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라는 책이 유행이더라? 어머! 영애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죠?”
린느는 제 앞에 모여든 영애들을 바라보며 재빨리 유연하게 말을 돌렸다. 거기에 그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손부채질을 하며 고상까지 떨어 주자, 모여든 영애들이 웃음을 보이며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린느 님,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그간 통 뵙지 못해서 걱정했다구요. 괜찮으세요?”
“맞아요! 연회에도 오지 않으시고.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감기는 무슨, 대공저 들쑤시다가 얻은 감기라면 또 모를까!
영애들은 그녀의 ‘감기’가 곧 ‘대공저 들쑤시기’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걱정 어린 말을 보탰다.
‘착해빠진 영애들 같으니. 성격 더러운 린느랑 지내느라 얼마나 고생 많았을 거야?’
원작에선 린느가 대공의 꽁무니만 쫓아다녀서 영애들과 친해질 틈도 없었지만, 그건 원작 이야기이고.
이대로 잘 지내다 보면 이 영애들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지 않을까?
린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 정도면 정말 다 차려진 밥상 아니야? 난 이대로 내 라이프를 즐기기만 하면 될 거 같은데?’
뭐 어디, 세르트 자작가가 보통 가문인가? 줄도 잘 타고 돈도 많은 평범한 귀족 가문인걸!
그래도 굳이 다른 가문과 다른 점을 말하자면 한두 가지 정도뿐이었다.
첫째, 세르트 자작 부부는 돈이 많은 가문인데도 돈 욕심이 많다는 것.
둘째, 그들의 첫째 딸인 린느 뷔 세르트는 밀러 대공의 집착광이란 것.
그 두 가지만 제외하고는 피폐물 소설 속 보기 드문 행복에 가까운 가문이었다.
이 평범한 가문이 밀러 대공에게 짓눌려 멸문당한 이유는 하나였다.
린느가 여주를 질투해, 미리안을 모함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인생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거다!
‘하, 쉽다 쉬워. 어차피 주연들이야 대공저에서만 지낼 테니 마주칠 일도 없을 테고. 난 우리 착한 영애들과 몰려다니며 연회장이나 휩쓸겠어.’
린느는 보조개까지 접어 웃었다. 동시에, 양팔을 반쯤 펼쳐 천천히 가슴께로 모아 얹으며 여신처럼 자애로운 미소도 잊지 않았다.
“이게 다 우리 영애들께서 절 한마음 한뜻으로 걱정해 주신 덕이죠!”
텐션 좋고, 표정 좋고, 거기에 진심 한 스푼까지 캬, 완벽했다.
린느가 제 연기에 감탄할 때쯤, 영애들은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말미에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정말 괜찮으신 거죠?”
다른 이는 린느를 모시는 하녀의 귀에 속닥거렸다.
세르트 영애가 정말 괜찮은지, 언제부터 저렇게 됐는지 등등.
하지만, 하녀는 린느를 두둔할 뿐이었다.
그중 한 명이 린느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저어, 영애… 그,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세상에 절반은 영식이잖아요?”
“맞아요, 맞아. 이렇게 의상실 투어도 하고, 디저트 가게도 함께 가요. 네?”
영애들이 린느의 손등을 토닥이며 안쓰럽단 표정까지 짓자, 린느는 씩 웃었다.
“아휴, 그럼요! 제가 며칠 동안 생각을 해 봤는데, 그간 제가 너무 과했어요.”
“흠모하면 과할 수도 있죠, 뭐. 하하.”
영애들은 하나같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눈에도 린느의 집착이 과해 보이긴 했나 보네…….
하긴, 과해도 엄청 과했지.
어쩌면 밀러와 린느는 서로 잘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집착에 진심인 사람들이니까.
린느는 유연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무튼, 과거는 청산하고 전 제 삶을 살 거예요! 그러니 영애들께서도 저와 자주 놀아 주셔야 해요!”
“어머, 말씀이라 하셔요?”
“그럼요!”
그들의 대답에 린느는 토끼 눈을 하며 씩 웃었다.
“그럼, 주말 낮에 우리 피크닉 갈래요? 아,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오페라 극장에 가면 되겠네요. 그리고…… 혹시 이번 주말에 열리는 연회가 있을까요?”
“어… 음.”
“그, 글쎄요?”
“하, 아쉽네요. 주말 저녁엔 연회장을 돌아야 하는데!”
린느는 붉게 물든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었다. 보다 못한 한 영애가 주변 영애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 연회가 있긴 한데. 그날 대공 각하께서 참석하실지도 모르는 연회인지라…….”
“하지만 대공 각하께서 불참하실 가능성이 더 커요. 아시다시피 대공 각하께선 연회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분이잖아요?”
“그래도 이번 연회엔 참여하실지도 몰라요. 보통 연회는 아니니까.”
영애들이 공유해준 정보에 린느는 낯에서 웃음기를 쏙 뺐다.
그 잘난 얼굴 한 번쯤은 직접 보고 싶단 호기심이 일었지만, 반대로 그 호기심에 목숨을 걸 순 없었다.
“그, 대공 각하께서 참석하시지 않을 다른 연회는 없을까요?”
“다른 연회…. 이번 주엔 그 연회뿐이라서요.”
린느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게 잘못하다간 주말 저녁을 집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달칵.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의상실 문이 활짝 열렸다. 줄을 이어 대기하던 영애들의 시선이 마담에게로 몰렸다.
“상점 개시 시작하겠습니다!”
마담의 우렁찬 목소리에 그 많은 영애가 단번에 의상실을 밀고 들어섰다. 다들 치맛자락을 야무지게 올려잡고 들어섰는데, 그들 중에서도 가장 빨리 치고 들어간 건, 역시 린느였다.
‘드레스! 드레스부터!’
테슬과 보석으로 이뤄진 자그마한 핸드백에 눈이 갔지만, 드레스가 먼저였다.
입을 드레스라곤 온통 검은색 드레스뿐이니,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은 드레스 한 벌은 구매해야 한다.
“후!”
그간 필라테스로 다진 코어 근육을 이용해 드레스 코너까지 무리 없이 진입했다. 곧장, 닿는 손으로 옷걸이를 착착 넘기며 디자인과 색, 피팅 후 모습까지 챙겼다.
‘이건 허리 라인이 애매해, 이건 색이 별로야. 이건… 너무 무난해!’
자고로, 드레스란 뽐내기 위해 입는 게 아닌가!
근데, 이렇게 밋밋해서야 원. 이번 사냥은 실패라며 실망할 때쯤 붉은색 드레스가 린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적당한 셔링에 매끄러운 허리 라인까지! 우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느낌의 드레스였다. 린느는 코뿔소처럼 단번에 옷걸이를 잡아챘다.
“이거……!”
“앗!”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꺼냈는데, 옷걸이를 잡은 사람 손이 두 개였다.
린느는 눈에 힘을 퐉 주고서, 옷걸이 반대편을 쥔 영애를 노려봤다.
당장, 내 먹이에서 손 떼라는 듯 맹수처럼 사나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저기요. 하, 거참 손 좀…….”
그런데 잠시만. 흑발에 붉은 눈동자. 부러질 듯이 약한 몸체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까지.
‘미, 미리안!?’
원작 여주인 미리안이었다. 린느는 저도 모르게 놀란 눈으로 미리안을 빤히 응시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망울에 힘까지 줘 부릅뜨자, 미리안은 재빨리 옷걸이에서 손을 떼며 안절부절못했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린느의 눈엔 미리안은 보이지도 않았다.
미리안의 어깨너머로 비치는 의상실 입구. 그러니까, 입구에 기대어 죽일 듯이 저를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와 마주친 탓이었다.
‘너희가 왜 여기서 나와……?’
금안의 주인공은 한눈에 봐도 원작 남주인 페리하츠 폰 밀러 대공이었다.
대공저에서 온갖 오해와 착각을 밥 먹듯이 하며, 고구마밭 운영에 진심이어야 할 두 사람이 왜…….
‘여기에 왜 있어? 그것도 전체이용가나 들락날락할 의상실에 왜? 꾸금이면 꾸금답게 대공저에서만 지내라구, 안 어울리게!’
린느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잠깐….
‘가만있어 봐. 일단 내가 살아 있다는 건, 소설 초반이란 거잖아?’
그렇다면, 밀러가 아직 미리안에게 집착하기 전이란 소리이고?
생각을 정리하려는 그 잠깐 사이에도 창문 밖에서 자신만을 노려보는 금빛 눈동자가 거슬렸다.
‘아씨,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린느는 헛기침을 하며, 자연스럽게 마담에게 드레스를 건넸다.
“큼흠, 이, 이거 살게요.”
“안목이 아주 탁월하십니다! 어쩜 영애와 딱! 어울리는 색과 디자인을 고르셨는지!”
“이 정도는 기본이죠. 마담, 매달 신상이 나오는 건가요? 맞춤 제작도 하죠?”
“그럼요!”
마담은 잠시 주변을 훑어보더니 린느의 귓가에 속삭였다.
“매달 첫째 주마다 신상품을 진열하는데, 미리 선입금해 주시면 저택으로 제가 직접 가 드릴 수도 있어요. 그럼 그 누구보다도 먼저! 신상을 접하실 수 있게 되겠죠?”
린느는 청록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마치 사탄의 속삭임처럼 마담의 상술은 가히 대단했다.
“레이디께서 안목이 너어무 탁월하셔서 드리는 정보이니 참고해 주세요!”
“그럼요!”
마담의 칭찬에 방긋 웃던 린느가 제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을 밀러를 떠올리며 돌연 웃음을 지웠다. 마치, 맹수가 뒤통수를 노리는 듯한 싸함이었다.
‘언제 가려는 거지? 절대 뒤돌아보면 안 돼. 뒤돌아 보…….’
“저, 세르트 영애?”
린느는 숨을 할딱 들이쉰 상태로 그만 굳었다. 나직이 ‘망했네’라는 말만 되뇔 뿐이었다.