈빛에서는 패악이라곤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서늘할 정도로 침착한 태도만이 존재했다.

밀러는 어금니를 깨물며, 린느의 청록색 눈동자를 진득하게 들여다봤다.

‘일주일 전보다 훨씬 더 못돼졌군.’

과거의 린느는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몰아치는 여인이었다면, 지금의 린느는 침착한 악녀와 같았다.

밀러는 린느에게서 시선을 떼며 조소를 뱉었다.

“세르트 경의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그만하는 게 서로 좋을 터.”

밀러는 그 말만 남겨 두고 자리를 떠났다.

‘이런 걸 두고 갑질이라 한다지?’

린느는 어금니를 꽉 물며, 그의 뒤통수에 중지를 슬금슬금 올렸다.

손가락을 거의 다 폈을 때쯤, 밀러가 걸음을 멈추고 휙 뒤돌아봤다.

“헙.”

“마차 준비하라.”

린느는 어깨를 들썩이며 중지로 볼을 긁적였다.

그러자 밀러는 그런 린느를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그 잘난 콧대를 높이 치켜들어 린느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스쳐 지나간 곳에선 쌉싸름한 시가 향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에 린느만 남겨 두고 미리안과 밀러는 대공저로 돌아갔다.

마치, 린느가 더러운 오물인 것처럼 두 사람은 피신하듯 자리를 떠났다.

‘물론, 미리안이 일부러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아니겠지….’

린느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봐서 미리안이 약자라는 거야. 내가 약자구만.’

린느는 터덜터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한두 번은 우연으로 마주칠 수 있지. 앞으로 안 마주치도록 더 노력하면 되니까.

린느는 찝찝한 기분을 애써 뒤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페라가 끝난 후였다.

‘짜증 나.’

망할 주인공들 진짜 짜증 난다.

“아가씨, 도대체 어디 갔다가 다 끝나고 오신 거예요?”

“파우더룸에…….”

“네에? 파우더룸에서 왜 이렇게 오래…….”

“미리안이 울고 있길래 위로해 줬어.”

순간, 하녀의 얼굴이 팍 굳었다.

“미, 미리안 님이요? 각하께서 들이신 그 시녀요?”

“응. 그냥 못 본 척하려 했는데 어지간히 울어야지.”

“…….”

하녀의 갈색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마구 뒤흔들렸다.

마른침을 몇 번이나 꼴깍 삼키며,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오페라가 끝난 직후, 귀족들의 구두 소리와 웃음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렸다.

“표정이 왜 그래? 왜?”

“그…… 미리안 님‘을’ 울리신 게 아니라 미리안 님‘이’ 혼자 우신 거죠?”

“아, 진짜. 너까지 왜 그래…. 나 그렇게 못된 사람 아니…….”

생각해 보니 린느도 악역이지 않았나?

물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악역이긴 하지만.

아무튼, 미리안을 괴롭히고 밀러를 스토킹한 집착광이었으니 악녀는 악녀였다.

린느는 헛기침을 하며 괜스레 샴페인 잔을 만지작댔다.

“아니, 그런 거 안 한다고 했잖아. 각하께 마음 없어. 진짜야.”

“네……. 그렇죠.”

하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테이블을 가볍게 정리했다.

누가 봐도 안 믿는 눈치였다.

하긴, 가는 곳마다 밀러와 부딪치고 있으니 못 믿을 만도 하지.

‘일단, 내가 밀러에게 관심이 없단 걸 사람들에게 널리 퍼트려야겠어. 연애는 연애로 잊는다 이거야.’

연회, 연회장에 참석하여 다른 영식과 놀면 되지!

린느는 다시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 *

오페라 극장에 다녀온 저녁.

대수롭지 않은 척, 쾌녀인 척 영애들과 수다도 잘 떨었지만.

저택에 도착하고 방에 홀로 남자 불안이 치솟았다.

그리고, 린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밀러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대든 게 뒤늦게 거슬렸다.

‘하씨, 좀만 참을걸. 진상 손님 대할 땐 잘만 참았으면서, 왜 그걸 못 참았냐. 하, 그러게 왜 부모님을 건드려 가지고!’

린느는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세르트 경의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그만하는 게 서로 좋을 테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와 폭력성이 깃든 협박이 거슬렸다.

이러다가, 원작처럼 흘러갈까 두렵기까지 했다.

자고 일어나면 속 편한 역할로 다시 빙의하면 좋겠다.

“하아…….”

아침 해가 뜨고 우체부도 다녀갔으나, 반전은 없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 퀭한 눈으로 한숨부터 내쉬고 있는데, 하녀가 급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린느의 작은 심장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왜, 왜 찾을까?

하필 이 타이밍에 왜…?

빙의된 이후로 세르트 자작을 직접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뭐가 그렇게 바쁘신지 저택에 붙어 있는 꼴을 보지 못한 탓이었다.

자작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린느도 현생에선 쏘다니며 놀기 좋아하긴 했다만, 세르트 자작 부부는 노는 데에 사활을 건 사람들처럼 굴었다.

그런데, 그 바쁜 세르트 자작이 찾는다고?

린느의 청록색 눈동자가 마구 뒤흔들렸고, 가슴팍에 둘린 레이스가 함께 두근거렸다.

“저어, 아가씨? 안색이 너무 안 좋으셔요. 괜찮으세요?”

“……어. 괘, 괜찮아.”

발 빠른 밀러가 세르트 자작에게 협박 편지라도 보낸 게 아닐까?

미리안이 끝내 오해를 풀어 주지 않았나?

어쩌지? 어쩌지?

온갖 불안이 뒤엉켜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불안에 떨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착실히 걸음을 옮겼다.

하녀가 집무실 문 앞에 멈춰 섰다.

“아가씨,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녀오셔요.”

하, 네가 부럽다. 라는 말을 삼키며 린느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경쾌한 노크 뒤로 험상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

하, 이 목소리가 세르트 자작의 목소리구나.

린느는 천천히 문고리를 열어젖히며 들어섰다.

흑갈색 원목으로 톤을 맞춘 인테리어 탓에 엄중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린느는 문을 천천히 닫으며 의자에 천천히 다가갔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질 때쯤.

세르트 자작이 미간을 구긴 채 책상을 쿵 하며 내려쳤다.

마음의 준비 따위 할 틈도 없었다.

“린느,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쏘다니는 게냐! 정신이 있긴 하느냐?!”

세르트 자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 테이블에 덩그러니 펼쳐진 편지를 린느에게 던졌다.

“네 눈으로 네가 봐!”

린느는 벙찐 얼굴로 던져진 편지를 주섬주섬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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