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자유롭던 분위기가 밀러의 등장으로 차게 식었다.
린느와 함께 온 영애들부터, 오페라 극장 앞에 줄 서 있던 귀족들도 밀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망할 신분 사회!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특별히 신경 써서 무성의하게 인사했다.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린느는 용수철처럼 곧장 고개를 들었다.
‘왜 저렇게 쏘다닌담? 둘이 대공저에서 연애 안 해? 한참 그 머시기 그거 어? 그거 할 때 아니야?’
거참 이상하네.
원작에서는 밀러도 미리안도 대공저 밖으로 나올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 무덤 같은 대공저에서 둘이 그렇고 그런 일만 해야 하는데!
둘 사이가 어색하기 그지없긴 하다만, 멀찍이서 보면 나름 평범한 커플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직 미리안 가문이 멸문당하기 전이라 그런가?’
미리안과 밀러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계기는 밀러가 미리안의 가문을 멸문한 후였다.
미리안은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학대받으며 자란 영애였고 그런 그녀를 유일하게 돌봐 준 건, 그녀의 오라비였다.
밀러는 미리안의 복수라는 핑계로 미리안의 오라비까지 모조리 죽였다. 집착광다운 짓이었지.
그 이후로, 미리안과 밀러는 걷잡을 수 없이 틀어졌다.
‘하…… 그래, 그때부터 고구마밭이었어.’
밀러는 그런 미리안에게 더 집착했고, 그러자 미리안은 대공저 꼭대기 층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3개월 후, 미리안은 밀러에게 고백했다.
「미안해요, 밀러. 나, 아이를 가졌어.」
그래서 밀러의 아이냐고? 아니.
대공저 창틀 닦는 하인의 아이였다.
‘다시 생각해도 피가 거꾸로 솟네.’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었다.
세상에 여주가 남조 아이도 아니고, 무슨 엑스트라의 아이를 갖냐고!
심지어 아이의 아버지인 창틀 닦는 하인은 외모 묘사와 이름도 없었다.
게다가, 미리안은 그 하인과 함께 살겠다며 도망가다가 밀러를 죽이고.
미리안은 도망가다가 유산하고, 미리안도 죽는다.
하인도 죽고. 다 죽여라, 아주!
[ 젤리머겅 : 와, 이걸 이렇게 끝낸다고요? 작가님? 작가 양반! 야이 작가 새끼야!]
[ 새드엔딩껒여 : 작가님? 작가님, 우리 싫죠? 그렇죠? 다음부턴 작가님 글 절대 안 볼 겁니다. 절대.]
[ 설정오류발작버튼 : 작가님, 설정 오류인 거 같습니다. 애초에 학대받던 미리안을 구해 준 건, 밀러가 아닌가요? 물론, 미리안의 오라비가 미리안을 챙겨 주긴 했지만. 미리안이 너무 밀러를 밀어내기만 하니 보기가 껄끄럽습니다. 게다가, 임신한 아이가 하인의 아이라니요? 그 하인은 이름도 없는 엑스트라인데, 갑자기 미리안이 하인의 아이를 갖다니요? 충분한 설명도 없이 너무 고구마만 추구하시네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고구마죠?]
완결까지 본 그날 밤, 하린이도 그들의 댓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래, 밀러가 집착에 돌은 자이긴 하다만, 미리안도 정상은 아니었…….
아, 작가 탓이구나!
린느는 저도 모르게 측은한 눈으로 밀러를 바라봤다.
그리자, 밀러는 가소롭단 듯 린느를 거만하게 깔아 봤다.
밀러는 밤하늘과 퍽 어울리는 남자였다. 더불어, 잔악하게도 잘생겼다.
짙은 흑발 위로 달빛이 비쳐, 마치 흑표범처럼 우아하면서도 특유의 퇴폐미가 매력이었다.
거기에 쨍한 금안이 그의 금욕적인 인상을 더욱 짙게 했다.
우아하게 뻗은 콧대며, 황궁 기둥보다 넓고 커다란 키와 어깨며!
생긴 거로만 봐도, 아 저 남자가 남주구나 싶을 정도로 잘생겼단 말이다.
‘그래, 딱 잘생긴 남주로 미리안이랑 꽁냥꽁냥 잘 사세요. 내 빙의 생활 방해 말고.’
린느는 뻣뻣하게 묵례했다.
“그럼 이만.”
린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애들의 팔뚝을 끌며 오페라 극장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가장 놀란 건 영애들도 미리안도 밀러의 보좌관도 아니었다.
“하?”
밀러 본인이었다.
그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까운 듯 시선을 휙 피했다.
가는 곳마다 린느가 설치는 것도 짜증 나는데, 마주칠 때마다 린느는 되레 자신을 짜증스레 여겼다.
저 자그마한 스토커가 작전을 바꾼 걸까?
목숨 걸고 집착하던 여자가 되레 자신을 거슬려 하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의 잇새로 실소가 흘렀다.
‘이렇게 하면 관심이라도 줄 줄 아나? 노력은 퍽 가상하군.’
밀러는 그 널찍한 가슴팍을 활짝 펼치며, 멀찌감치 달아난 린느를 느긋하게 내려다봤다.
등대가 어두운 밤바다에서 헤매는 배를 비추듯, 우뚝 솟은 밀러가 린느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선 미리안이 검은 핸드백을 보물처럼 꼭 쥔 채, 까치발을 들며 린느를 바라봤다.
‘린느 님…. 이름이 린느구나.’
학기 초,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소녀의 낯이었다.
* * *
오페라 극장 직원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오르자, 조금 산다는 귀족들이 자리를 차지해 요염을 떨었다.
부인들은 비싼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고, 남자들은 시가를 피우며 와인을 따랐다.
‘대박, 너무 신기해……! 그래, 이거잖아! 내가 맛보고 싶었던 거, 이거!’
청록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리를 살폈다.
“레이디, 세르트 자작 가문의 이름으로 구매된 박스석입니다.”
직원이 두 손을 공손하게 가리킨 자리는 다른 귀족들과 같은 고급 박스석이었다
물론, 황족이나 대공, 공작급의 고위 귀족들은 이보다 더 대단한 박스석이겠지만.
‘이게 어디냐고!’
린느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비싼 의자는 쿠션감도 미쳤구나……? 와, 있을 건 다 있는 K-로판 최고.’
린느는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오페라 글라스를 요리조리 뜯어 살폈다.
집으로 가져가고 싶단 생각이 들 만큼 화려한 글라스에 시선을 뺏겼다.
그대로 오페라 글라스를 눈가에 가져다 대곤 배우 얼굴을 낱낱이 뜯어 살폈다.
다들 잘생기긴 했는데, 왜 이렇게 비슷하게 생겼지?
‘…작가가 남주한테 외모 몰빵했네.’
린느는 입맛을 다시며 글라스를 내려놨고, 동시에 오페라가 시작됐다.
* * *
3시간 후.
린느는 한숨을 들이쉬면서 샴페인을 홀짝 머금었다.
“아가씨,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파우더룸 좀 다녀올게.”
3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이렇게 한 자리에 쭉 앉아 있는 게 오페라 극장 나들이였어? 고문이나 다름이 없는걸?
아니지, 아까 밀러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흥미롭고도 재미있었던 거 같기도?
‘이게 다 그 집착에 미친 밀러 때문이야.’
분위기 다 망쳐 놓고서, 이 오페라 극장에서 가장 비싼 자리에 앉아 미리안과 연애하고 있겠지.
세상에, 재수 없어라.
린느는 구두 굽을 또각거리며 당차게도 파우더룸을 향했다.
신전처럼 우아한 외관에 잔잔하게 울리는 오페라 가수의 노랫소리.
거기에 고요한 바람이 세련된 극장 안으로 불었다.
그때마다 거대한 샹들리에에 달린 크리스탈이 도르륵 부딪혀 기분 좋은 소리가 울렸다.
린느는 그 분위기에 취해 울적했던 마음을 조금 풀었다.
‘그래, 오늘만 날도 아닌데, 뭐.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 오늘은 저런 날이라 해 두자고.’
린느는 싱긋 웃으며, 파우더룸 문을 활짝 열었다.
덜컥. 선선한 바람이 파우더룸 입구에서 울고 있는 여자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여자는 인기척도 못 느끼고 흐느끼며 울기 바빴다.
오늘 애인과 극장에서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바람이라도 맞았나?
아니면, 가장 친한 친구랑 애인이 데이트하는 걸 봤나?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여기까지 와서 울고 있지?
린느는 방금까지 당차게 걷던 걸음을 살금살금 옮겨, 파우더룸 가장 구석진 곳에서 단장했다.
입가에 립스틱을 펴 바르고, 풀어진 머리칼은 있는지 확인하고.
“흑. 흐윽…….”
드레스에 뭐가 묻진 않았는지, 목걸이 펜던트는 목 뒤로 넘어가지 않았는지도 확인했다.
“흐윽…. 오라버니.”
망할.
린느는 익숙한 목소리에 우는 여자를 힐끔거렸고.
예상대로, 우는 여자는 미리안이었다.
울려면 구석에서나 울지 입구에서 울고 있냔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위로해 주고 싶지만, 까딱 잘못하면 잘못 엮이기에 십상이고.
애초에 우는 여자가 미리안이란 걸 알았더라면, 파우더룸 문을 고이 닫고 다시 자리로 갔을 테지.
린느는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숨죽여 숨을 내쉬었다.
‘이 꼴을 밀러에게 들켰다가는 뭐 되기 딱 좋은데?’
그 삭막하기 그지없는 낯짝으로 린느가 미리안을 울렸다며 따질지도 모른다.
린느는 뒷골이 서늘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
“흑흐윽…!”
그 잠깐 사이에 미리안은 몸을 입구 쪽으로 돌려 본격적으로 엉엉 울었다.
이거…… 이 정도면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위로해 달라고 몸부림치는 거 아니냐고!
린느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린느는 어쩔 수 없이 곁에 있던 티슈를 뽑아 미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만 울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리안은 화들짝 놀라며 린느를 올려다봤다.
“리, 린느 님?”
세상에, 이름은 또 언제 알아낸 거야.
린느는 미세하게 어깨를 들썩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치미를 뗐다.
미리안은 티슈로 눈가를 닦아 냈고, 그녀의 눈가는 붉어진 채로 탱탱 부어 있었다.
“각하께서 걱정하실지도 몰라요. 돌아가세요.”
미리안의 눈매가 다시 일그러졌다.
아이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서 다시 우는 것처럼.
아니, 왜 더 우는 거람?
린느는 다급히 미리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만하면 충분히 울었어요. 더 울면 머리가 아플 테니, 그만 우세요.”
우는 친구 달래 주는 거는 또 이골이 났지.
린느는 능숙하게 미리안의 눈가를 닦아 줬다.
히끅대는 소리가 잦아들 때쯤, 미리안이 호소하듯 입을 뗐다.
“저 정말…… 못 참겠어요, 더는….”
“아이고. 원래 그놈, 이 아니라, 그 남자가 다 그 남자고 그래요. 원래 연애가 그렇죠. 안 그래요?”
미리안은 훌쩍이며 린느의 눈을 쳐다봤다.
린느는 다정스레 눈매를 휘며 웃었다.
마치 큰언니가 막둥이를 달래듯, 인자하기까지 했다.
“간혹 저런 걸 남친이라 했나 싶기도 하다가, 또 사소한 거에 풀리고. 싸울 땐 뒤통수 두어 대 때리고 싶다가 좋을 땐 이뻐 죽고. 연애는 다 그래요.”
“……연애요? 무슨….
“게다가 원래 결혼 전에 자주 싸운다잖아요? 그런 거라 생각…….”
미리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크게 뜨이더니, 경악한 듯 입매가 벌어졌다.
“겨, 결혼이라뇨? 결혼!? 누가요? 누가 누구랑 결혼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