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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화 (4/122)
  • @4화

    “세르트 영애 맞으시죠? 저 알렉스입니다! 우리 구면이지 않습니까? 하하……. 신기하게도 오늘은 대공저가 아니라 의상실에서 뵙네요.”

    원작 린느는 집착에 진심이었다.

    대공저 근처에서 칼로리 높은 디저트 3일 치를 들쳐메고 3일 내내 대공만 기다리는 그녀였으니까.

    그리고 그때마다 린느를 설득하여 저택으로 돌려보낸 건, 밀러의 보좌관인 알렉스 애커먼 경이었다.

    오늘은 대공 각하께서 심기가 별로이시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라 설득하면, 원작 린느는 목에 핏대를 세워 ‘그 심기는 도대체 언제쯤 좋아지신답니까!’ 까랑까랑하게 받아치기도 했다.

    보좌관도 참… 고생 많은 조연이었다.

    보좌관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 그러니까 그게…… 하하.”

    “알렉스 님 죄송해요. 전 이 드레스를 꼭 사야 해요. 이거 말고는 입을 게 없다구요.”

    “아이구, 그렇죠! 그럼요! 그런데, 그…… 세르트 영애께서 저와의 추억을 생각해서라도 드레스값의 2배를 드릴 테니…….”

    “미안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추억 쌓을 일도 없을 테니 이 드레스는 탐내지 말아 주실래요?”

    말미에 보좌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앞으로는 그런 추억 쌓을 일도 없을 거라니? 보좌관의 입꼬리가 묘하게 움찔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울상을 지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드레스는 드레스고, 집착은 집착이니까.

    “정말로 안 되겠습니까? 세르트 영애? 저… 대공 각하의 성정을 아시지 않습니까.”

    뭐야, 밀러가 성격 더러운 거랑 드레스랑 무슨 상관이람?

    린느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앞으로 대공저 근처엔 얼씬도 안 할 테니까, 드레스는 포기하세요. 이 드레스는 누가 봐도 저한테 더 잘 어울려요.”

    먼저 구입한 드레스 가지고 대공 쪽이 원하는 조건까지 걸어 주다니 천사가 따로 없다.

    하지만 밀러 눈에는 린느가 질투에 휩싸여 미리안의 드레스나 뺏는 악녀로만 보이겠지.

    “그럼 3배 어떠십니까?”

    “싫어요.”

    “그럼 4배를…….”

    “그러면 그럴수록 더 사고 싶어져요. 본능 같은 거죠.”

    보좌관은 죽을상으로 밀러를 바라봤다.

    밀러는 언짢은 표정으로 ‘왜 나를 보나?’라며 보좌관을 빤히 바라봤다.

    정적이 흘렀고, 가운데서 눈치 보던 미리안이 보좌관의 소맷귀를 잡았다.

    “저어… 괜찮아요.”

    미리안이 나서자, 그제야 알렉스도 린느의 드레스를 놔줬다.

    그리고, 그 꼴을 보자마자 밀러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밀러는 늘 그런 식이었다. 미리안이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다면, 곧 그렇다고 믿는 남자.

    그녀를 향한 사랑이 깊고도, 방법을 몰라서 집착광인 거지.

    밀러가 원래 미친놈은 아니었다. 미리안에게 미친놈일 뿐이지.

    “600 실버입니다!”

    미친. 600 실버면 세상에 얼마야?

    ‘한 600만 원 되려나? 돈 많은 귀족이니까 괜찮겠지?’

    린느는 제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보며 느슨히 웃었다.

    그래, 이게 바로 그녀가 꿈꿔 오던 삶이었다.

    고작 남자 하나에 목숨 거는 원작 린느의 삶이 아니라!

    이쯤 되니 이 몸의 주인인 린느가 안타까울 지경이랄까?

    뭐 한다고 밀러 대공에게 목숨을 걸며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그런데 원작 린느는 내 몸에 빙의되어 알바 중이려나?’

    고민도 잠시, 복작거리는 의상실을 뺑 둘러보며 린느는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걱정이랬어. 접자.’

    린느는 단호하게 도리질하며 핸드백과 구두가 진열된 창으로 다가갔다.

    그때, 가게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치이며 사색이 된 미리안이 눈에 띄었다.

    “…….”

    괜히 사람 마음 불편하게 길 잃은 고양이처럼 왜 저러고 있담.

    린느는 검은 핸드백과 미리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울리는데?’

    미리안은 린느와 달리 왜소한 몸집이지만, 퇴폐적인 분위기가 매력이었다.

    성격은 저렇게 순해 빠졌지만 말이다.

    린느는 미리안에게 다가가, 핸드백을 쥐여 줬다.

    그 핸드백은 미니 블랙 에나멜 소재에 태슬 대신에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다.

    “영애와 어울려서요. 드레스는 제가 먼저 집었으니 제 것이지만. 악의는 없었어요. 그러니 오해는 말아 주세요.”

    고작 그 말 한마디에 미리안은 해맑게 웃으며, 눈가를 적셨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계산은 제가 아니라 각하께서 하실 텐데요?”

    린느는 여유롭게 미소까지 지은 뒤, 살롱 밖으로 나왔다.

    ‘원하는 거 샀으니 괜한 체력 낭비는 피해야지.’

    왜냐면, 지금부터 밤새워 놀아야 하니까! 린느는 해맑게 웃었다.

    뭐가 좋다고 허공을 보며 꺄르르 웃는지.

    대공가 마차 안에서 밀러가 그녀를 보며 실소를 뱉었다.

    “미리안의 드레스를 뺏어 기분이 좋은가 보군.”

    “각하, 세르트 영애께서 대신에 다시는 대공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으시겠다 약조하셨습니다!”

    알렉스는 제 할 일이 줄었다며 헤헤 웃었지만, 밀러는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을 믿나? 세르트 영애가 대공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 하, 차라리 해가 북쪽에서 뜬다고 하게. 그리고 세르트 영애라면 마차 뒤편에 몰래 올라탈지도 모르니 그것부터 확인해둬.”

    밀러는 쯧, 혀를 차며 고개를 휙 돌렸다.

    더불어, 린느의 웃는 꼴도 보기 싫으니, 마차 내실 창문을 닫으라는 명령도 잊지 않았다.

    알렉스는 창문을 닫으며, 린느가 약속을 지키길 여신께 빌었다.

    ‘딸랑-.’

    ‘딸랑-.’

    살롱 문이 수차례 여닫혔지만, 린느가 기다리는 영애들은 나오지 않았다.

    ‘딸랑-.’

    ‘딸랑-.’

    한참이 지난 후에야, 영애들이 양손을 무겁게 들고서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

    마차 안에서 졸고 있던 린느가 어깨를 들썩이며 일어나 마차에서 내리려 하자, 영애들이 막아섰다.

    “저어 그런데 어쩌죠…?”

    저 말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건데? 린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 체력이 따라 주지 않아 먼저 집에 간다는 친구의 목소리였다.

    안 된다며 붙잡으려던 찰나에.

    “죄송해요! 저희 디저트 가게는 내일 가면 안 될까요? 정리할 것도 많고, 오늘 너무 무리해서요.”

    “세르트 영애께서도 오늘까지는 저택에서 푹 쉬셔요!”

    “맞아요. 아직 건강 회복에 힘써야 하잖아요.”

    그들의 변명이 완벽해 린느는 그저 입만 삐죽거렸다.

    “뭐어, 어쩔 수 없죠……. 대신에 내일은 디저트 가게도 가고, 오페라 극장도 가요!”

    영애들은 뻐근한 미소를 지으며, 반강제로 고개를 끄덕였다.

    린느는 시무룩하게 마차에 올라탔다.

    영애들과 헤어지자마자 온몸에 지루함이 가득 찼다.

    “아… 집 가기 싫은데…….”

    화장도 잘 먹었고, 아직 놀려면 체력이 핑핑 남아도는데.

    게다가 아직 해가 중천인데 집에 간다고? 이는 죄악이었다.

    나태 지옥에 빠질지도 모르는 죄악.

    린느는 청록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아가씨, 그럼 대공가 근처에 있는 디저트 가게라도 가실래요?”

    “갑자기?”

    “심심하시면 종종 찾으시던 곳인지라…….”

    거기는 밀러 뒤밟기 딱 좋은 명당이니까 갔던 거고.

    “대공 각하와 관련 없는 일정은 없어?”

    “음.”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울릴 뿐, 하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내 기억에도 없어. 밀러의 뒤를 캐는 거 말고는 린느가 노는 꼴을 본 적이 없다고.’

    린느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냥 집으로 가야지, 뭐…. 내일 영애들과 놀면 되니까.”

    * * *

    뭐? 오페라 극장을 가고, 디저트 가게를 가?

    고작 살롱 하나 털었다고 영애들이 돌아가며 몸살을 앓았다.

    결국, 다시 영애들과 만난 건 무려! 일주일 후였다.

    린느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슴통을 활짝 펼쳐 밤공기를 양껏 들이마셨다.

    “흐으음. 하아…!”

    그래, 이거지. 이 맛이지!

    땅거미 진 검푸른 하늘에 브로드웨이처럼 반짝이는 길거리에 잘생긴 영식들까지!

    거기에 가을 저녁 냄새와 어우러진 진한 시가 향!

    이 고급스러운 오페라 극장 뒤에서는 암흑가의 총격전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린느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떡해, 너무 좋아!’를 반복하며 흥분을 삭혔다.

    빙의되기 전, 잠깐 하다만 드레스 업 스토리 게임이 생각난 탓이었다.

    ‘거기 남주도 멋있었는데……. 크흐.’

    이왕이면 역하렘 게임 여주나, 암흑가의 숨겨 둔 애인 역할도 좋은데.

    아니면 하나뿐인 황녀로 온갖 정부들과 썸씽 만드는 것도 좋고?

    아무튼, 그 재수탱이 대공 뒤만 밟다가 죽는 거 빼곤 다 좋다 이거다.

    ‘잠깐, 이 소설에도 마피아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 마피아랑 연애도 해 보고 싶다.’

    온갖 망상을 떨며 서너 번의 결혼 엔딩까지 마친 후에야, 영애들이 도착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어머머, 린느 님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리셔요.”

    “와, 저 린느 님께 반할 거 같아요!”

    린느는 그녀들의 칭찬에 힘을 얻었는지 자리에서 반 바퀴 돌았다.

    그러자,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풍성하게 휘릭 감겼다.

    “저 이거 입고 싶어서 혼났잖아요! 오늘 약속만 기다렸다구요. 예쁘죠?”

    자리에서 한 바퀴 돌고 나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각 잡힌 양복바지에 고급 남성 구두였다.

    린느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

    밤하늘과 어울리는 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또, 밀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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